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62
1062화
제아무리 평탄한 인생을 살다 간다고 한들, 사람이라면 일생을 통틀어 최소 한 번쯤은 특정 부류의 미친놈을 만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객관적으로 보아도 상당히, 아니 매우 험난하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런 나조차도 대인(大人)이라 불리는 저 괴인만큼 순수한 의미로 미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미친놈 도감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나는 내심 중얼거리며 조금씩 멀어져 가는 대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개똥이라는 이름으로도 자신의 완전한 정체성을 찾지 못한 그는, 소와 말까지 두루 섭렵하며 기어코 똥 시리즈 삼부작을 완성.
직후 곧장 점순이로 성별 전환까지 시도하다가 적천강의 살해 협박을 받은 끝에 마방(馬房)들의 손에 끌려 격리조치 되고 있었다.
“노부의 모든 것을 걸고 말하는데…….”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마찬가지로 대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적천강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놈은 둘 중 하나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암천의 간자(間者)거나, 혹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놈이거나.”
자세한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만한 예측이었지만, 나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글쎄요, 간자는 아닐 겁니다.”
“저놈이 녕하성의 마방들을 이끌고 아군을 도운 것은 사실이나, 완전히 믿는 것은 금물이다. 네 녀석도 익히 알고 있지 않느냐?”
물론이다. 뒤통수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얻어맞았으니까.
태원진가의 대장로를 시작으로 오대세가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던 모용세가까지 암천과 손잡았던 마당에,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초절정 고수를 무작정 신뢰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못 믿을 것도 없죠.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근거?”
적천강의 반문에, 나는 미세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 시스템.
귓가에 닿는 짤막한 전음(傳音)에 일순간 크게 뜨이는 두 눈동자.
이 세상에서는 생소한 시스템이라는 세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내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던 적천강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녀석의 그 잘난 능력으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어떠하냐.”
“미친 사람입니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미친.”
“즉, 간자는 아니다?”
“예.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요.”
“굳이 수치로 말한다면?”
“구 할 구 푼 구 리. 물론 저 미친. 아니, 대인이 간자가 아닐 확률을 말하는 겁니다.”
“대인은 무슨, 그냥 정신 나간 놈이지.”
슬쩍 눈살을 찌푸린 적천강이 입맛을 다셨다.
“여하간 어울리지 않게 매사에 의심부터 하고 보는 네 녀석이 그리 말할 정도면 사실상 확신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럼 저놈이 진정 광증(狂症)을 앓고 있다고 보느냐?”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부분의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라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아니고서야 시시각각 뒤바뀌는 대인의 이름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시스템을 속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그러니 결국 답은 하나뿐이다.
개똥이건, 소똥이 말똥이 점순이건.
대인은 스스로를 그런 존재라고 굳게 믿었고, 시스템은 이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고로 그는 아주 순수한 의미에서 미친 사람이었다.
“만리추행(萬里追行), 그 왕초 거지 놈도 울고 갈 행색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아직 노환에 걸릴 나이는 아닌 것 같고……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인지 감도 안 잡히는군.”
천하의 개방 방주를 왕초 거지로 간단히 격하시켜 버린 적천강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로서도 당장 대인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 광활한 구주팔황(九州八荒)과 사해오호(四海五湖)에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속세와 동떨어진 심산유곡의 기인들, 스스로 잊히기를 택한 비밀 문파의 후인들.
혹은 세상 어디에선가 숨죽인 채 은밀히 살아가고 있을 도망자와 살인자들까지.
당장 눈앞의 적천강 역시 환갑 무렵까지 구화산(九華山)에 틀어박혀 무공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었으니, 대인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일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실제로 숭산결의(嵩山決意)를 통해 무림맹이 새롭게 창설된 이후부터는 적지 않은 수의 은거 고수들이 입맹하기도 했었고.’
물론 그들은 대인과는 달리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무림맹이 무슨 대학교 동아리도 아니고, 지금은 온갖 배신과 흉계가 난무하는 전시 상황이니까.
하지만 뭐랄까.
그 순간 불현듯 찾아온 어떠한 확신이, 이내 목소리가 되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대로 아군으로 받아들이죠.”
“뭐라?”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인은 암천의 간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확실히 아니에요.”
평소와 달리 굳건한 확신이 담긴 음성에, 적천강이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거참, 희한한 일이로군. 무엇이 너로 하여금 이토록 저 수상쩍은 미친놈을 신뢰하게 만든 것이냐?”
“그건…….”
나는 대답 대신 말꼬리를 흐렸다.
글쎄, 사실 잘 모르겠다.
시스템이 적아(敵我)까지 구분해 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대인을 향한 궁금증과 더불어, 이상하리만치 묘한 확신이 들었다.
저 정체불명의 초절정 고수가 결코 적이 아닐 것이라는, 나로서도 도통 근거를 제시할 수 없는 확신이.
‘……피로 때문인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문득 흔들리는 시야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나절에 걸친 전투로 인해 무수한 피와 시체로 뒤덮인 설원.
