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2
#1031화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해내야 한다. 해내야 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막중한 책임의 무게는 뒷걸음질 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나아가는 이유였다.
쉭.
아직도 손에 붙잡혀 있던 일노를 내려놓는 동시에 지면을 밟았다. 동시에 쏘아졌다.
유령환살보(幽靈幻殺步).
고금제일의 살수에게서 얻은 묘리(妙理)가 발끝에 실린다.
두 다리는 더없이 가벼웠고, 나를 스쳐 간 바람은 이내 누군가로부터 흘러나온 열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힘주어 창대를 그러쥔 그 순간.
솨아악.
세상이 느려졌다.
머리 위 허공으로부터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는 일곱 줄기의 강기를 향해, 나와 적천강은 동시에 두 손을 흩뿌렸다.
콰아아아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잠시 멈췄던 시간의 흐름이 급류가 되어 터져 나왔다.
콰드드드득!
격돌의 여파로 땅거죽이 뒤집힌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기처럼 가볍던 발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만 근의 중압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격돌과 동시에 느껴지는 힘의 격차에, 나도 모르게 이가 악물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이다.
일곱.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닌 무려 일곱 기의 데스 나이트.
아니, 과거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다 못해 그 이상으로 거듭난 흑의인들은 너무나도 강했다.
적천강과 함께임에도 그 위력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흡……!”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억눌린 숨소리.
화왕(火王)이라는 별호를 증명하듯 홀로 넷이나 되는 적을 막아선 적천강이었지만, 이 찰나의 대치는 순식간에 깨져 나갈 유리병과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쐐애액, 콰앙!
칠흑 같은 강기로 뒤덮인 세 자루의 창검과 백염의 창날이 다시 한번 맞닿은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저절로 굽혀지는 무릎을 느꼈다.
‘강하다. 천산삼노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물론 천산삼노 역시 강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고수들이지만, 내가 단신으로 놈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은 벽력도왕의 공력을 이어받으며 얻은 깨달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한 마리의 호랑이보다, 무리 지은 늑대들이 무서울 때가 있는 법.
천산삼노가 지금껏 쌓아 올린 악명은, 바로 후자와 같은 부분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과거 서천마군을 따라 사천을 피로 물들였던 기련삼괴(祁連三怪)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힘과 기세로 나를 조여 오고 있는 흑의인들은 달랐다.
저들은 호랑이다.
천산삼노와는 달리 하나하나가 산맥을 호령할 수 있는, 아니 분명 과거에는 그러했을 강자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 호랑이들이 영혼을 잃고 더욱 강해진 채, 무리를 지어 한 사람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직접 겪어 보니 어때, 실로 대단하지 않나? 나는 저들을 흑귀(黑鬼)라고 부른다네.”
선봉의 흑의인들, 아니 일곱 명의 흑귀를 뒤따라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적들의 거대한 함성 속에서도, 혈검마군의 음성은 선명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과 함께 강렬함을 더해가는 그 기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너무 발악하지 말게. 적 선배야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다지만, 자네는 아주 중요한 전리품이거든.”
비록 흑귀들의 모습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흐릿하게나마 눈앞에 그려졌다.
빙긋 웃고 있는 혈검마군의 얼굴이. 곧 벌어질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극을 기대하며 흥분에 가득 차 있을 놈의 눈빛이.
“혹시 아나? 지금이라도 얌전히 투항한다면, 스승과 제자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극. 그그극!
막강한 압력 속,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좆…… 까!”
콰앙!
일순간 쳐 올린 창대와 함께, 세 자루의 창검이 동시에 허공으로 들렸다.
무려 사 갑자에 달하는 공력과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신체 능력은, 영혼의 대가로 더욱 거대한 힘을 얻은 흑귀들의 합공도 잠시나마 뿌리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빈틈은, 곧 다시 없을 기회이기도 했다.
서걱!
전력을 다해 휘두른 일격이 놈들을 베었다.
정확히는 세 마리의 커다란 흑마를, 그 자체로도 강력한 괴물이라 할 수 있는 유령마(幽靈馬)를 반으로 갈랐다.
푸화아악!
살아 있는 생물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핏물 대신, 거무스름한 안개가 터져 나오는 믿지 못할 광경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적천강이 입을 딱 벌렸다.
“이 무슨 개 같은……!”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순식간에 애마를 잃은 흑귀들이 잠시 균형을 잃은 틈을 타, 나는 적천강과 대치하고 있던 흑귀 넷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쉭 카카카캉!
베고, 찌르고, 후려치고.
그리고 벼락과도 같은 세 번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 낸 놈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새하얀 광염에 휩싸인 적천강의 일장이었다.
“뒈져라.”
후욱, 퍼어엉!
파공성마저 지우며 쏘아진 화염신장이 한 흑귀를 후려쳤다.
정확히 가슴을 격중당한 놈이 포탄처럼 튕겨 나가는 광경에, 적천강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좋아. 이제 한 놈…….”
– 그으으.
분명 전신이 검게 그을린 채 절명했어야 할 흑귀가, 기이한 신음과 함께 신형을 바로잡기 전까지는.
“……이 아니로군.”
그래도 화염신장의 충격이 남아 있는 듯, 비틀비틀 일어나는 흑귀를 멍하니 바라보던 적천강이 나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저 씨부럴 것들은 도대체 뭐냐?”
콰앙!
