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4
#1033화
하나의 무공에는 최소 수십여 개의 움직임과 그에 맞는 묘리(妙理)가 담겨 있다.
하지만 어떤 무공을 익혔더라도, 결국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막거나, 피하거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쾅! 콰드드드득!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섬광이 지면을 강타한다.
지진이라도 난 듯 뒤집히는 땅거죽과 어마어마한 충격파.
적게 잡아도 십수 명에 달하는 적들이 그 여파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정작 돌조각 따위의 파편으로 생채기만 입은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빠르고, 강하다.’
제법 먼 곳에서 쏘아진 투창(投槍)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속도와 파괴력.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조금 전의 회피는 내게 있어 선택이 아니라 강요나 다름없었다.
만약 곧바로 맞받아치는 것으로 대응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분명 상당한 힘이 소모되었을 테니까.
곁에 있는 적천강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평범한 내력을 지닌 놈들은 아니로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뇌까린 적천강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방향의 끝에는, 저마다의 주인을 실은 채 허공을 밟으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네 기의 유령마가 있었다.
“넷이라. 앞서 우리를 피해 지나쳐 간 놈들이 몇 명이었지?”
비록 기련산만큼은 못하더라도, 대설산 일대 역시 드넓은 면적을 지닌 곳.
옅은 서리가 뒤덮인 산 밑의 땅은 지금처럼 엄청난 숫자의 적과 아군이 뒤얽힌 대규모 회전(會戰)을 벌일 수 있을 만큼 광활했고, 그 누구보다 앞서 하나의 송곳처럼 적진을 돌파한 나와 적천강으로서는 놈들 모두를 막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몸통이 아니라 머리를 베어 내는 것이었으니까.
“제가 본 게 맞으면, 둘이요.”
나는 앞서 창이 날아오기 전, 저 멀리서 전해졌던 굉음과 진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방향과 거리를 짐작해 보았을 때, 그건…….
“아마도 그 두 놈이, 종남파 쪽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물경 삼만에 달하는 아군 중 종남파의 병력은 일천에 불과하지만, 그들 전원이 속가가 아닌 본산의 정예인 데다 세 명의 초절정 고수가 포진해 있는 만큼 강력하다.
적들이 확실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막아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할 터였다.
“그럼 지금 나타난 저놈들까지 합쳐서 다섯이로군.”
이미 둘을 놓쳤고, 이제 넷이 나타났다.
그러나 데스 나이트, 아니 흑귀(黑鬼)라 불리는 저 괴물들은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총 일곱.
나는 백염을 고쳐잡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 자리가 비네요.”
“그렇다면 나머지 한 놈은.”
“혈검마군의 곁을 지키고 있거나, 사마공이 이끄는 감숙 무림인들 쪽으로 향했겠죠. 만약 후자가 아니라면…….”
나는 조용히 말꼬리를 흐렸지만, 사마공의 수상쩍은 행적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적천강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사마공, 그 빌어먹을 사파 놈이 암천과 붙어먹었다는 거겠지.”
그래, 맞다.
단순히 사마공 쪽으로 흑귀가 가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확실하게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배신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혈검마군이라면, 이미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사마공에게 구태여 흑귀를 보내진 않을 테니까.
더군다나…….
‘저 정도의 전력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나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가까워지는 흑귀들을 응시했다.
제각각 도, 검, 창, 그리고 쇄겸(鏁鎌)이라 불리는 사슬낫을 든 그들은 전진하는 적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우리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일성(一城)을 뒤흔들 정도의 초절정 고수들.
거기에 더해 고통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엄청난 회복력은 인간을 벗어났다.
아니, 놈들은 이미 완전한 괴물이었다.
지금껏 무림의 그 누구도 접해 보지 못했을 기이한 존재들.
“노야.”
“더 이상 말할 것 없다.”
콰드득!
이 와중에도 영혼 없는 눈으로 달려드는 적의 머리를 일권에 박살 낸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저놈들이 어떻게 되먹은 괴물들인지는 몰라도, 죽을 때까지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온 그 순간.
팟.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쏘아진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휘두르고 내뻗었다.
나는 검푸른 강기가 넘실거리는 백염의 창날을, 적천강은 새하얀 불길에 휩싸인 일장을.
화아아악!
휘황한 섬광이 반경 십여 장을 감싸 안고, 사방에서 끊임없이 밀려들던 광신도의 파도가 갈라졌다.
아니, 증발했다.
꽈앙! 드드드드득!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끔찍한 화염신장의 열기로 순식간에 타들어 간 시신들이 힘없이 허물어지고, 창날에 베어 병장기와 함께 조각조각 나뉜 채 갈라져 튕겨 나갔다.
비록 고통도, 감정도 제거된 그들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숨이 끊어진 일백여 명의 적들 모두에게 죽음은 평등하게 찾아왔다.
그리고 삽시간에 죽음으로 뒤덮인 그 공백 사이로.
스아아아.
어스름한 밤안개와도 같은 죽음의 기운을 덧씌우며, 네 마리의 흑귀가 나와 적천강을 향해 짓쳐 들었다.
쏴악!
무시무시한 압력을 불러일으키는 날붙이를 따라 바람이 갈라진다.
제각각 동서남북을 점한 채 일격을 내지르는 놈들의 모습은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렸고, 그렇기에 일말의 빈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빈틈이.’
나는 마음속으로 뇌까리며,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뻗어 오는 도신과 창날에 맞서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정확히 목을 노리며 꿰뚫어 오는, 그 섬뜩한 두 줄기의 섬광을 향해서.
