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5
#104화
불야성(不夜城).
그것이 혼주의 첫인상이었다. 어둑한 밤이었음에도 수많은 전각이 늘어선 거리는 등불로 환했고,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생각 이상인데?’
현대의 밤거리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잘 꾸며진 번화가다.
뭐랄까, 그 문화가 가진 고유의 멋이 있다고 해야 하나?
‘오, 저거 좀 멋있네.’
흥미롭게 창밖을 구경 중인 나와는 달리 진무경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소란스럽군. 이럴 바에야 야숙이 훨씬 낫겠어.”
“에이, 어차피 지나가는 길인데 왜 그러십니까.”
혁무진의 넉살 좋은 대답에 진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마차만 똑바로 몰았어도 이미 한참 전에 지나쳤다.”
“그전에 이공자님께서 마부만 안 쫓아내셨어도…….”
“뭐?”
“아닙니다. 제가 죽일 놈이죠.”
날카로운 시선에 찔끔한 혁무진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도 본가를 대표해서 가는 건데 좋은 곳에서 좋은 거 먹고, 뭐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들도 쉬게 하고요.”
“무릇 음식이란 허기만 면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우리 중 누가 네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더냐?”
“소가주님이요.”
“……형님께서?”
“예. 수행원들도 없이 가는 거니까 숙식이라도 좋은 곳에서 해결하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내가 저놈 형이었어야 했는데.
성격 더럽고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진무경이지만 하나뿐인 형에게는 꼼짝도 못 한다. 머뭇거리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라.”
“옙.”
드디어 1승을 거둔 혁무진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 * *
마차가 멈춘 곳은 4층 높이의 거대한 목조 건물 앞이었다.
봉황객잔. 유려한 필체로 적혀 있는 현판이 인상적이다.
“여기 엄청 비싸 보이는데?”
“대태원진가의 공자님들이 머무르실 곳인데 당연히 비싸야죠. 소가주님께서도 신신당부하셨다니까요, 무조건 최고로!”
“…….”
남의 돈이라고 아주 신났다, 신났어.
고개를 저으며 마차에서 내리자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점소이가 쪼르르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옵쇼!”
어린 나이에 서비스 정신이 제법이다. 앞으로 나선 혁무진이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는 객실이 있느냐?”
“물론입죠. 혹 어떤 방을 원하시는지?”
“가장 큰 곳으로 다오.”
“아, 별채 말씀이십니까요?”
점소이가 우리 일행을 바라봤다. 셋 다 무복 차림이라 그런지 이어지는 말이 조심스럽다.
“죄송하지만 별채는 선불로 절반을 내셔야 합니다.”
“허어, 이런 영악한 놈을 보았나.”
짐짓 얼굴을 굳힌 혁무진이 품에서 묵직한 전낭을 꺼내 들었다. 진위경에게 경비로 받은 돈인 듯싶었다.
“그래, 얼마냐?”
“하루 머무시는데 오십 냥입니다요.”
오십 냥이면 얼마야?
나야 여기서 돈을 사용해 본 적도 없고, 화폐 구조도 모르니 그냥 혁무진에게 맡길 뿐이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슬쩍 옆을 보니 진무경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무공 외골수에 부잣집 도련님. 금전 감각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배경이긴 하지.
그러나 노동자 계급인 혁무진의 반응은 달랐다.
“뭐? 얼마?”
“오십 냥이요.”
“……철전?”
“예?”
혁무진을 위아래로 훑어본 점소이가 피식 웃었다.
“방 바꿔 드려요?”
“……!”
명백한 비웃음. 입술을 파르르 떨던 혁무진이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어린 녀석이 상술이 제법이구나. 바꾸긴 무슨, 어서 별채로 안내해라.”
“그전에 스물다섯 냥은 주셔야 하는데.”
“이놈이 그래도!”
“어이쿠!”
혁무진의 어깃장에 점소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저 녀석이 우리 사이에서나 괴롭힘 받지, 저래 봬도 일류 무인에 태원진가의 차기 수문각주 후보다.
무공을 모르는 양민, 그것도 겨우 10대에 불과한 어린애는 겁먹을 수밖에 없지.
“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바짝 긴장한 점소이를 따라 별채로 이동했다. 가는 길엔 과장 좀 보태서 축구장 크기만 한 정원과 잉어들이 헤엄치는 연못이 보였다.
별채 안은 커다란 방 세 개로 나뉘었고 척 봐도 값나가는 물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야, 방 좋네.”
진무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이 정도 크기면 수련에도 문제없겠어.”
“…….”
저놈 머릿속은 무공밖에 없나?
내가 별채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사이 숙박료를 치른 혁무진이 돌아왔다.
“두 분, 식사 안 하십니까?”
“난 됐다. 허기를 참는 것도 일종의 수련이지.”
단호하게 대답한 진무경이 별채를 나서 정원으로 사라졌다.
“조장님은요?”
“내가 저런 미친놈처럼 보이니? 배고파 죽겠다. 빨리 가서 이것저것 다 시켜 먹자.”
순간 녀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 * *
봉황객잔은 산서성의 명물이다. 그 이유는 총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째로는 수백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요, 둘째는 전(前) 황실 숙수가 직접 만드는 요리이며, 마지막 셋째로는 여주인의 미모였다.
그렇다 보니 봉황객잔에는 비싼 가격에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혁무진은 꿈도 꾸지 못할 곳이었지만.
‘나 같은 놈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와 보나.’
반 시진 전만 하더라도 혁무진의 기분은 최고조에 다다라 있었다. 좋은 객실, 맛있는 음식, 그리고 운이 좋은 날에야 볼 수 있다는 여주인의 미모까지.
