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75
1075화
간혹 잠시 미뤄 두었던 인연들이 한 번에 밀려올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무림 말학 궁기방, 여러 대선배님들을 뵙습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달려온 궁기방의 씩씩한 인사에, 내가 모두를 대표하여 준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개방의 후개(後丐)인가. 그래, 반갑다.”
“…….”
“나는 진태경이라고 한다. 나이도 비슷하니 앞으로는 편하게 어르신이라고 칭하도록.”
“……여전하군. 여전해.”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에 더해 똥 씹은 표정까지 짓는 녀석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연히 여전해야지.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됐다는 뜻이니까.”
“그, 원래도 멀쩡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누구보단 훨씬 나았어.”
“도대체 어느 부분이?”
“워낙 많지만, 우선 생겨 먹은 것부터가 수준이 다르잖아.”
“빌어먹을,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군.”
한숨을 푹 내쉰 궁기방이 이내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여전해서.”
나도 녀석을 따라 웃었다.
여전하다는 그 한 마디가, 퍽 듣기 좋아서.
그리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 * *
궁기방과 개방의 제자들은 우리를 모닥불 근처로 이끌었다.
비록 사방에는 한겨울처럼 싸늘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곧 곳곳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모닥불의 열기는 추위를 잊을 수 있을 만큼 따뜻했고 지칠 대로 지친 아군들의 허기와 기력을 채울 건량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물론. 감숙성에서 지원군이 오리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으니까.”
궁기방이 육포를 건네며 덧붙였다.
“그 지원군이 기련산맥을 가로질러 오는 미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나? 곤륜파에서 보낸 전서(傳書)의 내용만 보면 한시가 급해 보였는데.”
“아니,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실은 우리도 고작 며칠 전에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됐거든.”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궁기방의 이마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명백한 전투의 흔적.
밝은 표정과 목소리를 하고 있지만, 녀석 역시 최근 생사를 오가는 격전을 치렀음이 확실했다.
“아, 이거?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다. 살아남았으니 된 거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분위기를 잡는 궁기방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은 내가 대답했다.
“응. 확실히 별거 아니긴 하네.”
“…….”
“왜?”
“딱 한 번만 맞아 줄 수 있나?”
“음. 정중하게 부탁한다면 가능할지도.”
“그렇다면 맞은 이후의 보복은?”
“아, 사람을 뭐로 보고. 당연히 있지. 죽기 직전까지 팰 거야.”
“……내가 사람을 아주 정확히 봤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궁기방이 말을 이었다.
“여하튼 끝까지 최후방에 남아 있던 것치고는 아주 싸게 먹힌 거다. 물론 그것도 때마침 시의적절한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궁기방의 모습에, 말없이 육포를 씹고 있던 살성이 입을 열었다.
“전부 네 녀석의 운이다. 때마침 우리가 주위에 있었으니.”
“처음에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대협께서 청풍 소협과 함께 청해에 머무르고 계실 줄은…….”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목적을 이루기 어려워지는 법이지. 그리고 나는 대협이 아니다.”
그 말은 즉 아군에게도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는 뜻.
담담하게 대답한 살성을 향해, 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희가 남만야수궁으로 떠날 때부터 줄곧 이곳에 머무르고 계셨던 겁니까?”
“글쎄, 줄곧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폐가 있군. 우리는 불과 한 달 전쯤에야 청해성에 도착했으니까.”
나는 지나간 시간과 기억을 더듬었다.
살성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나와 청풍을 중심으로 한 이룡각(二龍閣)이 창설된 직후, 남만으로 떠날 무렵.
그렇다면 청해성에서의 한 달을 제외하더라도 지난 몇 달간 그 또한 청풍과 함께 모종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뜻인데…….
‘왜 그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지?’
희한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과 헤어진 이후에도 남만야수궁을 시작으로 여러 굵직한 사건들에 개입해 왔고, 그럴 때마다 매번 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니까.
발이 없어도 수만 리 너머까지 뻗어 나가는 것이 바로 소문이다.
그런데 지난 몇 달의 시간 동안, 나는 살성과 청풍의 행보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살성 역시,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바로 다음 순간,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씹고 있던 육포를 뱉었으니까.
“질기군. 근처에서 잠시 쉬고 있을 테니 찾지 마라.”
비록 어떤 직접적인 언급도 없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한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언제나 비밀이 많은 놈이군. 저러니까 사람들한테 성질 더럽다는 소리를 듣지.”
멀어지는 살성의 뒷모습을 향해 작게 혀를 차던 적천강이 내 표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그 썩은 눈빛은?”
“……제가 뭘요.”
“해명해라.”
“그, 아닙니다. 스스로가 더 잘 아시겠죠.”
“무슨 의미지?”
곤궁에 처한 나를 대신해, 모닥불 근처에 앉아 노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풍이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적 할아버지께서도 만만치 않게 성질이 더럽다는 뜻 아닐까요? 그렇죠, 은인?”
