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70
1070화
감각이란 곧 정보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오감(五感)을 통해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낌으로써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이건.’
그 감각은 초대받지 않는 사람처럼 불현듯 찾아왔고, 나는 호흡마저 삼키며 어딘가를 응시했다.
고작 십여 장 밖의 사물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너머를.
그러나 무공의 향상은 감각의 발달을 의미하고, 체내에 축적된 수 갑자의 공력은 그 발달된 감각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에 차고 넘친다.
“아직 벗지 마라.”
“……!”
단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일순간 크게 부풀어 오른 정호군의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했으니.
그리고 나와 거의 동시에, 아니 분명 그보다 미세하게 앞서 이변을 알아차렸을 궁성과 적천강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삼백여 장 밖. 먼지구름.”
“지금껏 상대했던 놈들과는 다르군. 다들 각오하거라.”
궁성이 보고 들은 것을 말했다면, 적천강은 자신의 짐작을 입에 담았다.
나 역시도 느끼고 있던 불길한 짐작을.
드득, 드드득.
지면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진동.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다.
세 번에 걸쳐 맞닥트린 추격대와 달리, 이번의 울림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었다.
‘뭐지?’
머릿속 의문과 함께 더욱더 감각을 극대화시키자, 비로소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쿵. 쿠궁.
쉼 없이 이어지는 잔 떨림 사이에 드문드문 스며 있는 울림.
아니.
‘굉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서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저 굉음은 한낱 인간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그러나 결국 현실로 나타나고야 말았던 저주받은 괴물들의 전유물이다.
쿠우우웅!
성큼 가까워진 울림이 땅을 뒤흔들고, 야트막한 언덕 위로 또 다른 어둠과 악취가 덧씌워진다.
그리고…….
– 그. 아. 아. 아.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느릿하면서도 음산한 포효와 함께 언덕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몬스터(Monster)가.
* * *
그 저주받은 괴물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순간, 삼천여 명의 사람들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충성심으로 무장한 금의위도.
사파 무림에서 활동하며 산전수전을 겪어 왔던 흑룡마문의 무인들도.
긴 세월 도가(道家)에 몸담아 정순하게 심신을 갈고닦은 종남과 공동의 제자들도.
무공의 고하도, 강호의 경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의미했다.
그들을 강타한 거대한 충격에는 무공의 고하도, 나이와 경험에 의한 경륜도 소용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당연했다.
‘도대체…… 저게 뭐지?’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낸 괴물을 확인한 순간, 모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거대했고, 그저 거대했다.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척(尺)이라는 단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비단 그들이 아닌 천하의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경 이 장에 달하는 높은 키와 아름드리나무 같은 몸통을 지닌 저 괴물을 보았다면.
– 그. 아. 아. 아.
거대한 구멍이, 아니 괴물의 입이 열리자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포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느린, 그래서 더욱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괴성과 함께 쏟아진 바람에는 끔찍한 악취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공포.
그것은 공포였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감정인 동시에, 어느 괴물들에게 있어서는 탄생과 함께 부여된 권능.
공포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기에, 다른 세상의 이들이 그 의미 그대로 피어(Fear)라 부르는 그 힘.
우우우웅.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공기와 어느덧 흐릿해져만 가는 시야를.
그리고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신들의 두 다리를.
“워, 원시천존이시여…….”
어느 도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외마디 신음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괴력난신(怪力亂神)?
불가해(不可解)?
아니다. 틀렸다. 부족하다.
도대체 어떤 표현과 단어로 지금 이 상황을, 저 괴물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어찌하여 그들이 따르는 신이, 정녕 저토록 저주받은 존재를 이 땅에 허락했단 말인가.
불과 며칠 전, 대설산의 광활한 설원을 새카맣게 뒤덮었던 그 무수한 암천의 교도들조차 이 정도의 공포를 심어 주지는 못했다.
금의위들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동천마군의 방울 소리를 따라 황실의 대연회장을 피로 물들였던 강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그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니까.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지언정, 본래의 형태는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꿈. 그래. 꿈이 분명해.’
제자리에 얼어붙은 사람들은 아득하게 물든 시선으로, 마침내 언덕 위에 우뚝 선 괴물을 바라보았다.
감히 추측할 수조차 없는 까마득한 과거.
한 자루의 도끼를 휘둘러 세상을 열었다는 태곳적의 거인, 반고(盤古)가 실재한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물론 구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반고의 장엄한 신화와 달리, 저 괴물은 누군가의 악몽에서 끄집어낸 것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쿠웅. 구구구궁!
단 한 걸음.
그러나 결코 ‘고작’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괴물의 무거운 발걸음에, 야트막한 언덕이 단숨에 허물어지는 광경을 본 이들은 끝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 그들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심장을 힘주어 터트리는 듯했다.
바로 다음 순간, 어디선가 터져 나온 눈부신 섬광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화아아악!
