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50
#1049화
그 순간, 새하얗게 물든 혈검마군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이었다.
왜 아니겠나.
눈앞의 여인, 대술사(大術士)와 그는 아군이었다.
같은 주인을 모시며 같은 목표를 지닌.
그랬기에 혈검마군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좀처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대술사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기 전까지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요?”
“……뭐?”
“이건 꿈이 아닙니다, 마군(魔君). 엄연한 현실이에요.”
혈검마군은 멍하니 대술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조금 전 자신의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담긴 의미를.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대술사의 말을 뒷받침하듯, 전신 구석구석에서 전해져 오는 격통을 느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장난이…… 과하군.”
“장난이라니, 그것이 대관절 무슨 말씀이신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인의 모습에 혈검마군은 이를 악물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구친 울화가 핏물이 되어 울컥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서, 쿨럭. 어서 나를 치유해라.”
“그 문제라면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면사 아래로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
가쁘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혈검마군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인 대술사가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이미 치유는 끝났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치유(治癒)였다.
완전하지 못한, 그러나 조금씩 어둠으로 물들어 가던 누군가의 의식을 부여잡기에는 충분한 수준의 치유.
후우우.
힘겹게 쌕쌕거리며 내뱉던 숨결이 안정되고, 새하얗게 질려있던 낯빛과 입술은 어느덧 본래의 혈색을 되찾는다.
청년을 휘감은 따스한 광휘가 완전히 사그라졌을 때, 대술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허공을 휘저었다.
쩌적, 촤르륵!
봉인되어 있던 상자가 열리듯 갈라지는 땅거죽.
동시에 땅속 깊숙이 숨어 있던 초목의 줄기가 솟구쳐 청년을, 진태경을 휘감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에도 언덕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짓쳐 들던 훼방꾼들에게 보여 주려는 듯이.
그리고 저 멀리 인질처럼 포박당한 진태경의 모습에,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적천강과 궁성은 발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 통하지 않는 건 조금 슬프지만, 어쩌겠어요.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작게 혀를 차는 대술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혈검마군은 그제야 비로소 완전히 깨달았다.
이것은 한낱 꿈도, 짓궂은 장난도 아니라는 것을.
“어째서?”
수많은 의미가 담긴 물음.
그러나 뒤이어 돌아온 대답은 짧으면서도 명료했다.
“그분께서 원하시니까.”
은백색의 면사가 흔들린다.
그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대술사의 무감정한 눈빛은 이미 상관을 대하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혈검마군을 향해 이어지는 담담한 목소리 역시도.
“일평생을 실컷 날뛰었으니, 이제는 쉴 때도 됐잖아. 안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무뎌지는 감각 때문일까.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충격 때문일까.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혈검마군은, 불쑥 한마디를 내뱉었다.
“개소리.”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나오는 음성이었으나,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버림받을 리 없다는 확신.
설령 자신의 주인이 그를 단순한 사냥개로 여겨 왔다고 해도, 이토록 허무하게 가마솥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그것도 결국 모든 사냥이 끝났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현재 천주가, 암천이 처한 상황은 어떠한가.
서천마군이, 남천마후가, 뒤이어 동천마군과 북천마군도 쓰러졌다.
가장 신뢰하던 네 마리의 맹수는 이제 없다.
무림맹의 깃발 아래 결집한 중원 무림은 한낱 토끼로 치부할만한 전력이 아니었고, 혈주와 함께 살아남은 혈검마군 자신은 사냥개 이상의 존재였다.
수만 명의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손을 뻗어도 달콤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몸뚱어리만 회복할 수 있다면.
진태경을 인질로 삼는다면 화왕과 궁성이라 한들 감당할 수 있었다.
감숙의 패권이 천하로 향하는 승리의 교두보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그분께서 버리신다고?’
혈검마군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주인과의 이간질을 시도하는 건방진 계집을 향해 검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계집. 네년의 배반을 그분께서 모르시리라 생각하느냐?”
틀림없었다.
대술사. 저 더러운 배반자가 모든 것을 망쳤다.
자신이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한 이유는, 단지 내부의 종양 덩어리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저 간사한 놈들에게 무엇을 약속받았느냐? 거대한 장원?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 아니면 네년의 그 더러운 욕망을 채워 줄 절세의 미남?”
혈검마군은 들끓어 오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나서려던 혈검마군을 대술사가 막아 세웠던 것도, 그로 인해 핵심 전력이었던 흑귀(黑鬼)들이 전멸한 것도.
심지어 혈검마군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강력한 술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끝끝내 돕지 않았던 것도.
속았다.
철저히 농락당했다.
