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9
#1038화
아마도 한계 이상으로 끌어 올린 중단전의 이능(異能) 때문일 것이다.
저벅.
죽은 것과 산 것.
그 모든 것이 증발하고 오직 붉게 물든 혈로(血路)에 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던 극심한 두통이 엄습해 오는 것은.
‘흡.’
마치 길고 예리한 바늘이 머릿속을 들쑤시는 듯한 격통.
그러나 나는 온 힘을 다해 신음을 참고 파르르 떨리는 신형을 애써 억제했다.
이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맹수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그 즉시 잡아먹히고 말 테니까.
“그래, 왔느냐?”
혈검마군(血劍魔君).
태연하기 그지없는 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두통이 배가 되어 부풀어 오른다.
아니, 어쩌면 진짜 이유는 어느덧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적천강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Lv.??? 척방혈]이제는 현재의 내 수준으로도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진정한 괴물로 거듭난 혈검마군의 강함을 확인했기 때문일지도.
‘최소 20레벨 차이……. 더 힘든 싸움이 되겠군.’
마음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 백염이 쏜살같이 되돌아와 손아귀에 잡혔다.
내심 경계하고 있던 나 스스로가 무색해질 만큼, 아무런 방해조차 없이.
“이기어검. 아니, 이기어창(以氣馭槍)이라고 해야 하나?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이렇게까지 무리할 정도라면.”
여유로운 태도와 음성.
한 수 위의 강자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으로, 혈검마군은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그래도 칭찬해 주지. 좋은 시도였어. 최소한 스승이 죽기 전에는 돌아왔으니.”
그리고 혈검마군이 웃으며 슬쩍 손을 흔든 그 순간, 빈틈을 발견한 적천강이 벼락처럼 손을 뻗었다.
“놈!”
콰아아아!
대갈일성과 함께 뻗어 나가는 열기.
그러나 모든 것을 불사르며 나아가는 화염신장(火焰神掌)의 장력이 면전까지 들이닥친 그 순간에도 혈검마군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여전했다.
다만 유일하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느새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줄기의 핏빛 검강(劍罡)이었다.
슈확! 꽈아아앙!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장력이 좌우로 튕겨 나가 지면을 후려친다.
반경 십여 장을 집어삼킨 굉음과 매캐한 연기 속, 마치 유령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혈검마군이 검을 내리그었다.
쏴아아악!
끔찍하리만치 막강한 압력에 의해 일그러지는 공간.
하지만 태산도 베어 낼 듯한 그 검격을, 적천강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서걱!
마치 두부처럼 갈라지는 지면.
그 치명적인 위력이 담긴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적천강은 곧바로 몸의 중심을 바로 세웠지만, 흐릿해진 혈검마군의 신형은 이미 그의 측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위험……!’
나조차도 뒤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속도.
소리 내어 외칠 틈조차도 없었다.
불과 호흡 한번 내뱉을 정도로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초인은 섬광처럼 공방을 주고받았고, 혈검마군의 움직임은 소리조차 앞질러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후우웅, 퍼엉!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간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너무나도 좁혀진 거리.
혈검마군이 뻗은 일장에 어깨를 격중당한 적천강의 신형이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는.
쐐애애액, 턱!
온 힘을 다하여 적천강을 돕기 위해 달려가던 내가 있었다.
“노야!”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다급한 외침.
빠르게 튕겨 나가던 와중, 내 도움으로 간신히 멈출 수 있게 된 적천강이 쇳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노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목소리나 줄여라. 귀청 떨어지겠구먼.”
다른 사람이라면 별다른 차이를 못 느낄 만큼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화왕 적천강에 대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아니었다.
그는 위험할수록 태연을 가장한다.
다른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또 이러시네. 약 드실 시간입니다.”
한숨을 내쉰 나는 적천강의 등에 손을 대고 망설임 없이 공력을 흘려보냈다.
툭. 스아아아.
본디 불과 불은 한 몸이라.
한 뿌리에서 비롯된 열양지기는 그렇게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이어졌고, 몸 안 깊숙이 고여 있던 노폐물들을 몰아냈다.
“쿨럭.”
투두둑.
주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입술 사이로 울컥 흘러넘치는 한 움큼의 핏물.
적지 않은 내상을 의미하듯, 시커멓게 물든 그것을 확인한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퉤, 하고 피가래를 뱉은 적천강이 대꾸했다.
“그깟 피 한 모금 뱉었다고 수선은.”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넘어가고 싶지만, 사실 여부 확인이라는 절차는 아주 중요하다.
목숨이 걸려 있다면 더더욱.
뻐억!
조금 전의 일격으로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 후방에 남아 있던 적의 병력은 상당수.
그새를 못 참고 달려들던 적의 가슴을 걷어차 함몰시키며, 나는 적천강에게 물었다.
“이미 전신이 피범벅이신 건 아시고 하신 말씀이죠?”
“노부가 흘린 거 아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어쩌다가 묻은 거지.”
“저쪽은 아주 멀쩡한데요.”
갈라지는 인의 파도 속,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다가오는 혈검마군을 가리키자 적천강이 작게 입맛을 다셨다.
“덜 바빴나 보지.”
“아하. 덜 바빴다. 그렇군요.”
“여하튼 노부는 멀쩡하다. 생채기 하나 없……진 않지만,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어.”
퍼엉!
신형을 일으켜 세우는 동시에 세 명의 적을 숯덩이로 만들어 버린 적천강이 입가에 묻은 핏물을 핥았다.
“어떠냐.”
