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64
1064화
만약 조금이라도 발견이 늦었더라면 그 전서응(傳書鷹)은 그대로 모두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비록 전서구보다 훨씬 철저한 훈련과 관리 끝에 길러진 전서응이라 할지라도, 결국 정해진 목적지를 오가도록 훈련받았을 따름이니까.
그러나 진태경을 비롯한 극소수의 인물들은 간발의 차로 전서응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고, 그중에는 궁성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활을 다룸에 있어서만큼은 천하제일, 아니 어쩌면 고금제일이라 칭해도 좋을 신궁(神弓)이.
스르릉, 철컥.
순식간이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이음새가 맞물리는 소음과 함께, 기형적으로 휘어져 있던 두 자루의 곡도(曲刀)를 활로 변모시킨 궁성이 망설임 없이 시위를 당긴 것은.
“지금!”
진태경의 외침이 들린 순간, 궁성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았다.
펑!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공기.
소리조차 앞질러 쏘아진 빛줄기가 마침내 아득한 하늘 위의 점처럼 보이던 전서응에 닿은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한 진태경이 신형을 날린 것 역시도.
쐐애애액!
한 줄기의 바람이 되어 나아가는 신형.
그리고 단숨에 수십여 장의 거리를 주파한 진태경이 내뻗은 손끝에는, 날개를 관통당한 채 추락한 전서응이 있었다.
삣. 삐잇.
“침 바르면 금방 나아. 인마.”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구슬프게 우는 전서응의 부리를 쓰다듬어 준 진태경은 서둘러 녀석의 발목을 확인했다.
‘이건.’
작게 돌돌 말린 채, 전서응의 발목에 단단히 묶여 있는 전서(傳書)를 본 진태경은 침음성을 삼켰다.
내용을 보기도 전에 엄습해 오는 불길함.
틀림없다.
전서 곳곳에 묻어 있는 저 붉은 무언가는, 필시 누군가의 몸속에서 흘러나왔을 피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았을 때, 이런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곤륜(崑崙), 함락(陷落).
거친 필체로 휘갈겨 쓴 전서의 첫 줄을 읽는 순간, 진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 * *
곤륜산맥(崑崙山脈).
청해(靑海)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 거대한 산맥은 실로 아득한 역사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원과 사막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는 그 길이만 수천 장에 달하며, 그에 못지않은 해발고도 역시 최고봉(最高峰)이라는 표현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을 정도.
그러나 곤륜산맥이 천하 무림인들에게 있어 유독 상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가(道家) 무학의 발상지이자, 뿌리 깊은 역사를 지닌 곤륜파의 존재만큼이나 결정적인 이유가.
“결국, 반드시 지켜야 할 관문이 뚫렸군.”
적천강은 씹어뱉는 듯한 말투로 뇌까렸다.
꽉 쥐어진 그의 손아귀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전서가 구겨져 있었다.
“여기에 적힌 내용대로 놈들이 곤륜을 점령했다면, 사실상 이미 청해 땅의 절반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
나직하게 이어지는 음성에, 사람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천강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곤륜산맥 일대는 대부분 분지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청해성 면적의 절반에 달할 만큼 광활했으니 이는 곧 아군에게 있어 지배권 상실로 이어졌다.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나겠군. 안 그런가, 할망구?”
적천강이 대뜸 던진 물음에 궁성이 미간을 좁혔다.
“당신에게 들을 말은 아니죠. 그게 나이든, 정마대전 당시의 불쾌한 기억이든 간에.”
“그래서, 정마대전 초기 때는 어땠나? 마교 놈들이 곤륜을 넘었을 때 말이야.”
“예기치 못한 기습이었어요. 정마대전 이전까지 마교의 마지막 침공은 이미 수백 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그마저도 곤륜산맥을 넘지 못하고 참패했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인간이란 늘 가지지 못하는 것에 집착하는 동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십여 년 전,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한 마교를 일구어 냈던 천마(天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곤륜파가 며칠을 버텼다고 했지?”
“사흘. 정확히 사흘 밤낮을 싸운 끝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퇴각했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십만 명이나 되는 마교 잡놈들을 상대로 사흘이라. 오래도 버텼군.”
저건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곤륜파는 어쩔 수 없는 지리적 한계와 까다로운 문규(門規)로 언제나 소수의 제자만을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구파일방 중에서도 제자들의 숫자가 가장 적었다.
