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7
#106화
“같이 가요. 항산검문.”
“네?”
“진 공자가 들은 그대로예요. 나도 항산검문에 볼일이 있거든.”
“무슨 일로요?”
“그건 말 못 할 것 같은데? 나도 공과 사가 뚜렷한 편이라서.”
되로 주고 말로 받았군.
방금 내 입으로 한 말이 고스란히 돌아온다. 머쓱해하는 나를 보는 월화의 미소가 짙어졌다.
“장난이에요. 마침 항산검문 쪽에 받을 게 있거든요. 정확히는 태원진가에서 받기로 한 거지만.”
“무슨…… 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항산검문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태원진가와 하오문이 맺었던 밀약.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항산검문이 소유한 부지 등에 대한 소유권을 받기로 약속했던가?’
하오문은, 아니 월화는 약속을 지켰다. 개전 초기 항산검문의 선봉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원진가는 그 후에도 하오문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고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진 공자도 알다시피 우리 입장이 좀 묘하게 됐어요. 전쟁에선 이겼는데 전리품에 손을 못 대고 있는 상황이라.”
약육강식.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건 무림의 법칙이다.
그러나 대장로의 등장이 모든 걸 망쳤다. 태원진가와 항산검문이 그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부터 전리품을 취할 명분이 희미해진 거다.
‘그래서 합병을 진행하는 거고.’
지금은 검을 거두고 붓으로 대화를 나눠야 할 때다. 세상 사람들이 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조용히, 원만하게 흡수하는 것이 진위경이 그리는 그림이다.
월화는 그 전에 보상을 받기를 원하는 거고.
“항산검문 측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때 보상을 요구해도 될 텐데요.”
“그건 태원진가가 산서성의 맹주(盟主)가 아닌 패자(霸者)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예요. 지금 상황에서 섣불리 뺏으려 하다가는 다른 중소 문파들도 발을 빼겠죠. 더군다나…….”
순간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뭐지?
“더군다나, 뭐요?”
“아니에요. 뭐, 아무튼 소가주님께도 제안을 받긴 했어요.”
월화가 곰방대를 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약속했던 것에 상응하는 재물, 혹은 태원진가가 관리하는 구역을 양도해 주시겠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싶지만 개인이 아닌,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르다.
‘활동 영역을 확대하고 싶은 거겠지.’
월화의 본질은 기녀도, 객잔의 주인도 아닌 정보 상인.
이번 기회에 항산검문의 차단으로 비교적 약세였던 산서성 북부까지 하오문의 영향력을 넓히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진위경이야 당연히 태원진가가 산서성 전역을 아울렀으면 하는 마음일 거고.’
이미 오래전부터 산서성 중남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태원진가다. 알짜배기 구역을 몇 개 넘겨준다고 해서 지금까지 쌓아 올린 영향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거 딱 그거네. 재개발 구역.’
북부를 꽉 잡고 외부 세력의 유입을 막던 항산검문이 무너지고 있다. 그린벨트가 해제되고 재개발 구역이 되니 진위경과 월화 간의 밀고 당기기가 시작된 거다.
‘둘 다 장난 아니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경쟁자가 됐다.
사람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다시 한번 느낀다.
“그래서 우리 귀여운 신임 문주님도 뵙고, 빚 독촉도 할 겸 항산검문까지 동행하려고 하는데…… 어때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와, 너무 단호한 거 아니에요? 거래 조건도 듣기 전에 칼같이 잘라 버리네.”
“아우가 돼서 형님 앞길에 똥물 뿌릴 순 없죠.”
피 한 방울 안 섞인 형제지만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의 존재를, 이 무림을 받아들인 지 오래다.
“흐음.”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월화가 곰방대를 탁 내려놨다.
“그렇게 해요, 그럼.”
“아, 예.”
몇 번 더 꼬드길 줄 알았는데 바로 포기하네.
뭐, 나로서는 이야기가 빨리 끝나서 마음 편하다.
“그럼 이만.”
아직도 입을 봉인한 채 앉아 있는 혁무진을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월화가 묘한 웃음을 짓곤 말했다.
“아, 진 소협한테 전해 줄래요? 후원에 있는 노송(老松), 그거 비싼 거니까 수련 좀 조심히 해 달라고.”