일순간, 캄캄했던 어둠이 갈라졌다.
어둡지만 밝고, 밝지만 어두운 검푸른 기운을 따라 공간이 일그러졌다.
빛도, 어둠도 아닌 무언가.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화염이었다.
어둠과 빛 모두를 간직한,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정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대한 겁화(劫火).
그리고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나아가는 그 화염의 끝자락에는, 이제 막 언덕을 넘어 걸음을 내디딘 거대한 괴물이 있었다.
– 그. 아. 아!
사방을 떨어 울리는 포효.
그와 동시에 통나무만큼이나 두꺼운 팔이 압축된 공기를 터트리며 화염을 향해 휘둘려졌다.
아니.
정확히는 화염이 깃든 창과 한 몸이 되어 쏘아지고 있는, 작고 초라한 한 인간을 향해.
후우우웅!
끔찍하리만치 거센 파공성.
그러나 엄청난 거력(巨力)이 실린 주먹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은 허공의 계단을 밟으며 괴물을 향해 쇄도하는 진태경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아가는 발걸음도, 그에 따라 쏘아지는 신형도.
그리고.
군청색의 화염이 깃든, 은백색의 창날도.
스륵.
돌연 부드럽게 움직이는 창날을 따라 일렁이는 화염.
그 안에 담긴 강대한 열기를 따라 공간이 일그러지는 광경은, 마치 한 마리의 화룡이 움직이는 것과 닮아 있었다.
머나먼 과거, 열화문의 옛 사조가 고심 끝에 창안한 창술의 어느 초식명 그대로.
‘화룡일미(火龍一尾).’
그렇게 허공을 유영하던 화룡의 꼬리가, 괴물의 주먹과 마주친 그 순간.
서걱!
지상의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예리한 절삭음과 함께, 주인의 몸뚱어리에서 분리된 거대한 살덩어리를.
그리고 그것은 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 어?
괴물은 의문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의 거대한 주먹을, 정확히는 주먹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핏물이 몽글몽글 맺히기 시작한 그 예리한 단면을.
푸화아악!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피분수. 뒤늦게 찾아온 고통과 아직 해결되지 못한 의문에 휩싸인 괴물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몸부림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직 일점(一點)을 향해 나아가는, 눈부신 속도의 창날을 인지하지 못한 채.
푸욱.
괴물은 느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만큼 뜨겁고, 한편으로는 몸서리칠 정도로 차가운 무언가를.
정확히 목줄기를 파고든 그것은 괴물이 막 토해 내려던 괴성을 틀어막은 채,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불길을 쏟아 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괴물의 시야를 가득 채운, 한 사람의 눈동자처럼.
“이건 트롤도, 오우거도 아니고…… 너, 도대체 뭐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러나 지능이 낮은 괴물로서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진태경은 혼란에 물든 괴물의 커다란 눈동자를 통해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렇겠지. 딱 그 정도까지만 허락된 거겠지. 네게는.”
몬스터의 지능은 곧 힘과 비례하는 법.
작게 중얼거린 진태경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창날에 가로막혀 어떠한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서서히 꺼져 가는 눈동자로 눈앞의 인간을 응시하는 그것의 모습에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널 탄생시킨 거지?”
그건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진태경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거인의 어깨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적들을 향한 물음이었다.
쿠웅! 구구구궁!
짙은 어둠을 망토처럼 두른 채 파도처럼 밀려오는 크고 작은 그림자들.
잘게 떨렸던 대지는 이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뒤흔들리고 있었고, 이는 비단 한 방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드드득.
수십여 장 앞까지 다가온 적들이 일으키는 거대한 굉음의 틈바구니에 숨어 전해지는 미세한 울림들.
어느덧 저 멀리, 사방에서 겹겹이 전해지는 그 크고 작은 진동을 느낀 진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천라지망(天羅地網).”
틀림없다.
어느샌가 그들은 포위되었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그리고 이것이 지능이 낮은 몬스터들 따위가 갖출 수 있는 포위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태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짤랑. 짤랑.
바람을 타고 곳곳에서 전해지는 희미한 방울 소리를 들으며, 진태경은 깊게 박힌 창날을 비틀었다.
콰득, 푸화악!
단말마도 없이 숨이 끊어진 괴물의 신형이 허물어지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핏물이 터져 나와 옷깃을 적셨다.
하지만 진태경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밤이 지나도록, 어쩌면 앞으로 며칠이 지나더라도 수도 없이 놈들의 피를 뒤집어써야 할 테니까.
그래야만 이 끔찍하리만치 촘촘한 그물망을 찢고 동쪽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다들 봤지? 이 새끼들 좆도 아닌 거.”
진태경은 모두를 향해 말했다.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다. 남은 길은 오직 맞서는 것뿐이다.
“가자.”
낮게 가라앉은 그 한 마디와 함께, 삼천여 개의 병장기가 적들을 향해 겨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