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45
#1044화
노호검객(怒號劍客) 송일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당장이라도 이 가망 없는 전장을 벗어나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어찌하여 온 힘을 다해 검을 흩뿌리고 있는지.
쐐애애액!
검신을 타고 줄기줄기 쏟아진 강기(罡氣)가 맹렬하게 공간을 가르며 쏘아진다.
앞도, 뒤도 아닌 허공을 향한 그 휘황한 섬광이 이십여 장의 거리를 격하고 거대한 불덩어리와 맞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흔들리는 불의 구.
하지만 주춤하는 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계속해서 낙하해 오는 재앙을 바라보는 노호검객의 눈동자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틀렸다. 막을 수 없어.’
이미 몇 차례나 전력을 다했기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록 초인이라 불리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는 그였으나, 귀신의 조화나 다름없는 저 거대한 불덩어리를 완전히 막아 내기에는 그 힘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게 도대체…….’
숨이 막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전장의 일부를 뒤덮어 오는 불의 구가 뿜어내는 끔찍한 열기에.
일평생 몇 번 느껴 보지 못했던, 전신을 옥죄는 무력감에.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팟, 쉬쉬쉬쉭!
노호검객은 느꼈고, 동시에 보았다.
자신의 곁으로 홀연히 다가온 누군가의 인기척과 함께, 힘차게 흩뿌려지는 섬광을.
화아악!
‘이건.’
노호검객의 눈이 크게 뜨였다.
휘황한 빛이 번진다. 이십여 장이나 되는 거리에서도 피부를 달구던 열기가 일순간 사라진다.
휘황한 빛을 뿜어내며 나아가는 수십여 줄기의 강기는 그물처럼 촘촘했고,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낯익었다.
“사제!”
콰아아앙!
노호검객이 반사적으로 토해 낸 외침과 또 한 번의 굉음이 뒤섞인 그때, 격돌의 여파로 쏟아지는 불덩어리의 파편 아래로 익숙한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세 다시 뵙는구려, 대사형.”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차갑다고 느낄 정도의 표정과 목소리.
세상에 보여지는 그 모습 그대로 태을무정검(太乙無情劍)이라는 별호를 지닌 사제의 모습에, 노호검객은 신음하듯 뇌까렸다.
“네가 어찌 이곳에……!”
반가움보다는 의문이, 그리고 얼핏 걱정과 분노마저 내비치는 사형의 모습에 태을무정검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왜, 이 황보엄이 설마 그리 순순히 말을 따를 줄 알았소?”
“네 이놈! 그게 무슨 망발이냐! 도대체 장문 사제와 다른 제자들은 어찌하고!”
노호검객은 그 별호처럼 불같은 고함을 토해 냈다.
과도한 피로와 부상에 기어코 쓰러지고만 풍운검군과, 살아남은 본산 제자들의 안위를 부탁하고 돌아섰던 것이 불과 촌각 전이었다.
한데 그들을 이끌고 속히 퇴각해야 할 태을무정검이 자신의 곁에 있다니.
노호검객은 순간 주위의 상황도 잊은 채 고래고래 외쳤다.
“이 멍청한! 네놈마저 없다면 도대체 누가 본문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확실히 별호 값을 하는구려. 생각해 보면 대사형은 어릴 적부터 항상 그랬지.”
“뭐라?”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황당한 얼굴로 반문하는 사형을 무시한 채, 사제는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언제나처럼 냉막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으나, 한껏 도드라진 핏줄은 그가 어느 때보다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슈확! 콰아아앙!
검을 타고 쭉 뻗어나간 강기와 화염이 부딪힌다.
그 여파에 또 한 번 주춤하는 불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의 일부가, 마치 부슬비와 같은 불똥과 함께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역시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구려. 적어도 나 혼자서는.”
“……!”
“쇄월검진(碎月劍陳). 준비는 되었소?”
