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57
#1056화
슈확!
바람을 찢은 섬광은 실로 예리하면서도 정확했다.
흑룡도(黑龍刀).
고작 십 대에 불과했던, 그러나 어린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일찍이 두각을 드러냈던 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 받았던 보도(寶刀)는, 주인의 손을 따라 눈앞의 목표를 정확히 베어 갈랐다.
서걱!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핏물이 튀었고, 이 모든 것을 직시하고 있던 한 쌍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슨 짓이냐.”
많은 것이 담긴 물음이었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마표는 차갑게 식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흑룡마문의 후계자에게만 허락된 그 예리한 날붙이는, 사마공의 콧날을 스쳐 지나가 피 웅덩이를 가른 후였다.
진정한 사파인으로 성장한 아들의 모습에 기뻐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던 아버지를 비웃듯이.
“이게 제 선택입니다. 당신의 뒤를 이어 흑룡마문의 문주가 될, 이 사마표가 택한 길입니다.”
“어째서……!”
핏물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외치는 사마공을, 사마표는 담담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라?”
“최선(最先)이나, 최선(最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마표에게 있어, 이것은 무엇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이 옳은가, 더욱 선한가의 문제였다.
“일평생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익숙해져 있었기에 계속해서 모른 척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감숙에서의 지난 삶은,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다.
앞서 태어난 피붙이들이 그러했듯, 사마가(家)의 막내 역시 버림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그들은 같은 핏줄을 지닌 가족인 동시에, 오직 하나뿐인 후계자 자리를 다퉈야 하는 경쟁자였으며, 이러한 핏줄을 물려준 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죽음조차 불사해야 하는, 그런 존재.
‘아버지, 둘째 형님께서……!’
‘이미 전령을 통해 들었다. 장례는 놈들을 모조리 쓸어 버린 후에 치를 것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사마공은 냉철한 정복자였고, 사파를 일통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피와 희생이 필요했다.
흑룡마문이 천하의 모든 사파를 아우르고 공동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정에서, 다섯이 넘는 형제와 누이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불과 십 대의 나이임에도 후계자로 낙점된 흑룡마문의 막내 공자가, 보이는 것만큼 냉정하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도 몰랐지만.
‘어찌 그리 서럽게 울고 있느냐?’
‘아버지, 흑룡마문 도왔다. 그런데 죽었다. 슬프다.’
‘……!’
‘시신, 찾아야 한다. 아버지 묻어 줘야 한다. 그런데, 그런데 저 사람들이 모른다고 했다. 태산이 슬프다.’
‘……태산이라고 했지, 따라오거라.’
사마표는 산만 한 덩치로 울고 있는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 주었다. 흑룡마문의 무복을 입은 채, 까마귀 떼에 둘러싸여 있던 그를 정성 들여 묻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친구를 얻었다.
가족보다 소중한, 아버지보다 자신을 아껴 주는 유일한 친구를.
하지만 그로부터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또 다른 친구들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제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화룡각.
그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고작 열 명도 되지 않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사마표는 자신이 몰랐던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족쇄나 꼬리표도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서로를 믿고 싸웠고, 그렇게 위기를 헤쳐 나갔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마표가 자신의 지난 삶을 몇 번이나 되돌아보게 된 이유도.
어느 순간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에 대해 낯선 감정이 들기 시작한 이유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면 당신도, 퍽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서서히 야망에 사로잡히고, 어느 날부터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겠지요.”
한때, 아버지의 냉엄한 시선을 차마 마주칠 수 없었던 아들은 이제 없다.
지금 이 순간, 사마표는 담담하면서도 슬픔이 담긴 눈빛으로 죽음을 코앞에 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무슨.”
“우연히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온 겁니다. 흑야왕의 후계자가 아니라, 사마공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로서.”
철벅.
“알고 계십니까?”
사마표는 피 웅덩이에 앉아 자신의 아버지와 시선을 맞추었다.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아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
“제 입으로 직접 저들에게 모든 사실을 밝힐 겁니다. 아버지의 배신을 애써 모른 척해 왔던 못난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털어놓겠습니다.”
“너.”
“용서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내하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평온한 그 대답에, 사마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오늘 이 자리에서야 문득 떠올린 어떤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야 속. 마지막을 암시하듯 가빠지는 숨결을 느끼며.
“왜 그랬냐고, 물었었지. 일평생 생존과 실리만을 좇던 내가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느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서?
아니다. 아니었다.
적어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또 다른 이유였음을 사마공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를 고백하기에는 너무 늦었을 뿐.
“나는, 이 아비는.”
아버지의 최후를 지키기 위해 돌아온 아들을 향해, 사마공은 남아 있는 온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숨결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스륵.
불현듯 꺾이는 고개.
살아생전의 업보처럼,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향해 아들은 나직이 속삭였다.
“들었습니다. 분명히.”
이내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두 부자(父子)를 적신 피웅덩이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 * *
극도로 훈련된 사냥개들은 언제나 주인의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주인이 가리킨 사냥감을 직시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대다가, 마침내 목줄이 풀림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가 물어뜯는 것이다.
사냥감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혹은 사냥을 그만하고 되돌아오라는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바로 지금처럼.
쐐애액!
측면으로부터 시작된,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번뜩이는 섬광.
그러나 속도란 늘 상대적인 것이다.
새하얀 검신을 타고 솟구친 검기(劍氣)가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그 일련의 과정은 절정 고수의 솜씨답게 쾌속했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서걱!
일순간 갈라지는 공간.
반 박자 늦은 절삭음과 함께, 은백색의 창날이 스쳐 지나간 궤적 안의 모든 것이 베어졌다.