아주 잠시 찾아왔던 승리의 기쁨도 잊은 채 전장을 수습하는 사람들과 어느샌가 새카맣게 몰려와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 날짐승들.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어둡고, 그 아래 펼쳐진 땅은 온통 붉다.
흔들리는 시야에 담긴 그 세상은, 마치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미래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정말 이긴 게 맞습니까?”
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적천강이 대답했다.
“그래. 적어도 오늘만큼은.”
하지만 왜일까.
어째서일까.
일일이 셀 수도 없는 적을 쓰러트리고,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어 감숙성을 지켜 냈음에도.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음에도.
도무지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내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를 들으면서도.
띠링, 띠링, 띠링.
– 퀘스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임무 : 감숙성 일대의 모든 적 섬멸(완료).
– 퀘스트, [피의 길]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하셨습니다.
새로운 연계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변경된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Y / N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새카만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심호흡과 함께 몸속 깊숙이 스며드는 공기는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과연 나는, 언제쯤 이 광경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음을 지켜봐야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수락.’
빌어먹게도 잔인한 하루였다.
* * *
우둑, 까드드득.
잘게 흔들리는 흐릿한 촛불 너머,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몸부림치는 그림자를 말없이 주시하는 두 눈동자가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으나, 그럼에도 일말의 경멸과 혐오가 담긴 그 눈빛은 파육음이 그치고 난 후에도 여전했다.
조금씩 잦아드는 경련 속, 마침내 몸을 일으킨 그림자가 대뜸 불쾌감을 표시할 만큼.
“썅년이. 눈깔하고는.”
오랜만에 건네는 첫인사치고는 거칠었지만, 여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늘 스스로를 이성적인 사람이라 자부해 왔고, 한낱 짐승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기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설령 그렇다고 한들 고운 말이 나갈 수는 없었다.
“몸이나 닦아. 역겨운 냄새 풍기지 말고.”
“뭐? 역겨워?”
여인의 날 선 음성에, 뭐라 대답하려던 그림자가 문득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래, 분부대로 하지. 가뜩이나 심사가 불편하실 텐데. 안 그런가?”
“……또 무슨 헛소리를.”
“어울리지도 않게 모른 척은. 그러지 마. 괜히 추해 보이니까.”
스륵.
매끄러운 근육과 살결을 스치는 천.
촛불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전신 곳곳에 묻은 핏물을 닦아 낸 그림자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
“전해 듣기로는 거의 실패 직전까지 갔다던데…… 어때, 이 빌어먹을 계집아. 지난번에는 그렇게 비웃더니, 막상 직접 겪어 보니 쉽지 않지?”
여인, 대술사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로서도 별다른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쉽사리 끝나지 않는 대술사의 침묵에, 크게 소리 내어 웃은 그림자가 재차 말을 이었다.
“훨씬 더 신중했어야지. 네년이 뒈지는 거야 뭐 상관없지만, 하마터면 대계(大計)에 큰 지장이 갈 뻔했으니까.”
계속되는 비아냥에 미간을 좁힌 대술사가 대꾸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글쎄, 그때와 비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 않나? 나는 고작해야 머저리 몇몇으로 중원 한복판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는데, 이건 실눈을 뜨고 봐도 경우가 다르지.”
저벅.
놀리듯이 낄낄 웃은 그림자, 아니 혈주(血主)가 흐릿한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며 덧붙였다.
“거기에 더해서, 중요한 물건까지 챙겨야 했고.”
온 천하를 뒤흔들었던 소림혈사(少林血史) 이후, 두 번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넓은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족히 수백 여년은 될 법한 기나긴 세월의 흔적과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태사의에 앉아, 비스듬히 턱을 괸 채 대술사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일국의 군주라도 된 것처럼.
“흠. 뭐 지난 얘기는 여기까지 하자고.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고 미래니까. 안 그래?”
이번에는 대술사가 실소를 흘릴 차례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녀는 태사의에 앉은 혈주를 응시했다.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지 마. 넌 멍청한 짐승, 아니 괴물이나 다름없으니까.”
“괴물이라, 어차피 중원 놈들이 보기에는 피차일반 아닌가?”
“달라. 함께 그분을 모신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우리 중 그 누구도 네놈과 같을 수는 없지.”
그러나 경멸이 담긴 음성에도, 혈주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아. 처음으로 옳은 말을 하는군.”
“……뭐?”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대술사가 당황하던 그때, 피처럼 진한 미소가 혈주의 입가에 떠올랐다.
“당연히 같을 수는 없지. 네년을 포함한 그 누구도, 나만큼의 전공을 세운 적은 없었을 테니까.”
그는 즐겁게 웃으며 태사의를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태사의의 일부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음각된, 곤륜(崑崙)이라는 두 글자를.
휘우우우.
굽이진 산봉우리를 스치며 휘몰아친 눈바람이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한 그곳, 태청전(太淸殿)으로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