산서성 제일의 정보 상인이 운영하는 객잔이다. 이곳에 들어온 후부터 내부 장기까지 훤히 읽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그러죠.”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 우리 진 공자님 부탁인데 뭐든 다 구해 드려야지.”
눈을 찡긋거리는 그녀를 일별하고 방을 나오자마자 잠시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무진아, 넌 왜 그렇게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니?”
빡! 빡! 빡!
“악, 악, 악!”
한 명은 때리고, 한 명은 맞고.
그렇게 돌아온 별채에서는 반듯하게 잘려 나간 노송 몇 그루와 흡족한 얼굴의 진무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는 맛이 있군.”
“…….”
“…….”
언젠가 저놈을 베어 버리고 싶다.
* * *
고요해진 객실. 한동안 곰방대만 피워 물던 월화가 입을 연 것은 진태경이 떠나고 한참 후였다.
“내가 일전에 지시한 거, 알아봤어?”
객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오문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흘 전에 확인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추가 정보를 수집하고는 있습니다만…….”
“더 나올 게 없다?”
“예, 희박합니다.”
“희박? 그럼 가능성이 없진 않네? 계속 파. 시간 넉넉하게 줄 테니까 서두르지 말고. 지금 태원진가 건드렸다가는 우리도 좋은 꼴 못 보는 거 알지?”
“존명.”
물러가려는 하오문도를 붙잡은 건 이어지는 월화의 한마디였다.
“삼류 망나니가 불과 두 달도 안 돼서 산서잠룡이 됐어. 네 생각은 어때?”
“가능합니다. 소문대로라면.”
“아, 그거.”
월화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진태경이 일문일살 조필을 쓰러트린 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다.
지금까지 진태경이 보인 모습은 모두 위장이었고, 사실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전폭적인 지원 아래 무공을 익혔다는 소문.
이제는 산서성 전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진 이야기다.
“그걸 믿니?”
“황당무계한 헛소문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멍청해서가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산서는 이미 중원에서 취급도 안 해 주는 변방이지만 하오문은 끊임없이 정보를 모아 왔다.
산서성의 유력가인 태원진가의 직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한 실수라고는 혼란스러웠던 전란(戰亂)의 시기에 활동했던 대장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뿐.
그러나 진태경에 관한 정보는 완벽에 가깝다.
“술, 여자, 도박. 어린 시절부터 나태했고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 태원진가 역사에 저런 자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 년 전, 지부장님께서 부임하시자마자 내린 첫 지시도 그것이었죠.”
“맞아. 산서 전체 동향 파악. 그리고 진태경 집중 조사.”
본디 재능은 대물림되는 법이다. 태원진가의 직계는 대대로 뛰어난 무재(武才)의 소유자들이었고 기인이라 평가받는 현 가주와 두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진태경의 존재는 이질적일 만큼 눈에 띄었고, 그래서 하오문은 조사에 착수했다.
“결과는 허무했지.”
“정말 보이는 그대로 나왔습니다.”
가문의 핏줄 덕분인지 근골과 근맥이 약간 뛰어나다는 것 빼고는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때 뭔가 놓쳤던 걸까?”
“이틀에 한 번꼴로 기루에서 자고 가던 놈입니다. 잠을 줄여 가며 익혀도 부족한 것이 무공이지 않습니까?”
“알지, 잘 알지.”
월화는 일류 중에서도 제법 완숙한 경지까지 무공을 익힌 사람이다. 그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답답함에 연신 곰방대만 빨아들이던 그녀가 긴 숨을 토했다.
“결국 답은 하나뿐이네.”
“그렇습니다.”
진태경이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삼류에서 초일류의 고수가 되었다는 것. 월화는 스스로 내린 결론에 기가 찼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까 내린 지시는 없던 걸로 해.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도, 알려고 하지도 마. 혹여나 입에 올리는 일 없도록 함구령 내리고.”
“존명.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내일 일찍 떠날 테니까 준비해 둬.”
“누구를 데려가실 생각인지.”
“나 혼자.”
“지부장님, 그건…….”
“명령이야.”
“……존명.”