다만 개개인의 뛰어난 실력과 대설산조차 비교할 수 없는 곤륜산맥의 험난함으로 수차례에 걸쳐 마교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었을 뿐.
하지만 그런 곤륜파에게도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반세기 전의 정마대전 때도.
이번에도.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난 정마대전 당시 개전과 동시에 마교를 상대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곤륜파가 이번에는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망설임 없이 곧장 퇴각을 결정했으니. 그렇지 않으냐?”
적천강이 불현듯 던진 물음에,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놈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건 미친 짓이에요.”
마교와 암천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병력의 질이나 숫자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암천이 지닌 어둠은 모두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아득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 정확한 크기와 깊이를 짐작하지 못할 만큼.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만약 정마대전 때처럼 결사 항전을 각오했다면, 곤륜파는 이미 세상에서 지워졌겠죠.”
어쩌면 곤륜파로서도 이것이 가망 없는 전투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물경 이만에 달하는 청해 무림인들과 관군들까지 합류한 상황에서, 그토록 신속한 퇴각을 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전서에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일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적혀 있었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 대부분의 병력을 보존한 상태로 청해호(靑海湖)까지 물러났다고 하니, 아직 청해 땅을 완전히 빼앗긴 것은 아닐세.”
공동파 장문인, 현천진인이 불쑥 꺼낸 말에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청해성에 남아 있는 전력으로는 막아 낼 수 없어요.”
“그건.”
“놈들에게는 마, 아니 믿기 힘든 위력을 지닌 사술(詐術)이 있습니다. 당장 곤륜산맥을 점령한 암천의 병력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고요.”
이건 단순한 비유나 표현이 아니다.
나는 조금 전 사로잡은 전서응이 지녔던 전서에 적힌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었다.
신속한 퇴각을 결정하며 날려 보낸 전서에, 곤륜파의 장로는 이렇게 써놓았다.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수많은 적들이, 산맥을 메우며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 압도적이면서도 무시무시한 광경을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수십여 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노라고.
“……십만마도(十萬魔道).”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침음성에 일순간 공기가 무거워졌고,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피부로,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은 암천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부리는 것을 보고 겪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식을 송두리째 허물어트리는 그 광경을 보며, 절망과 패배감에 휩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무려 십만이다.
설령 전서를 작성한 곤륜파의 장로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더라도, 과거의 십만마도를 떠올릴 정도의 병력이라면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아는 누군가도 포함되어 있겠지.’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이 불현듯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대마도사.
아니, 대술사(大術士).
비록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며, 그렇다면 분명 지금쯤 청해에 있으리라는 것을.
‘청해가 무너지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다.’
단지 청해라서가 아니다.
이번에 가까스로 지켜낸 감숙 역시 청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다.
천하는 하나의 거대한 댐이고, 댐을 무너트리는 것은 작은 균열과 그로 인한 틈새니까.
‘시간이 필요해.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더 큰 피해 없이 놈들을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이.’
엄습해 오는 두통.
하지만 이번에도 시간은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간이 아닌 시스템이.
‘로그아웃.’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아 조심스럽게 마음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곧이어 돌아온 시스템의 반응은 담담하면서도 냉정했다.
삐빅.
–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에 일순간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개 같은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미 무림에서만 꼬박 몇 달의 시간을 보내고, 수차례씩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었던 나다.
그런데 시스템은 어느샌가부터 굳게 문을 걸어 잠근 채 열어 주지 않았다.
그저 현대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문을 가로막고, 새로운 퀘스트와 가혹한 현실만을 강요할 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길고도 잔혹했던 대설산에서의 전투를 마무리 지었을 때와 같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진행 중인 연계 퀘스트, [청해성으로]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으득.
허공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을 바라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삼켰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으로, 새로운 퀘스트의 제목으로 단서를 적선하듯 던져준 시스템을 저주하며 입을 열었다.
이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홀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던, 어느 정신 나간 인간에게.
“길잡이 해 준다고 했죠?”
“으, 응?”
그제야 부스스 눈을 뜬 대인이,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졸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그랬던 것 같긴 한데…… 그래서 어디로 갈지는 정했나?”
“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이 순간 나를 포함한 모든 이가 잠시 멈춰 서 있던 이곳은 기련산맥이라 불리는 장소였고, 며칠 간의 이동 끝에 다다른 산맥의 끝자락에는 새로운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해(靑海)라 불리는, 낯설면서도 위험한 땅이.
“갑시다.”
내 나직한 한 마디에, 사람들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