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43
#1042화
고오옹.
대마도사를 중심으로 솟아오른 그 거대한 기운을 느낀 순간, 새하얗게 물든 진태경의 뇌리에 총알처럼 틀어박히는 두 개의 단어가 있었다.
첫 번째는 광범위 마법.
그리고…….
‘일섬(一殲).’
진태경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눈앞의 여인이 벌이려는 이 미친 짓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미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이번에는 회생(回生)의 가능성조차 희박한 필사의 일격이 아니라면 이 광범위 마법의 발동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와 동시에 이미 결정을 내린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내심 씁쓸하게 웃었다.
‘빌어먹을.’
아직 죽기 싫었다.
어떻게든, 추하게 발버둥 쳐서라도 써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아니, 오직 단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지금 당장 대마도사를 둘러싼 강력한 방어막을 부수고, 그 일격으로 상대의 목숨을 앗아 가기 위해서는 진태경 자신의 생명 또한 불태워야 했다.
이 일격이 성공할 거라는 확신?
없다.
다만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생존과 죽음?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직 이것만이 아직 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아군 수만 명과, 그 안에 포함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였으니까.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숭고한 희생, 개죽음.
둘 중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모르나, 혼란스러운 시대는 지금 이 순간 진태경에게 영웅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었고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스아아아.
일순간 바람이 멎는다. 대기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간 속, 수백 개의 혈도가 깨어나고 전신의 근육이 한 가닥, 한 가닥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새하얀 창날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기(氣)가 있었다.
깊은 바닷속처럼 어둡고, 벼락처럼 번뜩이며, 불꽃처럼 타오르는.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그 어느 때보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기운이, 그렇기에 주인의 생명마저 집어삼켜 버릴 강대한 힘이 활시위처럼 젖힌 창날을 따라 휘몰아쳤다.
지금 이 순간, 촘촘한 면사 뒤에 가려진 한 쌍의 눈동자를 물들일 만큼 휘황한 빛을 토해 내며.
‘이건.’
방어막으로도 완전히 가릴 수 없는 그 파괴적인 섬광 앞에서, 대마도사는 불현듯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믿을 수 없는 선택을 한, 눈앞의 청년에 대한 경외심도 함께.
‘이대로라면 죽는다. 틀림없이.’
대마도사는 확신했다.
저 무시무시한 일격이 완성되어 쏘아지면, 자신은 방어막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그와 더불어 진태경의 생명 역시 잿더미처럼 흩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대마도사도, 그녀가 섬기는 주인도 바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운이 좋네. 당신도, 나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담은 전낭은 찢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무게가 온전히 실리기도 전에 매듭을 묶는다면, 전낭은 찢어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대마도사의 마법은 이미 지금보다 한발 앞서 준비되어 있었고, 진태경의 일격은 그보다 한발 늦었으니.
그리고 시간상으로는 찰나에 불과한 그 미세한 차이가, 두 사람 모두의 운명을 바꾸었다.
‘쏟아져라, 지옥의 불길이여.’
화아악!
일순간 대마도사를 중심으로 폭발하는 강대한 기운.
그 힘의 확산은 진태경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시작되었고,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슈확!
공간을 찢어 발기며 나아가는 창날.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그렇기에 아직 절반도 채 응집되지 못한 일섬이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방어막과 맞닿은 그 순간.
고오오옹.
귓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동시에, 새하얀 섬광이 언덕을 물들였다.
* * *
전신 곳곳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통증 속, 노도사는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단내가 풀풀 풍기는 숨결이 느릿하게 흩어진다.
이마의 상흔에서 흘러내린 핏방울로 붉게 물들어 버린 시야 너머, 철탑처럼 우뚝 선 두 명의 사내가 노도사의 눈동자에 비쳤다.
아니, 비쳤다고 느낀 순간 사라졌다.
쉭.
소름이 끼칠 만큼 미세한 파공성이 귓가를 파고든다.
머릿속에서 울린 경종이 위험을 경고하고, 그와 동시에 판단을 끝마친 두뇌는 몸뚱어리에 명령을 내렸다.
피하라고.
지금 당장 적을 피해 움직여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노도사의 육신은, 결코 평소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서걱!
극심한 격통.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한 두 개의 날붙이가 옆구리와 어깻죽지를 베어 가르고, 강철에 담겨 있던 거대한 기운이 몸속 깊은 곳까지 헤집었다.
‘흡……!’
순간 아득해지는 시야.
그러나 풍운검군은 이내 비틀거리는 신형을 다잡으며 자신의 애검을 흩뿌렸다. 이제는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검신 위로 휘황한 검강이 솟아올랐다.
쾅! 쾅! 콰앙!
번개처럼 이루어진 세 번의 격돌. 그리고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뚫고 포탄처럼 튕겨 나간 한 사람의 신형.
“장문인!”
암천의 교도들과 뒤섞여 싸우던 종남파의 제자들이 비명을 내지른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두 개의 인영이 세차게 튕겨져 나가던 풍운검군의 신형을 받아 낸 것은.
드드득!
일장을 밀려나고서야 겨우 멈추는 발걸음.
쿨럭, 죽은 핏물을 토해 낸 풍운검군이 흐릿하게 보이는 조력자들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사형들…….”
“제기랄, 아무 말도 말거라.”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꾸한 대사형 노호검객에 이어, 둘째 사형인 태을무정검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됐네. 장문 사제.”
이만하면 됐다.
비록 짧은 한마디였지만, 풍운검군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되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시간이 없네. 이 상황이 더 지체될수록 본문의 피해만 커질 걸세.”