수하가 물러나자 객실에는 적막이 내리깔렸다. 월화는 까맣게 타 버린 담뱃잎을 털며 생각했다.
‘진태경이라.’
지금까지의 행보가 모두 사실이라면, 항산검문에게서 얻어 내야 할 북부 이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금을 통틀어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 이가 있었을까?’
진태경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다음 날 아침.
문제가 터졌다고 느낀 건 별채를 담당하는 책임자를 만난 후부터였다.
“숙박비 스물다섯 냥, 음식값 다섯 냥, 그리고 기물 파손비로 오십 냥. 총합 은자 여든 냥입니다.”
어제 마적 놈들을 주머니를 털었다며 희희낙락하던 혁무진이 입을 딱 벌렸다.
“기물 파손? 은자 오십 냥?”
“후원에 가 보니 노송 다섯 그루가 쓰러져 있더군요.”
월화가 비싸다고 했던 그 나무다.
나와 혁무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진무경이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
“검을 펼치다 보니 흥에 취했다.”
“……아니, 시바. 흥에 취하면 걸리는 거 다 잘라도 되는 거야? 어?”
“후우우.”
혁무진은 뭐라 말은 못 하고 분노의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척 보아하니 내야 할 돈이 경비를 초과한 게 분명하다. 그래도 약간 정도라면 잘 말해서 협의점을 찾을 수도…….
“무진아, 지금 얼마 있냐?”
“사십 냥이요.”
협의점은 염병. 턱도 없네.
“혹시 외상 됩니까?”
별채 책임자의 입가에 맺혀 있던 상냥한 미소가 사라진 그 순간이었다.
“진 공자, 여기서 뭐 해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하늘하늘한 궁장 차림의 미녀.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월화의 등장은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어젯밤 그녀의 제안을 단호하게 제안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
“아니, 그게요…….”
사정을 설명하자 월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든 냥?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죠? 좀 잘못된 것 같다니까요.”
“그거 이리 줘 봐.”
책임자가 들고 있던 죽간을 건네받아 읽기 시작하는 그녀.
점점 눈살을 찌푸리는 걸 보니 계산이 단단히 틀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럼 그렇지.’
이윽고 죽간을 모두 읽은 월화의 입술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 똑바로 안 해?”
“죄, 죄송합니다.”
“이분들이 어떤 분들이신데 감히 이따위 짓거리를…… 가격 똑바로 적어.”
혁무진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천만다행이네요.”
“그러게. 접시 닦고 갈 뻔했네.”
“이공자님 때문에 뭔 고생입니까, 이게.”
“저 인간 얘기는 꺼내지도 마. 듣기만 해도 암 걸려.”
“암이 뭔데요?”
“……있어, 안 좋은 거.”
그사이 진땀을 흘려 가며 가격을 고친 책임자가 허리를 푹 숙이며 우리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혁무진이 거만한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쇼. 상대를 봐 가면서 장난을 쳐야지. 그래서 얼마요?”
“은자 백오 냥 하고도 철전 이십삼 냥입니다.”
“……?”
“……?”
뭐야, 이거. 꿈인가?
고개가 저절로 월화를 향해 돌아간다.
“무슨 소리예요, 저게?”
“내 지인이라고 멋대로 가격을 깎았더라고요. 감히 대태원진가의 자제분들을 뭘로 보고. 다시 한번 사과드려.”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그…….”
나는 잔뜩 목멘 목소리로 물었다.
“외상은 되죠? 당연히.”
“안 되죠. 당연히. 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번 기회에 선례를 남기는 건 어떨까요?”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 다음 기회를 노려 봐야죠.”
월화가 화사한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하, 항산.”
“뭐라고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항산검문까지 같이 가실래요?”
“와아, 저야 좋죠.”
저 가증스러운 웃음이라니. 월화의 손짓에 책임자가 죽간을 들고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앞으로 여비 걱정은 없겠네요.”
혁무진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결사반대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헛소리! 가문의 임무를 수행하는 길에 어찌 여인을 데려간단 말이냐!”
“그럼 여기서 그릇 닦고 오든가.”
“…….”
“이 중에서 노송 자른 사람 손?”
진무경은 손을 들지 않았고, 월화는 그에게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진 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