앞서 사제가 그랬듯이, 사형 또한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가 어린 눈빛으로 태을무정검을 노려보던 노호검객은 일순간 모든 힘을 집중하여 검을 쳐올렸다.
쉬쉭, 쐐애애액!
서로의 성격만큼이나 상반되는 검격(劍格)이 허공을 격하며 경쟁하듯 나란히 쏘아졌다.
아니, 충돌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뒤섞이며 그 위력을 증대시켰다.
한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임을 증명하듯이.
꽈아아아앙!
그 어느 때보다 크고 강렬한 굉음과 여파.
그제야 미세하게 방향이 뒤틀린 불덩어리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은 두 사형제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강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쉭, 후우우웅!
베고, 쳐올리고, 찔렀다.
그에 따라 쉼 없는 터져 나오는 굉음 사이로, 두 노도사의 늙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서로의 귓전에 닿았다.
“장문 사제와 다른 제자들은 걱정마시오. 소평, 그 아이라면 맡은바 소임을 잘해 낼 테니.”
“소평이라…… 그래, 결국 그렇게 되었더냐.”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상황.
그제야 현재 종남파의 생존자들을 이끄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노호검객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종남의 최정예 일천.
고작 반 시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 중 삼분지 일이 죽거나 다쳤고, 거동이 가능한 이들 중 미래를 맡길 만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종남일룡(綜南一龍) 혁소평.
종남파 제일의 기재이자,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들이라 불리는 십봉룡(十鳳龍)의 일원.
한때 주색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과거 태을무정검과 용봉표국의 분쟁 직후부터 눈부실 정도로 성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인격적으로나, 무공으로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호검객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려. 역시 네 녀석이 남았어야 했다.”
“그렇게 따지면 대사형부터가 문제이니 끝도 없지. 그리고 정마대전 때의 나는 그보다도 어렸소. 장문 사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무엇이 그리 다르냐고 반박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참으리다.”
슈확!
공간을 찢어발기는 검신.
온 힘을 다해 강기의 그물을 펼쳐낸 태을무정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이런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조화가 판을 치진 않았으니.”
콰아아아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와 당장이라도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열기.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불과 촌각 전보다도 훨씬 거대해진 불덩어리가 있었다.
잠시나마 흔들리고 일부가 부서질지언정, 태산처럼 변함없이 떨어져 내리는 재앙이.
가까워진 만큼 거대해진, 수천의 목숨을 집어삼킬 지옥의 겁화가.
“저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가쁜 숨을 내뱉으며 묻는 노호검객에게,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태을무정검이 되물었다.
“대사형의 눈에는 내가 무엇으로 보이시오?”
짧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노호검객은 사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 막을 수 없다.
그들 사형제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들이었고, 저것은 이해할 수 없는 괴력난신의 힘이었으니까.
이 미친 재앙을 조금이라도 저지할 수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의 육신으로 괴물이나 신에 버금가는 경지에 오른 진정한 초인들 뿐일 테니까.
“노망이라도 난 기분이군. 화왕(火王), 그 미친 노괴가 보고 싶을 줄이야.”
“오랜만에 비슷한 생각을 했구려. 순간 어느 천둥벌거숭이 같은 핏덩이가 눈앞을 스친 것을 보아하니,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나 싶소.”
화왕 적천강.
그리고 열화신룡 진태경.
두 사형제에게 있어,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오지 못하겠지?”
“뭘 물어보시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초절정 고수의 감각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읽고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열화문의 늙고 젊은 괴물들이 자신들을 돕지 못한다는 사실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더불어 한편으로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생각 역시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열화문의 두 사제(師弟)에게 품었던 원한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원한으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러 버렸으니까.
쾅! 쾅! 꽈아아앙!
연달아 터져 나오는 폭음(爆音).
하지만 어느덧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의 강기는 눈에 띌 정도로 약해져 있었고, 이제는 고작 십여 장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다가온 불덩어리의 열기는 끔찍하리만치 강렬했다.
