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40
#1039화
그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툭, 쐐애애액!
거침없이 정면을 향해 쏘아지던 진태경의 신형이, 미세한 발끝의 뒤틀림을 따라 흘러가듯 옆으로 미끄러진다.
마치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만을 노린 듯한 움직임.
그리고 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 앞에서, 혈검마군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예상치 못했던 변수다.
아니, 비단 혈검마군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미 상대와의 격차가 어느 정도 명확하게 드러난 위험한 상황에서, 부상을 입은 스승을 두고 떠날 제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혈검마군이 이토록 당황할 수밖에 없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놈이…… 술사(術士)들을 노리고 있다!’
틀림없었다.
혈검마군의 측면으로 방향을 틀어 재차 쏘아지는 진태경의 신형.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나아가는 그의 발끝이 향하는 곳에는, 높은 언덕 아래에서 전장을 굽어보고 있는 이십여 명의 백의인들이 있었다.
‘도대체 놈이 왜, 아니 어떻게?’
찰나의 순간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하게 얽히는 머릿속.
그러나 이미 허를 찔린 이상 망설이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혈검마군은 그 모든 의문을 뒤로한 채, 온 힘을 다해 신형을 비틀며 손을 내뻗었다.
슈화악!
가공할만한 속도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일검(一劍).
느려진 시간 속, 검신을 휘감은 핏빛 강기가 진태경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아니, 쏘아지려던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불현듯 들이닥친 그 끔찍한 열기에, 혈검마군은 흐트러진 평정심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한 사람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화왕(火王) 적천강을.
‘이런 개 같은……!’
미처 소리 내어 외칠 틈조차 없었다. 대경한 혈검마군은 가까스로 검의 방향을 틀어 코앞까지 들이닥친 화염을 가로막았다.
콰아아앙! 드드득!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집히는 땅거죽.
매캐한 검은 연기와 더불어 피어오른 수증기가 사방을 뒤덮은 가운데, 눈부시도록 새하얀 광염(光焰)을 토해 내는 주먹이 혈검마군의 망막에 비쳤다.
콰드득.
핏빛 강기에 휩싸인 자신의 검을 조금씩 밀어 내는, 그 거대한 기운의 주인도.
“감히 한눈을 팔다니.”
가까스로 멸염신권(滅炎神拳)을 가로막은 채 부르르 떨리는 검신 너머, 흐릿하게 웃고 있는 적천강을 바라보는 혈검마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이미 늦었다.
찰나의 당황과 방심이 부른 실수였고, 그 결과로 진태경을 놓쳐 버렸으니.
“기운도 좋으시구려. 연배가 연배이니 이제 관에 들어가서 쉬셔도 될 터인데.”
“원래대로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어느 날 저 구름 위 어딘가에 있을 높은 누군가가 그러더군.”
화아아악.
앞서 입은 내상이 무색할 만큼, 더욱더 맹렬하게 일어나는 화염 속에서 적천강이 뜨거운 숨결을 토해 냈다.
“아주 천둥벌거숭이지만 대단한 핏덩이 하나를 제자로 내려 줄 터이니, 녀석이 어른 구실 할 때까지 다른 놈들 관짝이나 짜 주라고.”
“……!”
“한데, 노부에게 관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싹 다 불살라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렇지 않으냐?”
지금 이 순간에도 혈검마군이 쥔 검이 서서히 밀리고 있는 이유는, 비단 적천강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세(氣勢)였다.
화왕이라는 두 글자에 담긴 역사. 한 세기를 넘게 살아온 늙은 거인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무게.
그리고…….
“노부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설령 백번을 죽었다 깨어난다 하여도 네놈은 모를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만이 보일 수 있는 기개(氣槪).
“그러니, 이번에 죽거든 두 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거라”
지옥 불처럼 시퍼런 귀화(鬼火)가 일렁이는 한 쌍의 눈동자.
