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5
#1034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새하얀 백의(白衣)를 차려입은 그들은 온통 칠흑과도 같은 암천의 교도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들이었다.
풍성하다 못해 땅에 끌릴 만큼 길게 늘어진 소매와 얼굴 대부분을 가린 면사(綿絲).
의복이라기보다는 커다란 비단에 가까운 그것으로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채 말없이 전장을 주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혈검마군의 입장에서도 썩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한편으로는 불편하기까지 했다.
과거 한솥밥을 먹던 동료에서 이제는 맹목적인 살인 병기로 거듭난 흑귀(黑鬼)들과는 달리, 저들의 지휘권은 혈검마군이 아닌 ‘그분’께 있었으니까.
‘단지 그 정도에 그쳤다면, 차라리 나았을 수도 있겠지.’
피로 뒤덮여 가는 전장을 바라볼 때만 해도 생기가 감돌던 혈검마군의 눈빛에 문득 언짢음이 스쳤다.
‘이토록 훌륭한 전장을 코앞에 두고 구경만 해야 한다니.’
언짢은 정도를 넘어, 이제는 불쾌하기까지 한 기분.
고작 스무 명에 불과한 백의인들을 스쳐 지나간 그의 시선이 한 사람에 이르러 우뚝 멈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혈검마군은 떠올렸다.
불과 일각 전, 흥에 겨워 선두에 나선 자신을 가로막았던 나직한 음성을.
‘마군께서는 조금 더 인내하시지요.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만약 정마대전 당시의 혈검마군에게 누군가가 저런 말을 했다면, 그는 즉시 헛소리를 지껄인 놈의 주둥이를 찢고 혀를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십여 년은 참으로 긴 세월이었고, 그사이 혈검마군은 조금 더 성숙해졌다.
보다 정확히는, 새로운 주인인 천주(天主)를 향한 두려움과 경외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고 살심을 억누르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지금 이 순간에도 혈검마군이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저 호리호리한 체구의 백의인이, 감히 그의 행사를 방해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실로 간단명료했다.
‘그분만 아니었더라면.’
모든 백의인들의 우두머리 격인 동시에, 심지어 혈검마군 자신보다도 가까이에서 천주를 모셨던 자.
그러니 살귀(殺鬼)의 기질을 타고난 혈검마군으로서도 단순한 수틀림을 명분 삼아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한들, 한 번 뒤틀린 심기까지도 꾹꾹 눌러 삼킬 인내심은 혈검마군에게 없었다.
“놈들이 제법 잘 버티는군. 진즉 내가 나섰다면 이미 전황이 크게 기울었을 텐데 말이야.”
시선과 음성에 담긴 것은 노골적인 이죽거림.
하지만 표적이 된 백의인은 물론, 그를 둘러싼 누구도 혈검마군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혈검마군이 애써 참고 있던 마음속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희한하지 않나. 나서지 말아야 할 때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서더니, 정작 지금은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하는 모습이.”
마치 뱀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줄곧 시선이 고정되어 있던 백의인을 향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아니면, 앞으로도 영영 벙어리가 되고 싶다는 뜻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 그 순간, 마침내 그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아니, ‘그녀’가.
“마군께서는 제게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한 치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대답.
자신과는 상반되는 침착한 음성에, 혈검마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곳의 수장은 나다. 그분의 뜻을 받들어 여기까지 왔지.”
“압니다. 저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요.”
“한데, 감히 너 같은 계집 따위가 내게 명령을 내린단 말이냐?”
“명령이 아니라, 단지 만류했을 뿐입니다.”
얼굴에 드리워진 새하얀 비단 아래, 앵두 같은 입술이 다시 한번 달싹였다.
“그리고 그것이, 곧 그분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
순간 들려온 예상치 못한 대답에, 혈검마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그분께서 이를 원하실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분께서, 위대하신 천주께서 내가 나서기를 원치 않는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리는 혈검마군을 향해, 여인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런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이하게 느껴지는 무늬가 수실로 새겨진 순백색의 면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그분께서는 가급적 마군께서 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해를 입는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혈검마군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열과 성을 다해 누군가를 섬기는 수하로서 더없이 치욕적인 말이었다.
물경 삼만을 넘어가는 마병(魔兵)과 비록 이제는 쓸모없어졌지만 천산삼노라는 세 마리의 사냥개.
거기에 더해 일곱 기나 되는 흑귀들까지 거느린 그다.
뿐인가.
아직 온전한 전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을 뿐, 혈검마군 스스로도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오른 최고수였다.
반면 적들은?
무엇하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전장의 향방을 뒤바꿀 수도 있는 초절정 고수의 숫자, 병력 개개인의 질, 마지막으로 기세까지도.
이미 저울추는 기울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기울고 있다.
한데, 한데 어째서 저 계집은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
그저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굳게 믿었던 자신의 마음에, 어찌 이리 커다란 바위를 던져 균열을 일으키는 것일까.
“지금 한 말, 목을 걸고 책임질 수 있겠느냐?”
어느새 차갑게 식은 눈빛과 목소리.
하지만 그런 혈검마군의 모습에도, 뒤이어 되돌아온 여인의 대답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분께서 마군을 아끼시는 마음이 하해와 같으니, 부디 뜻을 헤아려 주시지요.”
사실상 시인이나 다름없는 한 마디.
혈검마군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분께서 나를 아끼신다라. 그래, 그럼 마땅히 헤아려 드려야지.”