“…….”
“어, 아니에요?”
당연히 맞다.
하지만 세상에는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불편한 진실도 있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청풍, 이 새끼…….’
못 본 사이에 살성에게서 신종 암살법을 배워 온 청풍을 짜게 식은 눈빛으로 쳐다보던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적천강의 강렬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청 소협은 지난 몇 달간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녔던 거야?”
“음. 작은 할아버지가 말하지 말랬어요.”
“나한텐 말해도 돼.”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아시고, 상대가 설령 은인이라 할지라도 함구하랬어요.”
“진짜 괜찮다니까. 정 그러면 전음으로 살짝…….”
“우와, 신기하다. 혹시 은인께서 전음으로 말하면 괜찮다고 꼬드겨도 함구하랬어요.”
“…….”
“뭐든 말하면 죽여 버린대요. 지금까지 살인멸구(殺人滅口)만 오천 번쯤 들은 것 같아요.”
“……그냥 안 들을게.”
물론 청풍이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털어놓는다고 해서 살성이 살인멸구를 시도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면 더 묻지 않는 게 예의다.
음.
조금 솔직해지자면, 진짜 살인멸구를 시도할 것 같아서 쫄리는 것도 있다.
“청해성의 일은? 그것도 비밀인가?”
“아뇨. 거기에 대해서는 별말 없으셨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요.”
천진난만하게 대답한 청풍은 지난 한 달간의 일들을 대략적으로 알려 주었다.
첫 번째로,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청해성에 잠입한 이유와 목적을.
“우선적으로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는 세작을 색출하기 위해서였다고?”
“네. 원래 눈앞의 적보다 등 뒤의 배신자가 더 무서운 거라고 하셨어요.”
맞는 말이다.
이미 몇 번에 걸쳐 뼈저리게 겪기도 했으니, 그 말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세작을 찾았느냐?”
적천강의 물음에 청풍이 대답했다.
“없었어요. 적어도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요.”
청풍 혼자만의 일이었다면 백 번쯤 검수해도 못 미더웠겠지만, ‘우리’라는 두 글자 안에 살성이 포함되어 있다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
그 정도의 철두철미함도 없다면 고금제일의 살수라 불리지도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으로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무림이니까.”
노강호다운 연륜이 느껴지는 적천강의 한 마디에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작은 할아버지께서도 같은 생각이셨어요. 그래서 더욱 자세히 파고들기 위해 곤륜파 내부로 잠입하려고 하셨죠.”
했다, 와 하려 했다. 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때마침 암천이 쳐들어왔군. 맞지?”
“네. 순식간이었어요.”
실로 압도적인 머릿수와 전력.
곤륜파를 포함한 일부 청해 무림인들은 그 즉시 본산에서 물러나 동쪽으로 퇴각했지만, 살성과 청풍은 달랐다.
“우리는 남았어요. 그들 사이에 숨어 때를 기다렸죠.”
만약 다른 누군가가 같은 방법을 시도했다면 진작 발각되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살성만큼은 예외였다.
아니, 지난 몇 달간 그의 곁에서 가르침을 이어받은 또 다른 한 사람 역시 그랬다.
“작은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숨을 참고, 인기척을 죽였더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고요. 이렇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흡, 하고 호흡을 멈춘 청풍의 모습에 나는 대답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정확히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흡사 귀신처럼 흐릿해진 녀석의 기척 때문이었다.
‘이게 된다고? 고작 그 몇 달 만에?’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가능하다.
그 대상이 청풍이라면.
시스템 따위는 없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듯한, 저 미친 재능의 소유자라면 그토록 까다로운 은잠술(隱潛術)을 단숨에 익힐 수도 있다.
‘저런 재능에 대해 살성의 가르침까지 이어받았으니, 놈들의 이목을 피하는 것도 가능했겠지.’
일타강사와 하늘이 내린 천재의 만남.
그리고 그 결과는 두 사람의 성공적인 잠입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런 그들에게도 한계는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는데, 아쉽게도 태청전(太淸殿)까지는 갈 수 없었어요.”
“태청전이라면…….”
“곤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곳이에요. 곤륜파의 대소사가 모두 결정되는.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그 일대를 둘러싸고 있더라고요.”
마치 그때의 감각을 떠올린 듯, 청풍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뭔가가, 보이지 않는 끈적한 뭔가가 느껴졌어요. 저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기분이었죠.”
“끈적했고, 오싹해졌다고?”
“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요. 작은 할아버지께서도 그걸 느끼셨는지, 때마침 하산하는 괴물들의 틈에 섞여 되돌아오기로 하셨어요. 그렇게 며칠 뒤에 은인을 만났고요.”
말을 끝마치고도 표정이 나아지지 않는 청풍을, 나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이야기를 들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두 글자를 조용히 곱씹으며.
‘마력(魔力).’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촤아악.
짙은 안개에 휩싸인 넓고 푸른 강물 너머로,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