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6
#1035화
띠링. 띠링. 띠링.
맑은 종소리가 귓가를 울린 그 순간이었다.
행동에 따른 결과를 증명하는 시스템 알림과 함께, 몸속 깊은 곳에서 새로운 활력이 샘솟은 것은.
– [Lv.152 고광륭]을 처치하셨습니다!
– [Lv.150 적환양]을 처치하셨습니다!
– [Lv.155 풍소귀]를 처치하셨습니다!
– [Lv.160 황독소]를 처치하셨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하셨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의 효과로 모든 기력과 상태 이상, 그리고 일부 부상이 치유됩니다!
스아아아.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계곡물로 전신을 씻어 내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짧지만 치열했던 격전 끝에 쌓인 피로가 일거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했다.
후우.
그러나 이것은 네 마리나 되는 흑귀를 쓰러트린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이 아니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이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하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심신을 안정시키는 호흡일 뿐이다.
“노야.”
“그래.”
내 짧은 부름에 고개를 끄덕인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놈이 온다.”
그 순간.
처처처척.
죽여도 죽여도 도무지 줄어들지 않던 암천의 교도들이, 흑귀들의 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위를 좁혀 오던 그 광신도들이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엄중하면서도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길을 텄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길을.
저벅, 저벅.
“미안하군. 뜻하게 않게 늦어 버려서.”
멀리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걸음 소리와 담담한 목소리.
나는 그런 혈검마군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툭.
이제는 크고 작은 수십여 개의 파편이 되어 버린, 흑귀(黑鬼)라 불렸던 그것들을 걷어차면서.
“미안하면 자결하든지.”
“그건 곤란하겠군.”
“그럴 것 같더라. 여하튼 괜찮아. 당신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거든.”
“친구라, 거기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들을 말하는 거라면 상당한 착오가 있는 듯싶은데.”
“쓰레기?”
“모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지. 정마대전에서 제 분수도 모른 채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죽거나, 진정한 하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되레 칼을 들이댔으니.”
그 말을 듣자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흑귀, 즉 데스 나이트들이 생전에 어떤 존재들이었는지.
“마교(魔敎)의 거마들이었군. 당신과 한솥밥을 먹던.”
혈검마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그랬었지.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다.
세상에 탄생하게 된 모든 것에는 그에 맞는 원인이 있는 법.
이 정도 수준의 데스 나이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격을 지닌 ‘재료’가 필요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쩐지, 이름만 봐도 영 상놈 새끼들 같더라.”
“이름?”
“고광륭, 적환양, 풍소귀, 황독소…… 이게 정상적인 대가리로 나올 수 있는 이름은 아니지. 안 그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온 이름들에, 혈검마군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희한한 일이군. 그 이름들을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왜, 얘네 다 유명한 놈들 아니야?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괜히 개 같아지는 게, 어떤 인생들을 살아왔는지 빤히 보이는 것 같은데.”
“물론 한때는 중원에도 모르는 이가 없었네. 어디까지나 별호로는. 하지만…….”
나와 적천강을 번갈아 바라보던 혈검마군이 덧붙였다.
“무림인은 이름이 아닌 무공과 별호로 증명되는 법이니, 저들의 이름은 과거에도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지. 이건 설령 오랜 세월 동안 경륜을 쌓은 누군가가 곁에 있다 해도 알 수 없는 부분이야.”
혈검마군의 목소리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의 총본산이자 이제는 암천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한 신강은 아득한 과거부터 그래 왔던 곳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허락 없이는 발을 디딜 수 없는 멸지(滅地).
바로 그 은영각조차 길고 치밀한 준비 끝에 조금이나마 장막을 들춰 볼 수 있었던 사막 너머의 교국(敎國).
하지만 나는 다르다.
비록 극히 단편적이라고는 해도, 내게는 알려지지 않는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대상이 내 눈앞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내가 지닌 힘과 능력이 상대방과 그리 큰 격차가 없다면.
솨아아아악.
그 순간, 내 의지와 함께 보이지 않는 푸른 원이 빛살처럼 공간을 집어삼켰다.
어느덧 구성에 다다른 [기감]이 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 무려 반경 오십여 장에 달하는 공간을 푸르게 물들였다.
띠링. 띠리리링.
기감의 범위 안에 존재하는 수백, 아니 수천이 넘는 적들의 정수리 위로 떠오르는 무수한 시스템 창.
그러나 내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기감의 발현과 동시에 불현듯 걸음을 멈춘, 혈검마군에게.
[Lv.170 척방혈]놈의 머리 위를 장식한 레벨 창은 이십여 장 밖에서도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의문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그 얼굴 역시도.
“지금 도대체…….”
기감(氣感)이라는 단어는 비단 나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지에 오른 무림인들은 자신과 상대의 기운을 가늠하고 읽어 내는 것이 일상이니까.
그러나 시스템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기감은, 무림인들의 그것과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조금 전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삭막해진 말투.
하지만 나는 그런 혈검마군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 방혈이는 궁금한 게 참 많네. 아직 한창때라 그런가.”