분명 웃고 있으나, 도무지 웃는 것 같지 않은 그의 미소에 여인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잘 아시겠지만 이미 앞서 네 분의 마군, 마후께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대업(大業)을 맡아 이뤄낼 충직한 종이 한 사람이라도 더…….”
“그만.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것이 전부 아니더냐.”
“……마군. 그것이 아니오라.”
“되었으니 그 입 다물어라. 이제 그분의 뜻은 충분히 알았으니.”
혈검마군은 담담하게 뇌까렸지만, 이미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뇌리에 남아 있는 생각은 달랐다.
‘당신께서 직접 지켜보시기에, 속하는 고작 이 정도의 그릇밖에 되지 않았습니까?’
우둑.
어느샌가 있는 힘껏 말아쥔 손에서 뼈마디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새하얗게 물든 주먹 사이로, 손톱이 조금씩 살갗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속하는…… 온 힘을 다해 충성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당신을 따랐습니다.’
그는 천주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상상할 수도 없던 아득한 경외와 두려움으로 인한 그 떨림을,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던 충격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비록 속하가 원했던 중책을 맡지는 못했으나, 장장 오십여 년의 세월을 오직 당신의 대업을 받들기 위해 살았습니다.’
정마대전.
그 길었던 대전쟁의 끝자락에서 천마가 무신에게 최후를 맞이했을 때, 혈검마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지켜본 천마도 결국 한낱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한때나마 거대하다고 느꼈던 포부도, 젊은 시절의 혈검마군을 압도적으로 무릎 꿇렸던 고강한 무위도, 전부 천주를 만난 이후로 빛이 바래져 버렸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진정으로 섬길 자격이 있는 주인을 찾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암천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동한 그곳에서, 또 다른 다섯 명의 거마(巨魔)가 자신보다 윗줄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을 앉기 전까지는.
‘그때에도, 속하는 그저 당신께 복종했습니다.’
그는 말없이 이해했다.
본래 마교 내에서의 서열이 그보다 높았던 서천마군에게는 그럴 만한 명분이 있었고, 동천마군과 북천마군은 중원 깊숙이 심어 놓은 비수였기에 그 중요성에 따라 높은 대우를 받을 만했다.
남천마후도, 혈주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는 불만이 싹텄지만, 그것이 곧 주인의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조금은 속하를 믿어 주셨어야지요.’
천주가 그토록 신뢰했던 네 명의 마군과 마후는 끝끝내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보기 좋게 실패했고, 죄를 추궁하기도 전에 이승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혈검마군의 차례가 왔다.
질기게도 살아남은 혈주와 함께 그는 마침내 천주의 양팔이 되었다.
오른팔이든 왼팔이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혈검마군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주인의 신뢰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한데, 무엇이 그토록 우려되셨단 말입니까.’
이미 죽고 없는 마군과 마후 중, 그 누구도 지금의 자신과 같은 대군세를 이끌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일곱 기나 되는 흑귀도, 수만에 달하는 병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가지지 못했던, 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자신을 주인은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걸친 저 계집의 입을 통해, 그는 자신을 향한 주인의 불신(不信)을 읽을 수 있었다.
“속하가, 그리도 못 미더우셨나이까.”
마음속에만 머물러야 할 탄식이 마침내 소리가 되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순간.
콰아아아!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불의 기둥이 솟구쳤다.
혈검마군이 위치한 수십여 장 밖에서도, 아니 전장의 그 어디에서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그것은 맹렬하면서도 거대했다.
더불어, 그 무엇보다 무자비했다.
드드드드득!
거센 진동이 지면을 타고 전해진다.
그리고 굉음이 울려 퍼지기도 전, 불현듯 느껴지는 힘의 파동에 한발 앞서 고개를 돌린 혈검마군은 모든 것을 확인하고 담담하게 뇌까렸다.
다시 한번, 이곳에 없는 자신의 주인을 향해.
“당신께서 조금만 더 속하를 믿어 주셨다면, 이 전투는 이미 끝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마군……!”
“왜, 나는 이 정도의 투정도 부리지 못하느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한 혈검마군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무수한 아지랑이를 만들어 낸 끔찍한 열기 속을 섬광처럼 누비고 있는 두 인영을.
콰드득, 펑!
화왕(火王) 적천강.
그의 일권, 일장에 거무스름한 안개가 터져 나간다.
그 심대한 타격을 회복하기 위해 안개가 모여드는 찰나, 검푸른 강기가 온 사방을 베어 갈랐다.
서걱, 콰아아아!
네 기나 되는 흑귀들이 쉴 새 없이 비틀거린다.
사지가 잘려 나간 단면에서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어둠의 기운은 색이 다른 핏물과도 같았고, 그 모습은 영락없이 죽음을 앞둔 인간을 닮아 있었다.
아니, 혈검마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에게도 마침내 영원한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고오오옹.
불현듯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공간. 백색의 창날을 휘감으며 솟아오른 거대한 강기가 넘실거렸다.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그리고 혈검마군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 순간, 주인과 하나가 된 창이 한 줄기의 벼락이 되어 흑귀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솨아아악!
천격(天格).
반경 수십여 장을 물들이고 뒤흔든 그 아득한 섬광과 파괴력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네 마리의 흑귀도. 끊임없이 두 사승을 향해 덤벼들던 교도들도.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인에게 자신을 입증하고자 하는 어느 살귀(殺鬼)의 결심뿐이었다.
스릉.
날 선 소음이 혈검마군의 귓가를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