“그냥 솔직히 말씀하십쇼.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이런 천인공노할 놈 보게. 지금 노부가 허풍이라도 떨고 있다는 말이냐?”
“아닙니까?”
“아니다. 저깟 놈이 뭐라고.”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응?”
“저깟 놈은 혼자서도 충분하실 거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죽을 맛이에요.”
덥석.
슬쩍 몸을 돌리기 무섭게 번개처럼 내 손목을 잡아챈 적천강이 준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 현인들께서 말씀하시길,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마다 놀라울 정도로 강해지고, 빨라지더군. 귀신에 홀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
“그뿐만인 줄 아느냐? 노부가 전력을 다해 공격을 격중시키려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힘이 막, 막…….”
“노야.”
장황하게 이어지려는 말을 끊어 낸 내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혓바닥이 너무 기십니다.”
“…….”
“한 줄 요약하시죠. 간단명료하게.”
잠시 침묵하던 적천강이 대답했다.
내가 앞서 요청했던 대로, 아주 간단명료하게.
“저 새끼 존나 쎄.”
“완벽한 표현이네요.”
“그리고 저 멀리 뒤에 있는 새하얀 것들이 괴이하기 짝이 없는 사술(邪術)로 놈을 돕고 있다. 한 번씩 특유의 이상한 기운이 요동칠 때마다 놈이 강해지더군. 하여 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무리해서라도 저놈들부터 처리하려 했지만…….”
“실패하셨겠죠. 노야 역시 그 사술에 당해서.”
“그래, 맞다. 그때 노부가 느낀 감각은 마치…….”
“하늘이 짓누르는 것 같았고요.”
중력 마법이다. 틀림없는.
그리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정확한 표현에 문득 멍해진 적천강을 향해, 나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건 일반적인 사술이 아닙니다. 마법이라고 부르는 능력이죠.”
“잠깐, 마법이라면.”
“예. 노야께서도 아시는 바로 그 마법입니다. 제 고향에서나 볼 수 있었던.”
“……!”
그 순간, 적천강이 눈을 부릅뜬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비록 세세한 것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는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곳이 어떤 세상인지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적천강조차 지금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건 나 자신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다만 이러한 사실들보다도 중요한 것은, 눈앞의 적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점이다.
– 놈들을 먼저 노려야 합니다. 혈검마군이 아니라 저 새하얀 옷을 입은 자들……. 아니, 마법사들을요.
전음을 흘려보내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낯설었다.
마법사. 마법사라니.
그것도 현대가 아닌 바로 이곳, 무림에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산보하듯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오는 혈검마군의 어깨 넘어, 언덕 위에서 백색 옷자락을 휘날리는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들부터 제거해야 한다.’
마법사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지했을 때부터 그 외의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 이 전장에 선, 혹은 쓰러지고 있는 수만 명의 아군 중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다.
마법이라는 단어에 어느 정도의 변수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또한 그 놀라운 이능을 허락받은 마법사들이 이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게다가…….
‘저들 중 유독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 그것도 나와 노야를 마법으로 저지할 정도의 실력을 지닌.’
작동 원리가 다를 뿐, 결국 마법 역시도 기(氣)라는 원료를 바탕으로 발현되는 것.
그렇기에 나나 적천강에게 있어, 제법 높은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 해도 별다른 위협이 되지는 못한다.
진리의 끝자락에 다다랐다고 표현되는 극소수의 존재들을 제외한다면.
“……대마도사(大魔道士).”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네 글자.
그리고 대마도사의 존재를 확신하려던 그 순간, 불현듯 뇌리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
‘정말 놈들 중에 대마도사가 있다면, 어떻게 지금 같은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유리하다는 뜻이 아니다.
비록 나를 포함한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해도, 현재로서는 아군에게 있어 전황이 어렵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도사가 나섰다면, 이 불리한 전황을 유지하고 있는 것조차도 어려웠겠지.’
대마도사가 전장에 끼치는 영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길게 생각해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천하의 그 누구도 본 적 없던 광범위 공격 마법.
의지를 지닌 자연재해와도 같은 불가해(不可解)의 능력 앞에서, 삼분지 일 이상이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아군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그러나 예의 대마도사는 나서지 않았다.
중력 마법으로 나와 적천강을 일시적으로 방해하고, 신체 강화 마법으로 혈검마군을 도왔을지언정 그 이상은 개입하지 않고 있었다.
철벅.
피로 붉게 물든 길을 가로지른 혈검마군의 발걸음이, 마침내 우뚝 멈춰선 지금 이 순간에도.
“도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지?”
진심으로 궁금했고, 동시에 불안했다.
마법사들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유가 단번에 이 전투를 끝낼 강력한 마법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가 참지 못하고 불쑥 던진 물음에, 삼 장 밖에서 웃는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던 혈검마군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노린다니? 내가 이 전투에서 노리는 건 처음부터 두 가지뿐이었어. 승리. 그리고 자네.”
“대답해 주기 싫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뜬금없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뭐, 상관없지.”
진심인지, 연기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 혈검마군이 느슨하게 늘어트렸던 검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끝을 보지. 물론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사로잡히는 결말이 좋겠어.”
나와 적천강이 동시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좆 까.”
그리고 그 순간.
파팟!
우리는 혈검마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적천강만이 놈을 향해 쏘아졌다.
– 반 각. 반 각만 놈을 붙잡아 주십시오.
바람 사이로 흘려보낸 전음과 함께, 신형을 비튼 나는 언덕을 향해 쇄도했다.
쐐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