그리고 그 견딜 수 없는 사실이 혈검마군으로 하여금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감히. 감히 네년 따위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고작 이 정도로 그분의 대계(大計)를 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투둑, 툭.
혈검마군은 앞서 충돌의 여파로 생겨난 구덩이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몸뚱어리를 일으켜 세웠다.
한쪽 팔을 잃고, 다리의 힘줄이 잘려 나가고, 뼈마디가 으스러졌음에도 그에게는 범인(凡人)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내심과 생명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극렬한 분노에 사로잡힌 혈검마군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가 몇 번이나 즉사하고도 남을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대술사의 마법이 육신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그야 물론이지.”
대술사는 구덩이를 빠져나와 자신을 향해 기어 오는 혈검마군을 담담하게 응시하며 덧붙였다.
“심지어 그건 아주 간단할 테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의 혈검마군을 상대로는 마법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에게 부여한 신체 강화 마법을 해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 당장 대술사가 죽이고자 하는 의지만 품는다면, 일세를 풍미했던 대마두는 촌각도 지나지 않아 더없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을 하긴 했어. 그래, 나 따위는 당신을 죽일 수 없지.”
“……뭐?”
사박.
혈검마군의 반사적인 물음에, 대술사는 대답 대신 사뿐히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혈검마군을 뒤로한 채, 짐짓 과장되기까지 한 움직임으로 양팔을 활짝 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뿐이니까.”
바로 그때.
촤르륵.
쇠사슬보다도 굵고 단단해진 초목의 줄기가 주인의 의지에 반응했다.
그리고 마치 지능을 가진 생물체처럼 움직인 그것들은,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채 깊은 잠에 빠진 한 청년의 육신을 주인의 앞으로 데려왔다.
정확히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그를.
“괜한 연기는 집어치우고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계속 그렇게 있어봤자 내 경계심만 늘어날 텐데.”
다음 순간.
“시벌. 알고 있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침까지 흐르던 입술 사이로 난데없이 튀어나온 욕설과 함께, 슬그머니 눈을 뜬 진태경이 그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 * *
하마터면 의식을 잃을 뻔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잠깐은 정말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여느 때와 같이 길고 긴 악몽에 파묻혀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이 상황도 꿈이나 다름없게 느껴졌지만.
‘……허.’
나는 당장이라도 새어 나오려는 실소를 삼켜야만 했다.
그래, 이건 정말로 꿈이 아니다.
여전히 바람은 거칠었고 하늘은 어둡다.
끊이지 않는 전장의 함성은 점점 더 크게 귓가를 울리고 있었으며, 그들이 휘두르는 날붙이 아래로 각자의 죽음과 삶이 교차하고 있었다.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적천강과 궁성의 모습을 제외한다면 언덕 아래에 펼쳐진 광경은 마지막 순간 보았던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다만 이 언덕 위의 상황은 달랐다.
어느덧 이 좁은 공간 속,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상식, 예측, 그리고 적과 아군까지도.
그리고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채 모든 것을 듣고 있던 나는 눈앞의 여인, 대마도사를 향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너……. 아니,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를 치료해 주었는지.
당장이라도 혈검마군을 멀쩡하게 회복시킬 정도의 능력이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를 처치하려 하는지.
“대답해. 어서.”
나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대마도사를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속박 마법을 풀고 저 새하얀 목을 틀어쥐고 싶었지만, 지금의 내게 그 정도의 여력은 없었다.
고작해야 흐려지는 의식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고 사지를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수준.
내게 깃든 치유의 힘에는, 딱 그 정도의 목적과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대마도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쉽네요.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질문 따위에 얼마 없는 기력을 낭비하진 않을 텐데.”
“뭐?”
“질문 자체가 틀렸어요. 지금의 이 상황은, 내 의지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니니까.”
“……!”
대마도사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는 건?”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바가 맞아요. 사냥개는 언제나 소임을 다할 뿐이죠.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침착하게 대답한 대마도사는 혈검마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맡은 소임이 다하면, 필요도 없어지는 법이고요.”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가운 한 마디.
그리고 애써 부정하던, 아니 누구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충격적인 진실과 직면한 혈검마군은 혼백이 빠져나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것은 나 역시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천주는 혈검마군을 버리려 하는지.
그로 인해 이 거대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이 중요한 전투를, 어떻게 이토록 아랑곳하지 않고 내팽개쳐 버릴 수가 있는지.
하지만 그 의문에 대마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뜻 모를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당신은 여기에서 쓰러져서는 안 되니까. 더 강해져야 하니까.”
“뭐……라고?”
“그를 죽이세요. 그리고.”
피처럼 붉은 입술이, 면사 아래로 달싹였다.
“더 강해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