“……!”
“아, 혹시 그 이름도 비밀이었나? 아니 마두라는 새끼들이 뭐 이렇게 감추는 게 많아?”
처음 산서성에서 만났을 당시, 내 기감을 경험해 본 적이 있던 적천강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받았다.
“네놈은 모르겠지만, 저거 은근히 기분 더럽다. 노부도 처음에는 해괴한 사술에 당한 줄 알았지.”
“그런데 저 새끼는 마두잖아요. 사술이면 오히려 익숙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내 합리적인 반박에, 굳은 얼굴을 한 혈검마군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적천강이 대답했다.
“부끄러운가 보지. 대충 들어봐도 그렇게 썩 괜찮은 이름은 아니지 않느냐. 명색이 사람 이름인데 방혈이가 뭐냐 방혈이. 방귀도 아니고.”
“에이, 아무리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어도 그렇지 무슨 그런 걸 가지고 그럽니까. 저 인간도 내일모레면 백 살쯤 될 텐데.”
“네놈도 나이 들어 봐라. 가끔 괜히 별 이유도 없이 기분이 묘해질 때가 있어. 혹시 아느냐? 저놈도 매일 밤 달빛 아래 앉아서 눈시울을 적실지.”
“오.”
엄청난 악명을 떨친 대마두가 늦게나마 갱년기에 접어들었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가설이었지만, 다음 순간 혈검마군이 불쑥 내뱉은 한 마디는 내 얼굴을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네 말이 옳다. 열화신룡 진태경.”
“뭐?”
“조금 전 그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사술이면 오히려 익숙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앞서 느꼈던 기감의 여운을 되새기려는 듯,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혈검마군이 말을 이었다.
“그렇군.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제법 익숙해.”
“……!”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다르지만 익숙하다.
이 짧은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음속 어디에선가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랐고, 이제야 비로소 납득 했다. 어찌하여 그분께서 너를 그토록 주시하셨는지.”
저벅. 저벅. 철벅.
메마르고 얼어붙은 땅을 지나, 혈검마군이 내뻗은 발걸음이 마침내 지면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를 밟았다.
투둑.
거칠어진 걸음을 따라 핏물이 튄다.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검신 위를 뒤덮는 거대한 기운은, 그보다 진하고 끈적거렸다.
“허나, 이번만큼은 그분의 판단이 틀렸다. 이 일은 처음부터 내가 직접 나섰어야 했어. 만류나 걱정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우우우웅.
그 순간, 나는 혈검마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변화를 느꼈다.
비단 바람이 멈추고, 공기가 몸을 떨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손아귀에서 거칠게 울어대는 검신이 막강한 강기를 토해 내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삐빅.
[Lv.175 척방혈]“……!”
바뀌었다.
놈이 발산하는 기운이, 레벨 창에 적힌 숫자가.
‘이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혈검마군은 단순히 반박귀진(返朴歸眞)의 경지로 본인의 힘을 숨겨 왔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 분명히 이 정도가 아니었을 텐데.’
이미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 한 차례 격돌해 본 적이 있다. 나도, 적천강도, 그리고 혈검마군도 전력으로 맞부딪혔고 그 결과는 틀림없이 놈의 열세였다.
그런데 어째서.
삐빅.
[Lv.178 척방혈]도대체 어떻게.
삐빅.
[Lv.180 척방혈]놈은, 혈검마군은 우리를 향해 서서히 가까워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대관절…… 무슨 사술을 부리는 것이냐.”
제자가 느끼는 것을 스승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그리고 적천강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당연한 의문이, 어느덧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내 마음속 불안감의 실체에 빛을 밝혔다.
‘사술(邪術).’
글자에 담긴 뜻 그대로 요사스럽고, 간사한 술법.
이와 같은 사술을 부리는 이는 옳고 곧은 길을 벗어난 자들, 즉 사마외도(邪魔外道)라 칭해지고,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심연에 위치한 존재들을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마도(魔道).
인간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마귀의 길을 택한 자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함으로 가득한 그들이 펼치는 사술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흑귀라 불리는 저 존재들은 어떻게 탄생하여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는가.
“……아닙니다.”
“뭐라?”
“사술이, 아닙니다.”
불현 듯 입술을 뗀 나는,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계속해서 되묻는 적천강의 목소리는 어느덧 메아리처럼 멀게 들려왔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뻗을 때마다 더욱더 강해지는 혈검마군의 존재도 잠시나마 잊어버렸다.
나는 그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마음이 되어 바라보았다.
지금껏 혈검마군의 존재감으로 가려져 있었던,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이 광활한 전장의 극히 작은 일부로 존재했던 백의인들을.
아니, 흑귀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그들을.
“마법(魔法).”
그리고 더없이 익숙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그 두 글자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그 순간.
“풍귀(風鬼)의 힘이여.”
저 멀리, 또렷하게 울려 퍼지는 영창과 함께.
“그에게 깃들라.”
의지를 담은 주문이, 혈검마군의 몸으로 발현(發現)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