마지막 남은 전의(戰意)조차 불살라 버릴 만큼.
구구구궁.
뜨겁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동시에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검붉은 그늘이 전장의 일부를 뒤덮었다.
“후회……하시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조용히 흘러나온 태을무정검의 물음에,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노호검객이 대답했다.
“그래.”
그런 사형의 모습에, 사제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무엇을 후회하느냐고.
그리고 그런 사제의 모습에, 사형 역시 묻지 않았다.
그렇게 내게 묻는 너는, 후회하고 있느냐고.
짧은 말이 오갔음에도,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소리 없는 생각만이 각자의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별호만큼이나 다른 성정을 지닌 두 사람이었으나, 비슷한 삶을 살아온 그들은 지금 이 순간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인의(人義)보다는 무공을 갈고 닦았던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협의(俠義)보다 공적을 쫓기에 바빴던,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을.
검었던 머리가 하얗게 새 가듯이, 되찾은 평화 속에서 빠르게 사리(私利)와 사욕(私慾)에 물들었던 그 시간을.
그리고.
‘내 듣자 하니, 두 분께서 아주 큰 곤욕을 치르셨다 들었소만.’
그 과욕의 대가를 치르고 극심한 내상과 심마 속에 사로잡혀 있던 어느 날, 증오에 휩싸인 그들에게 찾아온 유혹의 손길을.
‘어렵게 구한 영약(靈藥)이오. 소림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약효를 지녔으니, 능히 내상을 회복하고도 남을 거요.’
만남을 거부하는 뜻을 밝혔음에도 끝끝내 대면한 불청객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후한 호의를 의심하는 두 사형제에게 거부하지 못할 한마디를 던졌다.
‘이건 호의가 아니라 거래요. 그리고 만약 두 분께서 이 거래를 받아들인다면…… 해묵은 은원(恩怨)을 해결함은 물론 종남파의 안위에도 도움이 되겠지.’
그들은 갈등했지만, 마침내 거래를 승낙했다.
종남파 장문인의 적전제자로, 정마대전의 영웅이자 강호의 명숙으로 살아온 일평생. 이대로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떠안은 채 살아갈 수는 없었다.
복수해야 했다.
설령 그 방식이 죽음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겪은 것과 같은 수모를 열화문에 안겨 주어야 했다.
더군다나 종남파의 안위 또한 보장되는 길이었으니.
하여 그들은 이 달콤한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렇게 불청객이. 아니, 흑야왕(黑夜王) 사마공이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머리 위를 덮어 오는, 이글거리는 화염을 바라보며.
‘어찌하여 이리되셨소.’
풍운검군.
자신들의 막내 사제가 공허하게 내뱉은 그 한마디.
회한에 찬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망쳐라.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으니.”
“싫소. 그러는 대사형이나 가시오.”
“나도 싫다.”
삼 장.
이제는 온 시야를 가득 메운 거대한 화염의 구를, 두 사형제는 넋 나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맞소.”
“한데 왜 왔느냐?”
“대사형과 같은 이유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이 장.
화염이 토해 내는 그 열기가, 빛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태을무정검은 눈을 감았다.
아니, 차마 떳떳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을지도 몰랐다.
“……부끄러워서. 미안해서 그랬소.”
인의를 가르쳤던 스승에게.
못난 자신들을 사형으로 섬겼던 막내 사제와 사문의 제자들에게.
그 외의 모든 이에게.
그리고, 이미 오래전 길을 벗어난 자신들과 달리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 어떤 스승과 제자에게.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로군.”
태을무정검, 혹은 노호검객.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을지 모를 그 음성은 어느 때보다 공허했고.
화아아아아악!
반경 수백여 장에 걸쳐 드리워진 거대한 불덩어리가 토해 내는 열기와 빛은, 어느 때보다도 화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