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53
#1052화
“또 보네?”
나직한 음성과 함께 어느덧 코앞까지 들이닥친 진태경의 모습에, 대술사는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단순히 빠르다는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상을 아득하게 벗어난 속도.
그리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몸뚱어리를 향해 내리그어지는 은빛 창날.
쐐애액!
바람이 갈라진다. 아니, 부서진다.
창날을 휘감은 강기를 따라 공간이 일그러지는 그 무시무시한 광경 앞에, 대술사는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공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강대한 보호의 힘이여!’
우우웅.
느려진 세상 속, 심장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기운이 들끓었다.
그와 동시에 겹겹이 솟아오른 반투명한 보호막이 시전자의 육신을 감싸며 창날을 막아섰다.
콰앙! 콰드드득!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지면.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대술사의 모든 감각은 오직 눈앞의 시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수십여 겹이나 중첩된 보호막 중 대부분을 파괴한 후에야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창날에.
‘막았다.’
등골을 타고 솟구치는 전율 속, 대술사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안도감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 회심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흐릿하게 웃고 있는 진태경의 모습을 보며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었음을.
그것도 아주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존재들을.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듯이, 전장에서의 깨달음은 늘 한발 늦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쉬이이잉!
공간을 가로지르며 날아든 거대한 섬광.
시야를 아득하게 물들이는 그 휘황한 빛무리 너머로 보이는 두 사람의 인영(人影)에, 대술사는 소리없는 비명을 터트렸다.
‘궁성(弓星)……!’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에 이어 크게 부풀어 오른 섬광이, 언덕 전체를 집어삼켰다.
* * *
마지막 순간, 그 모든 일은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엄청난 충돌의 여파를 예측한 내가 거리를 벌린 것.
저 멀리, 활시위를 떠나 맹렬하게 들이닥친 강기의 화살이 마침내 보호막과 맞닿은 것.
그리고.
화아악!
모두의 시야를 가리며 부풀어 오르는 아득한 섬광이, 힘없이 부서지는 보호막 뒤에 가려져 있던 대술사의 신형을 집어삼킨 것.
구구구구궁!
지축이 뒤흔들린다. 일순간 터져 나온 빛이 어둠을 찢고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그저 엄청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힘의 파동.
‘흡……!’
숨을 삼키며 한껏 몸을 웅크렸다. 마치 칼날처럼 휘몰아치는 광풍이 전신을 스치고 허공을 난도질했다.
그렇게 찰나에 불과하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먹먹해진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누군가의 익숙한 음성을.
“괜찮으냐?”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섬광 너머, 갈기갈기 찢어진 새하얀 의복과 사방에 흩뿌려진 핏물. 그리고 몸뚱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누군가의 팔다리가 보였다.
여인의 것이 분명한, 하얗고 가느다란 그것들이.
“끝났다. 전부.”
“……아.”
대마도사의 죽음.
비로소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도 모르게 전신의 맥이 탁 풀렸다.
이미 한참 전에 한계에 다다라 있던 정신력, 그로 인한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밀려와 눈앞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덥석.
휘청이는 몸뚱어리를 붙잡는 억센 손아귀.
힘있게 나를 일으켜 세우는 적천강의 모습에, 문득 실소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노야.”
“뭐가 말이냐?”
“반 각. 한참 전에 지났잖아요.”
적천강이 나를 따라 웃었다.
“아직 백 년은 이르지. 저 염병할 놈이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
말과는 달리 피투성이가 된 몰골.
그러나 적천강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한 곳을 가리켰고, 그의 손가락 끝에는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늙은 대마두가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엄청난 후폭풍 속에서 혈검마군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참 멀리도 떠났더구나. 터무니없이 무모하게도.”
소교, 아니 궁성이 평소와 다름없는 침착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쉴 틈 없이 천하의 절반을 가로질렀음이 분명한데도, 그녀의 모습에서는 여전히 칼날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그리고 막중한 피로를 느끼고 있을 궁성이 이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굳이 혈검마군을 보호한 이유 역시도.
“하지만 남은 이야기는 뒤로 미루어야겠지. 아직 남아 있는 문제가 있으니.”
궁성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대마도사가 죽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언덕 아래의 혈전은 계속되고 있었으니.
그러나 궁성이 말하는 문제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나.”
서늘한 살기(殺氣)가 묻어 나오는 궁성의 한 마디에,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거친 숨을 내뱉고 있던 혈검마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좋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말해 주마.”
무엇이든, 이라.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 말을 곱씹었다. 동시에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가며 백염을 들어 올렸다.
스릉.
대답 대신 겨누어진 창날.
그 시리도록 빛나는 섬광 앞에서, 애써 담담하던 혈검마군의 음성이 한층 커졌다.