흑귀 중 하나의 검을 받아친 나는 호흡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데스. 데스 나이트요.”
“대수대수나이두(大手大手挪移頭)라니,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더냐.”
안타깝게도, 나는 적천강의 의문을 해소시켜 줄 수 없었다.
내가 미처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앞서 나가떨어진 놈까지 합류한 흑귀 전원이 동시에 달려들었으니까.
꽈아아앙!
귀가 먹먹하다. 손목에서 격통이 전해지고, 두 다리는 지면 깊숙이 박혔다.
마치 태산(太山)이 짓누르는 듯한 무시무시한 압력.
그리고 나와 적천강이 강철의 숲에 갇힌 그때, 어디선가 맹렬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쉭, 차차창!
흑귀 중 하나가 휘두른 대도에 십여 개의 비수가 튕겨 나가는 광경에, 나는 이 싸움에 겁 없이 끼어든 누군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마표. 이 멍청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그러나 용기와 멍청함은 한 끗 차이다.
사마표는 멍청했지만 용감했고, 고작 한 놈의 주의를 돌렸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우리의 숨통이 트였다.
“노야, 지금!”
“염병할!”
욕설을 토해 낸 적천강이 벼락처럼 일권을 뻗었다.
콰드득!
멸염신권(滅炎神拳).
폭발하듯 터져 나온 불길이 흑빛 강기로 뒤덮인 병장기들을 잠시나마 밀어 낸다.
그리고 반경 수십여 장을 떨어 울리는 그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력은, 불길 사이를 쾌속하게 가로지른 섬광의 존재감을 잠시나마 가려 주기에 충분했다.
쐐애액, 푹!
사마표의 손을 떠나, 어느 흑귀의 목줄기에 틀어박힌 비수가 부르르 떨렸다.
물론, 그마저도 놈을 쓰러트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푸슉.
아무렇지 않게 비수를 뽑아내는 흑귀의 모습에, 잠시 포위망이 흩어진 틈을 타 뒤로 훌쩍 물러난 내가 입을 열었다.
“아까 물어보셨죠. 그래서 데스 나이트라는 게 정확히 뭐냐고.”
“…….”
“저런 새끼들입니다.”
“……니미럴. 아주 지랄났군.”
탄식하는 적천강과 달리, 곁으로 다가온 사마표의 얼굴은 침착했다.
“괴물들이로군.”
“미친놈. 아까 뒤로 빠졌어야지, 뭐 좋은 구경하겠다고 여기까지 와?”
“그렇지 않아도 후회 중이다. 그나저나 저것들은 도대체 뭐지? 일종의 강시인가?”
“비슷하긴 한데, 그것보다 좀 더 질이 안 좋은 거라고 해 두지.”
차라리 강시인 것이 천배쯤 낫다.
모산파 특산품이면 이쪽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토종이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흑귀라 불리는 저 데스 나이트들은 외래종이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모든 법칙과 상식을 송두리째 무너트릴.
아니, 이미 무너트려 버린.
‘도대체 어떻게…….’
나는 조용히 침음성을 삼켰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모두가 믿고 있던 규칙은 허물어졌고, 우리는 그 잔해를 수습해야 하니까.
그래. 비단 몇몇의 개인이 아닌, ‘우리’가.
드드득.
지면이 잘게 몸을 떨었다. 온 사방을 뒤흔들던 함성은 어느덧 내 뒤에, 적천강과 사마표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무량수불.”
나직한 음성과 함께 다가온 것은 풍운검군이다.
그의 좌우에는 같은 스승 아래 동문수학한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 일천에 달하는 종남파 제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껏 굳은 얼굴을 한 누군가 역시도.
“결국 이리되는군.”
흑야왕 사마공.
머릿수만큼은 결코 적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무수한 감숙 무림인들을 거느린 그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아니, 정확히는 사마표를.
하지만 뭐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던 그는 끝끝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고, 이내 정면을 응시했다.
마침내 이 드넓은 설원(雪原)에서 맞닥트린, 사막 너머의 지배자들을.
“그만.”
묵묵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흑귀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그 중심으로 수만여 명의 대군을 등진 혈검마군이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그래, 이렇게 나와 줘야지.”
우우웅.
별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정마대전을 장식한 무수한 마두 중에서도 손꼽히는 혈겁(血劫)을 쌓았던 회백색 검신이 몸을 떨었다.
검붉은 강기를 울컥울컥 쏟아내며, 끊임없이 잇고 결합시키며 정면을 향해 겨누어졌다.
돌아가기에는 모든 것이 늦어 버린,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방해꾼들을 향해.
으아아아아!
함성이, 살기가,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이고 증폭된다.
그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 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사박.
차갑다. 발끝에서 서리가 부서진다.
두근.
심장이 뛴다.
가파르고 거친 그 박동에 맞춰, 발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쉭. 쐐애애액!
바람이 불었다. 선선했던 산들바람이 광풍(光風)이 되어 휘몰아치고, 나는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이 거대한 전장의 모두가.
와아아아아!
함성과 구름, 바람.
그 너머에서 번뜩이는 수많은 날붙이들.
그리고 눈부시도록 새하얀 설원을 가로지른 두 갈래의 거대한 군세가, 마침내 그 중심에서 격돌했다.
콰드드드득!
새하얀 눈밭이 붉게 물든다.
뭉클거리며 번져 가는 피 안개 속, 그 무수한 비명과 죽음을 비집고 초인(超人)들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