“사형!”
경악이 담긴 외침.
그러나 그런 사제의 모습에 태을무정검은 입술을 굳게 닫았고, 노호검객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오는 두 흑귀(黑鬼)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둘째의 말이 맞다. 퇴로(退路)는 이미 우리가 확보했으니 네놈은 명령을 내리거라! 어서!”
되려 윽박지르는 듯한 태도.
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 속에서, 풍운검군은 자신의 두 사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심……이십니까?”
그러나 그 물음에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크게 뜨여진 사제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 채, 두려움이 담긴 눈빛으로 정면의 흑귀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들의 주장이, 얼마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형들의 그러한 모습에, 풍운검군은 마침내 이 믿기 힘든 현실을 인지했다.
“……진심이었군요. 두 분 모두.”
이 상황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일평생 함께하며 한 스승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사형들인데, 마치 난생처음 보는 듯한 낯선 감각이 그들에게서 느껴졌다.
‘퇴각. 퇴각이라.’
텅 비어 버린 마음속으로 그 두 글자를 뇌까리던 풍운검군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종남파에 처음 입문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을.
이제는 먼지로 뒤덮인 오랜 과거 속에서도 세 사형제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래서 좋았다.
도사보다는 무림인에 가깝고, 간혹 과격한 언동으로 문제를 일으키긴 했어도 사형들이었으니까.
그가 종남파의 장문인으로 임명된 그 날, 자신들이 선택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하긴 했어도 결국은 인정하고 따라 주었으니까.
정마대전을 치르던 와중 남만야수궁과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지금으로부터 불과 일 년 전, 본인들의 과오로 적천강과 진태경에게 차례대로 수모를 당했을 때도.
풍운검군은 그들을 감싸 주었다. 사형들을 비난하는 이들을 막아 세우고 변호했다.
두 사형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놀라운 속도로 내상을 회복했을 때도, 가장 기뻐했던 것 역시 그였다.
하지만…….
“어찌하여 이리되셨소.”
풍운검군은 나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형의 부축을 뿌리치며, 이제는 검자루밖에 남지 않은 애검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기억하시오? 스승님께서 이 검을 내려 주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지. 도사가 되려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바르게 살거라.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킨다면, 그것이 도사다.”
“……!”
“……!”
“그토록 살고 싶다면, 사형들은 가시오. 나는 남을 테니. 그것이 스승님께 물려받은 대종남파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길이니.”
풍운검군도,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도.
그리고 이 전장의 모두가 안다.
지금 시점에서 전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종남파가 물러나면, 이 전투는 필패(必敗)라는 것을.
그렇기에 풍운검군은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만큼은.
으득.
혀를 깨물자 아릿한 통증과 함께 선명해지는 시야.
풍운검군은 검은 연기를 뭉클뭉클 쏟아내며 다가오는 두 흑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철벅.
발걸음도, 마음도 무겁다.
어쩌면, 그 자신 역시도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풍운검군은 멈추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스승이 가르쳐 주었던, 인간으로서의 도리였기에.
‘돌이켜 보면, 나 또한 그리 훌륭한 도사는 못 되었지.’
늘 앞서가는 화산파를 질시했고, 종남파의 이익만을 추구했다.
권력과 결탁하여 오가는 재물로 세력을 불리고, 품성보다는 재능으로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종남파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정의(情義)라는 두 글자를 잊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많은 아군이 있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 누구보다 큰 위기와 맞서는 청년이 있다.
부끄러움.
그것이 그가 물러설 수 없는 이유였다.
“오너라. 아니, 이번에는 내가 가도록 하마.”
풍운검군은 피가래가 들끓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괴물을 바라보며, 더는 검이라 부를 수 없는 형태가 된 애검에 남아 있던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츠츠츠츠!
휘황한 검강(劒罡)이 타올랐다.
종남파의 장문인으로서 보일 수 있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피워올릴 수 있는 마지막 불꽃이.
“대종남파를 위하여.”
작게 중얼거린 그 순간, 풍운검군은 온 힘을 다해 신형을 내뻗었다.
“안 돼!”
“장문 사제!”
그리고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사형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한 마리의 부나방처럼 날아드는 풍운검군을 기다리고 있던 두 줄기의 섬광이 있었다.
쉭! 쐐애애액!
바람을 부수는 거대한 대부(大斧)와 공간을 베어 가르는 새하얀 검신.
그 파괴적인 힘의 물결을 향해 달려들던 풍운검군은 담담히 직감했다.
끝이라고.
어느 때보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이 일격으로도, 저들의 숨통을 끊어 놓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 스스로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인 풍운검군조차, 아니 전장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변(異變)이 일어났다.
후웅, 꽈아아아앙!
저 멀리서 들이닥친 아득한 섬광이, 지금껏 거대한 충격파가 일대를 후려쳤다.
폭발. 재앙.
도무지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몰랐으나, 한 가지만큼은 명확했다.
드드드득!
이 예상치 못한 충격파에 지면에 서 있던 두 흑귀의 자세가 흐트러졌고, 이미 허공을 밟으며 쏘아지던 풍운검군의 일격은 섬광을 비집고 나아갔다는 것.
서걱!
휘황한 빛으로 이루어진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이 공간을 가른 그 순간.
스아아아아.
바람처럼 두 흑귀를 스쳐 지나간 풍운검군은, 아니 전장의 모두는 본능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다.
화륵.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화염의 구(球)를.
지옥에서 끄집어 올린 겁화, 헬 파이어(Hell Fire)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