“배신자, 너희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파를 뿜어내던 대마두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내 앞에 쓰러져 있는 혈검마군은, 패악으로 물든 일평생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해 버린 걸인(乞人)이나 다름없다.
주인에게 버려지고, 아군에게 배신당하고, 이제는 자신이 죽이려 했던 적에게까지 정보를 팔아 목숨을 구걸하려는.
“두려워?”
“……뭐?”
“너 같은 것들도, 두려움을 느끼냐고.”
부릅떠진 놈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래는 없다.”
혈검마군은 이미 버림받은 개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놈의 운명은 토사구팽으로 정해졌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것이야말로 천주가 의도했던 결과였고 언젠가 가차 없이 내쳐 버릴 사냥개에게 정성을 쏟을 주인은 없다.
그렇기에 나 역시 그 사냥개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설령 그것이, 오늘 이 자리에서 윤곽을 드러낸 배신자들에 관한 정보라면 더더욱.
“흑야왕(黑夜王) 사마공. 노호검객(怒號劍客) 송일. 그리고 태을무정검(太乙無情劍) 황보엄.”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세차게 흔들리는 혈검마군의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한다.
단지 확신에 가까웠던 짐작을, 비로소 확신이라는 두 글자로 완성시킨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간신히 쥐어 짜낸 듯한 음성.
나는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혈검마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하,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나는 참을 수 없는 피로를 느끼며 창날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문득 떠올렸다.
배신자들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이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건 혈투를 치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리고 그건 아마도.
“조금 더. 믿고 싶었나 보지.”
“……!”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승리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병신처럼 여기까지 왔던 거겠지.”
그래.
그것이 승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암천과 우리의 차이.
천주와 나의 차이.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실낱같은 믿음과 기대에 대한 결과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정확히는,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믿음을.
‘사마표.’
과묵하고, 어두컴컴하지만 단 한 번도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던 녀석.
그 어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먼저 뒷걸음질 치지 않고, 늘 함께 등을 맞대고 싸웠으며, 서로의 피를 뒤집어쓴 채 웃었던 전우.
아니, 친구.
‘녀석이 아니었다면, 이런 작은 믿음조차 품지 못했겠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적천강이 내게 물었었다.
만약 사마표와 태산이 배신한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마표와 함께 대설산의 산맥을 내려가던 그 순간에도 마음속으로 되뇌었지만, 도저히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녀석들을 죽이지 못할 테니까.
다만 믿었을 뿐이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그리고 배신자들을 향해 믿음을 보낸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제는 두 사형을. 아들은 아버지를.’
결국 그들의 믿음은 보답받았다.
배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끝끝내 전세를 뒤바꾸었다.
나는 보았다.
태을무정검과 노호검객이 헬파이어를 향해 몸을 내던지는 광경을, 적천강을 대신하여 혈검마군과 맞서는 사마공의 모습을.
물론 그들이 지은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을 용서할 권리는 내게 없다.
적천강도, 궁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 최소한의 도리(道理)를 지킨 배신자들의 모습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곧 주인의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혀질, 버림받은 사냥개와는 다르게.
“그래서 다른 거야. 너희랑 우리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나를, 혈검마군은 실핏줄이 터져나간 붉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진태경-!”
그리고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온 그 순간.
푹.
두부를 가르듯 부드럽게 가슴을 파고든 창날이, 혈검마군의 뒷말을 집어삼켰다.
아니, 놈에게 남아 있던 실낱같은 생명력을.
띠링.
귓가를 울리는 맑은 종소리.
동시에 계곡물처럼 시원한 기운이 전신을 휩쓸고, 다시 한번 내 육신에 새로운 강인함을 불어넣었다.
은백색 창날에 꿰뚫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누군가와는 달리.
그리고 그보다 한발 앞서, 몸뚱어리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만큼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누군가의 뜻대로.
‘여기에서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지금보다 더 강해지라고?’
전신을 짓누르는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느끼며,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강기의 화살이 휩쓸고 지나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대마도사의 마지막 흔적을 향해, 이제는 그녀가 듣지 못할 한 마디를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걱정하지 마. 반드시 그렇게 해 줄 테니까.’
천주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나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욱 강해져야 한다.
천주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날 만큼, 언젠가 놈이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만큼.
‘무엇이 앞길을 가로막더라도, 부수고 허물어트리면 그만이다.’
지금껏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마음속 뇌까림과 함께, 나는 비틀거리는 신형을 돌려세웠다.
정확히는 돌려세우려 했다.
피 웅덩이 위에 잠겨 있는, 각각 하나씩 몸뚱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가냘픈 팔과 다리에 새겨진 예리한 단면(斷面)을 보기 전까지는.
아니.
“……!”
텔레포트(Teleport)의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