그런 적천강에게 순간 압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혈검마군은 이를 악물었다.
“이 빌어먹을 노괴가 감히……!”
확연하게 뒤바뀐 호칭과 거칠어진 말투.
그러나 그런 혈검마군의 모습에도 적천강은 오히려 더욱 기껍게 웃어 보였다.
이는 곧 상대의 여유와 평정심이 허물어졌다는 증거였으니.
“훨씬 듣기 좋군. 네깟놈한테 계속 선배 소리 들을 바에야 칼 물고 뒈지는 게 낫지.”
“그 입 닥쳐!”
콰드득!
천천히 기울어지던 힘의 저울추가 단번에 뒤집힌다.
마법사, 아니 혈검마군이 술사라 부르는 그들에게서 부여받은 가공할 힘이 검신에 실리자 태산과도 같은 중압감이 적천강을 짓눌렀다.
‘흡.’
헛숨을 삼킨 적천강의 이마 위로 도드라지는 힘줄.
그러나 그는 지면 깊숙이 파고드는 발끝을 느꼈음에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 없었다.
‘뭐? 고작 반 각만 버텨 달라고?’
혈검마군의 어깨너머, 하늘 같은 스승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채 멀어져 가는 어느 고얀 놈의 뒷모습을 본 적천강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노부를 힘없는 늙은이 취급하다니. 이런 건방진 녀석을 보았나.’
물론 현재의 상황이 혈검마군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적천강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미 앞서 흑귀들과 싸우며 상당량의 공력을 소진했고, 혈검마군은 지치긴커녕 과거 남천마후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한 힘을 얻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보여 주마. 노부가 어찌하여 화왕(火王)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장장 일백 년하고도 스무 해.
그 기나긴 세월이 온통 투쟁이었다.
적과 싸우고, 온갖 심마와 싸우고, 심지어는 적천강 그 자신과도 싸워야 했다.
한때는 극심한 외로움에 사무쳤으나, 이제는 아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 주는 이가 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네가 원한다면, 반 각이 아니라 반년도 버텨 주마.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마.’
그렇기에, 화왕 적천강은 꺾이지 않는다.
꺾일 수 없었다.
화륵, 드드드득!
맹렬하게 타오르는 광염이 거대한 핏빛 강기에 부딪혀 흔들린다.
그러나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칠게 밀려드는 거력(巨力)조차도, 적천강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 오너라.”
콰아아앙!
끊임없이 충돌하고 뒤섞이며, 이내 온 사방을 떨어 울리는 희고 붉은 두 줄기의 기운.
이 모든 것은 저 멀리,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적진을 돌파하는 누군가의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 * *
어느 순간부터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굉음을, 그 거대한 힘의 여파를 나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노야.’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
반 각.
차 한잔도 여유롭게 마시지 못할 만큼 짧은 시간.
반면 섬광과도 같은 일격을 주고받는 초인들 간의 싸움에서, 반 각이란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고개를 돌려 적천강의 상태를 확인하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를 죽이면, 혈검마군에게 부여된 마법도 풀린다.’
그것이 내가 적천강을 뒤로한 채 방향을 틀었던 이유 중 하나다.
마법이 유지되는 이상 혈검마군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계속해서 더욱 강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놈이 저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인 마법이 도중에 끊어진다면, 충분히 전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물론, 예상했다시피 상황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쉬쉬쉬쉭!
쉼 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파공성과 아슬아슬하게 전신을 스쳐 지나가는 섬광.
도, 검, 창,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낯선 형태의 병장기들.
그것들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로는 모두 나 한 사람을 노리고 휘둘려진 무기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 수많은 날붙이 위로 형형하게 빛나는 빛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절정 고수……!’
비단 몇몇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적들의 숫자는 불과 일백 남짓이었으나, 놈들 전부가 검기상인(劒氣傷人)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독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는 한 존재가 있었다.