이 모든 걸 남의 돈으로 즐길 수 있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리고 별채의 하루 숙박료를 듣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같은 말, 다른 느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점소이의 비웃음에 홀랑 넘어가 선불 요금까지 냈으니 모든 게 끝장이다.
‘경비로 받은 건 딱 오십 냥이 전부인데.’
은자 오십 냥.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네 식구의 일 년 생활비가 은자 열 냥이 약간 넘는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다.
그러나 봉황객잔의 가격은 일반적인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는 게 문제였다.
‘선불로 스물다섯 냥 줬으니 딱 절반 남았다.’
이마저도 날이 밝으면 없어질 돈이다. 하룻밤 숙박비로 진위경에게 받은 경비를 다 쓰게 생긴 혁무진은 등허리가 축축해졌다.
‘빌어먹을 점소이 놈이 비웃지만 않았어도…….’
후회는 항상 늦는 법.
혁무진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일단 경비는 다 날아갔다. 하지만 혹시 몰라 챙겨 온 비상금이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될지도 몰라.’
은자 다섯 냥. 그가 지금까지 모아 놓은 전 재산이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져온 건데 정말 쓸 줄은 몰랐다.
‘크게 사치만 부리지 않으면 복귀까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그러나 혁무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진태경의 먹성이었다.
후르르르릅. 꿀꺽. 우걱우걱.
“이야, 입에 쫙쫙 달라붙네.”
“…….”
규화계, 어향육사, 매채구육, 소총반두부, 궁보계정……. 그 외 십여 개의 요리가 줄줄이 탁자 위로 올라올 때마다 진태경의 손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이야, 이거 진짜 맛있다. 육즙이 아주.”
“…….”
“안 먹어? 그럼 남은 것도 내가 먹는다?”
“…….”
“와, 국물이 끝내주네.”
“……많이 드십쇼.”
어느새 혁무진의 볼에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온 것만 해도 은자 다섯 냥.’
마지막 희망마저 끝장났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앞으로 스무 접시는 더 처먹을 기세.
혁무진은 접시로 저 돼지 같은 놈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전 재산에 이어 목숨까지 날리고 싶진 않으니까.
‘옥황상제님, 원시천존님. 제발 저놈을 멈춰 주소서.’
하늘을 원망하던 그때였다.
파창!
* * *
무림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라면 첫째가 생존, 둘째가 음식이다. 어찌 된 건지 하나같이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들뿐이라 식사 때마다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의미에서 막 탁자에 오른 이 요리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계용옥미갱(鷄茸玉米羹).’
달걀을 부드럽게 푼, 일종의 옥수수 수프다.
살며시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아 보니 옥수수 특유의 고소한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그래, 이거지.’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안 그래도 슬슬 속이 니글거리던 차였다. 계용옥미갱으로 속을 다스린다면 앞으로 열 접시는 더 비울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기분 좋은 기대감과 함께 뜨끈한 사기그릇을 잡은 그때였다.
파창! 투두두둑!
“……어?”
창졸간에 일어난 일. 탁자 중앙에서 박살 난 술병이 수백 개의 도자기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비산한다.
거기에 더해 술병 안에 남아 있던 약간의 술까지.
후두두둑.
때아닌 소나기를 고스란히 맞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럴 수가.’
그토록 고대하던 계용옥미갱. 고소하고 부드럽게 내 속을 어루만져 줄 국물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지금 사기그릇에 담겨 있는 것은 술과 도자기 조각이 들어간 음식물 쓰레기에 불과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혁무진은 입을 딱 벌렸다.
“오, 옥황상제. 원시천존이시여.”
녀석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술병이 날아온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 다섯 놈이 눈에 들어온다.
“어이고, 형장. 미안합니다.”
“손이 미끄러진 걸 누굴 탓해. 다시 시켜 주면 되지.”
“어허, 큰일 날 소리. 저놈 방금까지 먹는 거 못 봤어?”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까딱였다.
처음 내게 사과한 놈. 저놈이 바로 계용옥미앵을 망친 장본인이다.
“뭐, 오라고?”
놈이 피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온다.
땀과 피 냄새가 밴 무복과 왼쪽 허리춤에 찬 곡도(曲刀) 한 자루. 그게 놈이 가진 자신감이었다.
좋아, 이성적으로 대처하자. 나는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옛 성인들께서 말씀하시길,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정중하게 사과하고 음식 다시 시켜. 계용옥미앵부터.”
“어허, 어린놈이 혀 짧은 것 좀 보게.”
“사과는?”
“얘야, 혀 내밀어라. 뽑아 줄라니까.”
놈이 씩 웃자 시커멓게 썩어들어 간 이빨이 보였다.
끔찍한 구취에 식욕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마도 계용옥미앵은 나중에 먹어야 할 듯싶다.
“입 벌려. 주먹 들어간다.”
말과 동시에 놈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직!
* * *
봉황객잔이 유명한 이유는 세 가지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사내들이 유독 많이 찾는 것은 세 번째 이유 때문이었다.
운 좋은 날에나 만날 수 있다는 미모의 여주인.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소란스럽구나.”
또렷하지만 나른한 여주인의 목소리는 혼잣말이 아니다. 문밖의 인기척이 사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잠시 후, 문밖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쯧쯧. 작게 혀를 찬 여주인이 입을 열었다.
“죽었느냐?”
“한 명이 다른 여섯을 모두 제압했습니다.”
“어느 곳의 누구라더냐?”
“산서잠룡입니다.”
여주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거참, 반가운 이름이구나. 간만에 얼굴이나 봐야겠다.”
비스듬히 누워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스며든 달빛이 얇은 곰방대를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