어느새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버린 검기.
그 강력한 기운을 담고 있던 검신.
마지막으로 이 덧없는 공격을 감행한 누군가의 몸뚱어리까지.
푸확!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분리된 몸뚱어리에서 엄청난 양의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 처참한 광경에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사냥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푹, 콰득! 퍼걱!
가장 먼저 전방에서 달려드는 놈의 가슴에 창날을 박아넣고, 곧이어 사각에서 들이닥친 적의 얼굴을 일권(一拳)으로 짓뭉개는 동시에 박혀있던 창날을 뽑아 휘둘렀다.
“꺼흑, 끅.”
털썩.
유언을 대신한 단말마(斷末摩)와 동시에 쓰러지는 세 명의 절정 고수.
아니, 세 구의 시체.
하지만 피로 물든 설원을 휘감은 전투의 광기는, 조금도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쉬쉬쉬쉭!
찰나의 공백조차 허락하지 않고 빈 자리를 메우며 달려드는 암천의 교도들.
그리고 한 줌의 감정조차 깃들어있지 않은 그 무감각한 표정과 눈동자들을 보며, 나는 전신을 짓누르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도대체 몇 명째지?’
모르겠다.
내 손에 죽음을 맞이한 적들의 숫자를 일일이 헤아릴 여유도, 그럴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저 싸울 뿐이다. 끊임없이 쓰러트릴 뿐이다.
영혼이 없는 저 목각 인형들을.
자신들의 목줄을 쥔 주인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내려진 명령을 따라 맹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저 사냥개이자 부나방들을.
물론 나 역시 알고 있다.
이건 일방적인 학살이고, 살육이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했다.
그것만이 피로 얼룩진 이 혈투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아군을 구할 수 있는 길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이 의식의 끈을, 온 힘을 다해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와라.’
나는 마음속으로 뇌까리며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정확히는, 쇄도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아득해지는 시야를 느끼기 전까지는.
“……!”
머릿속에서 붉은색 경종이 울렸다.
한참 전부터 한계에 달해있던 정신력이 참지 못하고 전달한 위험신호.
하지만 내가 애써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슈확!
어느샌가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야 속, 나도 모르는 사이에 휘청이고 만 몸뚱어리를 향해 십여 자루의 날붙이가 쏟아지고 있었다.
흐릿하면서도, 느리게.
문제는 극도로 예리한 안력(眼力)과는 달리, 빠르게 명령을 내려 몸을 움직여야 할 두뇌가 석상처럼 굳어있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느려진 세상 속, 나는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저들은 혈검마군도, 대술사도, 흑귀들과 비견될 만한 무위를 지니지도 않았다.
아니, 턱없이 부족하다.
평상시의 나였다면 코웃음을 쳤을 정도의 격차.
그럼에도 저들의 공격을 온전히 피할 수 없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 이 와중에도 문득 뇌리를 스치는 어이없는 생각과 함께.
‘레벨 업 이거, 혹시 사지가 잘려나가도 회복시켜주나?’
그러나 다행히도, 청풍 같은 인간이나 좋아할 법한 불쾌한 첫 경험을 걱정할만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어디선가 울려 퍼진 엄청난 파공성이, 내가 품고 있던 우려를 한 번에 날려버렸으니까.
후우우웅!
그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를 향해 쇄도하던 적들의 어깨너머로 불쑥 솟구친 거대한 그림자와 함께, 그 명칭처럼 크고 아름다운 대초자곤(大梢子棍)이 벼락처럼 공간을 갈랐다.
콰드드득!
단 한 번의 빠따질로 머리통 다섯 개를 날려 보내는 광경을 보았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제는 각성자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현대식 메이저리그를 폭격할 저 특급 유망주의 이름도 알려줄 수 있다.
물론, 저 미친 떡대는 누가 말해주기도 전에 스스로 본인을 소개하겠지만.
바로 지금처럼.
“태산이! 왔다! 봤다! 때렸다!”
“잘했다! 자, 이어서 몸통박치기!”
그리고 카이사르 시저도 울고 갈 명언을 내뱉은 태산의 어깨에 걸터앉은 남호를 시작으로, 낯익은 얼굴들이 빛살처럼 튀어나왔다.
“공자님, 아니 은인! 아니 각주님!”
서걱!
트랜스포머도 한 수 접어줄 삼단 변화 호칭을 토해내며 적의 뒤통수를 쪼개는 주화란.
“갈! 네놈들이 감히 조장님을 해하려 하다니! 용기는 가상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이 몸, 조장님의 오른팔이자 심장! 바로 나 혁무……어어 시발!”
캉!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달려들다가, 예상외로 한 수 위인 적의 반격에 허겁지겁 물러나는 혁무진.
“그, 혹시 저 친구는 아가리를 여물고 싸우는 법을 모르나?”
“당신부터 여무시오.”
푸푹!
그런 혁무진을 구하며, 단숨에 남아 있는 적들을 베어내는 송일섬과…… 잠깐, 저 새카만 털북숭이 아저씨가 누구였더라.
“흑마칠종(黑馬七宗)?”
불현듯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네 글자에, 전직 마적 출신인 중년인이 가뜩이나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흑마가 아니고 백마! 백마칠종의 맏형 마중걸이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을 했는데 그걸 까먹……!”
“목소리 낮추세요. 좋게 말할 때.”
주화란의 스산한 경고에 입을 꾹 다무는 마중걸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냥, 보기 좋아서.
누구 하나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리고…….
이대로 영영 헤어질 줄 알았던, 마지막 한 사람을 볼 수 있어서.
“왔냐?”
내가 불쑥 던진 물음에,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사마표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많이 늦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