[Lv.170 소군악]전신을 칠흑과도 같은 검은 갑주로 빈틈없이 감싼 거한(巨漢).
당연하게도 나는 저자의 별호를 모른다. 설령 과거의 그를 알고 있었다 해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눈앞의 적은, 이미 과거의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니까.
‘흑귀(黑鬼).’
불현듯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진 이유는, 비단 까다로운 장애물이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지막 흑귀가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믿고 싶지 않았던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후웅!
다음 순간 들이닥친 묵직한 파공성이 현실을 일깨운다. 마음과는 달리 깃털처럼 가벼운 발끝을 느끼며, 나는 신형을 내쏘았다.
쉭! 콰아앙!
목표를 잃고 지면을 가른 대도(大刀)에 의해 높게 솟구치는 땅거죽.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비산하는 얼음과 흙 알갱이 사이로, 나는 힘차게 백염의 창날을 뻗었다.
서걱!
섬광 같은 궤적을 따라 베어져 나가는 목덜미의 살갗.
그러나 창대를 타고 손끝까지 전달된 특유의 감촉은, 지금의 공격이 상대의 숨통을 끊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피해?’
멍청하게 방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당장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
그렇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고, 창날의 궤적과 타이밍 모두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벽하게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마법이라는 이능이 지닌 광범위한 변수였다.
[Lv.173 소군악]3레벨.
누군가에게는 작게 느껴질 수도 있는 미묘한 수치였지만, 초인들의 영역에서는 달랐다.
후웅, 꽈아앙!
조금 전보다도 빠르고, 강해진 일격.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빨라지고 강해지는 일격.
[Lv.175 소군악]쐐애애액!
무겁기만 하던 파공성이 날카롭게 변화한다. 거대하고 뭉툭한 도신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며 공간을 난도질했다.
콰과과과광!
엄청난 파괴력에 움푹 꺼지는 지면. 그 여파를 피해 물러나는 내 귓가로 십여 줄기의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걱! 피핏!
전신 곳곳에서 샘솟는 붉은 핏물.
위기를 느끼자마자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아니, 정확히는 놈들이 빨랐다.
‘강해졌다. 조금 전보다.’
똑똑히 보았다.
마지막 순간, 돌연 속도와 힘이 더해져 섬광처럼 뻗어 나오던 날붙이들을.
동시에 느꼈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흑귀와 일백여 명의 절정 고수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어깨 너머, 언덕 위에서 쏟아져 내린 선명한 기운의 파동을.
‘어떻게든 막아내겠다는 거겠지. 지금보다 더 거리가 좁혀지기 전에.’
지금 이 순간, 위기를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그랗게 원형을 갖춘 채 서 있는 스무 명의 백의인, 아니 마법사들.
놈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는 달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두가 갖고 있다.
나도, 저들도.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의지와 간절함의 크기다.
‘인벤토리 오픈.’
나는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온 힘을 다해 신형을 뻗었다.
더욱 강해진 일백여 명의 절정 고수들을 향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마지막 흑귀를 향해.
파팟!
단 한 걸음.
모든 거리가 지워지고 시간이 느려졌다.
그와 동시에 수십여 개의 빛줄기가 파괴적인 섬광을 뿜어내며 사방을 물들이고,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욱 거대한 한 줄기의 벼락이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슈화아악!
그래. 나 역시 알고 있다.
일 대 다수. 지금 이 순간 드러난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는 것을.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가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넘으려는 자와 막아서는 자.
지키기 위해 싸우는 자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자.
저들에게는 의지가 없고, 간절함은 망각했으며, 사명이란 단어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알기에, 목숨을 걸고 나아갈 수 있다.
빗발치는 공격들을 향해 몸을 날리며, 영혼까지 다한 일격을 뻗어낼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슈확!
공간을 가르며 나아가는 백염의 창날.
그와 동시에, 나는 남겨 두었던 명령어를 속삭였다.
‘화룡갑, 소환.’
띠링.
콰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