죽음의 공포로 서늘해지는 등골과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속 확신을 애써 다잡으며.
“이게 무슨 짓……!”
그리고 적천강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진 그 순간.
피핏!
목줄기의 좌우를 아주 미세하게 베어 내며 스쳐 지나간 두 자루의 날붙이에, 찰나의 고통조차 잊은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내가 공격을 피해 낸 것이 아니다.
조금 전 목숨이 위태로워졌던 절체절명의 순간, 두 마리의 흑귀는 억지로 병장기를 비틀어 경로를 바꾸었다.
이유?
간단하다.
결코 나를 죽여서는 안 되니까.
지금 이 전장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우두머리가, 바로 혈검마군이 그렇게 지시했으니까.
‘아마 천산삼노였다면 그러지 못했겠지.’
아니, 정정한다.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흑귀들과는 달리 감정과 이성이 남아 있는 그들에게는 지시를 이행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목숨이 백 배, 천 배는 더욱 소중했을 테니까.
나를 생포하기 위해 저지른 이 자그마한 실수가, 곧 그들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슈확!
보이지 않던 빈틈, 그러나 스스로 드러낸 그 빈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퍼걱!
순간 석상처럼 굳어 버린 흑귀의 신형.
정확히 목울대를 관통한 백염의 창날을 타고, 내가 흘려보낸 사 갑자의 열양지기가 터져 나왔다.
퍼어엉!
폭발하는 화염.
머리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흑귀의 신형이 말안장에서 굴러떨어지기 전, 동료의 위기를 뒤늦게 알아차린 또 다른 흑귀가 내 목줄기 옆을 스쳐 지나갔던 도신을 비틀어 휘둘렀다.
서걱!
뜨겁다. 풍압만으로도 베여 나간 어깻죽지에서 붉은 핏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 또한 있는 법이다.
콰득.
순간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운 감촉.
칠흑색 갑주로 둘러싸인 놈의 손목을 다른 한 손으로 잡아챈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쥐어 짜내듯 비틀었다.
까득. 우드득.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짓뭉개지는 살과 뼈.
흑귀가 죽음을 딛고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한 힘을 얻었다면, 나는 무수한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는 괴물은 놈들뿐만이 아니다.
우지지직!
병장기를 쥔 손목을 그대로 뽑아 버린 나는, 멍하니 굳어 버린 놈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앙!
산산조각 나는 흑색 갑주와 함께 고약한 탄내를 풍기며 나가떨어지는 몸뚱어리.
그러나 나는 안다.
놈들이 어느 정도의 괴물인지.
놈들에게 추가로 주어진 저주받은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기고 끔찍한 것인지.
저벅.
이미 또 다른 흑귀 두 마리와 뒤얽혀 싸우고 있는 적천강을 뒤로한 채, 나는 어느덧 비틀비틀 일어나는 흑귀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 어디 한번 가려 보자.”
스아아아.
전신을 휘감으며 피어오르는 거무스름한 안개로 무참하게 뽑혀 나간 팔을, 화염에 의해 녹고 바스라진 뼈와 살을, 심지어는 사라진 목까지 재생시키는 괴물들을 향해.
“어떤 놈이 더 괴물인지.”
슈화아악, 서걱!
화룡일미(火龍一尾).
눈이 부시도록 흰 창날을 휘감으며 불길처럼 타올라, 벽력처럼 안개를 가로지른 일격이 검푸른 파도가 되어 놈들을 베어 갈랐다.
* * *
“엄청나군. 아주 대단해!”
마치 생일날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혈검마군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눈 앞에 펼쳐진 전장을 바라보았다.
차차차창!
높은 언덕 위에서부터 저 멀리 펼쳐진 설원까지.
수백여 장을 빽빽하게 뒤덮은 도산검림(刀山劍林)이 춤추고 있다. 번뜩이는 섬광이,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달구고 식혀졌던 그 날붙이들이 마침내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퍼걱!
끄아아아악!
온 사방에서 빗발치는 고함과 비명 사이, 붉디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모두의 머리 위에 흩뿌려진다.
들숨 한 번에 수십의 생명이 사라지고, 날숨 한 번에 그 빈자리가 채워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의 연쇄가 끝없이 이어지는 그 참혹한 현장은, 오랜 세월 동안 사막 너머에만 머물러야 했던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린 혈검마군의 눈동자는 어느덧 몽롱하게 젖어 있었다.
얼마나 그리웠던가.
어찌나 바래 왔던가.
이제는 까마득해져 버린 과거, 천마라 불리던 이의 곁에서 십만 마도를 이끌고 천하를 가로질렀던 적이 있었으나 혈검마군에게 있어 그 시절의 기억은 퍽 즐겁지 않았다.
혈검마군은 그때에도 피에 미친 한 마리 사냥개였을 뿐이었고, 천마는 그런 그에게 별다른 지휘권을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새로운 주인은 혈검마군에게 수만 명의 생사 여탈권을 안겨 주었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진태경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아주 간단한 하나의 조건만을 전하며.
‘이토록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시다니.’
무려 일곱이나 되는 흑귀를 내주었다는 것이 바로 그 결정적인 증거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저들까지 있는 한, 이 전투는 어떤 경우에서도 결코 질 수 없다.’
문득 전장에서 눈을 뗀 혈검마군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삼엄한 호위를 받고 있는 백의인들을 바라보았다.
흑귀들에 비해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어쩌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전력이 될 수도 있을 그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