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77
1077화
한 무리의 흑의인들이 어느 야트막한 언덕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오 무렵의 일이었다.
슥.
파파팟!
선두의 사내가 가볍게 내저은 손짓에, 수십여 명의 흑의인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조사하고, 동시에 수습하기 위해서.
“벌써 선객(先客)이 와 있었군.”
작게 뇌까린 사내는 언덕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반경 십여 리에 걸쳐 펼쳐진 광활한 갈대숲과 그 사이사이를 새카맣게 메운 무수한 날짐승들을.
“그간 굶주렸겠지. 퍽 힘든 여정이었을 테니.”
이곳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청해호(靑海湖)는 철새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천 리에 달하는 거리를 쉼 없이 날갯짓해야 하는 고난이 뒤따르지만, 그럼에도 매년 엄청난 숫자의 철새들이 청해호에 오는 이유는 깨끗한 물과 풍부한 식량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어 버렸지만.
솨아아아.
시린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현듯 갈대숲을 휩쓸자, 열심히 주린 배를 채우던 철새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단순히 고지대(高地帶)라는 이유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추위.
태양이 가장 높게 떠 있어야 할 정오의 하늘은 어느덧 새카만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때아닌 서리에 갈대숲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처럼 계절을 잊은 듯한 불가사의한 현상은, 불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기온이 내려가고, 혹독한 맹추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승을 부렸으며, 그에 따라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한 초목(椒目)은 과거의 싱그러움을 보여 주지 못했다.
반면 어느 땅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들기도 했으니, 실로 하늘의 장난이요 귀신의 조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일 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변화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사내, 마삼보의 생각은 달랐다.
사박, 사박.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는 그의 발끝을 따라 땅을 뒤덮은 서리가 부서진다. 그에 따라 새겨지는 발자국처럼 그의 상념도 깊어졌다.
‘고작 귀신의 조화 따위가 아니다. 그분의 권능은 천신(天神)과 맞닿아 있어.’
하늘 그 자체이자, 전지전능한 신.
자신의 주인인 천주(天主)를 떠올린 마삼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절로 두려움과 존경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하를 위협에 빠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후를 바꾸고, 죽은 자마저 소생시키는 절대자.
마삼보는 문득 생각했다.
과연 그런 이를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찌하여 그 믿을 수 없는 권능의 일부를, 당신의 수족이었던 스승조차 버리고 도망쳐 온 자신에게 나누어 주었는지.
‘아니, 나는 스승님과는 다르다. 모든 면에서 그분께 더욱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마삼보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비록 일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던 동천마군은 나약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천주가 품은 대계(大計)에 큰 보탬이 되어, 그분의 새로운 수족으로서 이 천하의 일부를 다스리겠노라고.
까악.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마삼보는 어느덧 자신을 향해 빛나고 있는 수많은 안광(眼光)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식사를 방해한 모양이로군. 신경 쓰지 말고 마저 들거라.”
하지만 마삼보의 친절한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갈대숲을 뒤덮은 수많은 철새는 이 뜻밖의 불청객을 향해 날 선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한껏 핏발 선 눈동자를 번뜩이며.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평범한 날짐승에게서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살기(殺氣)였다.
“이런, 이미 변화가 시작됐군.”
작게 혀를 찬 마삼보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철새들을 바라보았다.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는 부리와 맹수의 그것처럼 두껍고 예리해진 깃털과 발톱.
그리고 그런 철새들의 아래에는, 이 호화로운 만찬을 장식한 요리들이 외관만큼이나 끔찍한 사취(死臭)를 풍기며 쓰러져 있었다.
“하여간, 그놈의 본능이 문제란 말이지.”
어찌 된 일인지 충분히 알 만했다.
이미 앞선 기후의 변화에 따라 초목이 얼어 죽고 짐승과 벌레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
이처럼 예상치 못한 식량난에 먹이를 찾지 못한 수많은 철새는 청해호를 벗어나 일대를 떠돌았을 것이고, 그중 일부는 그리 멀지 않은 갈대숲에서 마침내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실 끊어진 인형이나 다름없이 쓰러져 있던 괴물들의 피와 살로.
“그렇지 않아도 전력 보충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잘 되었군.”
마삼보는 서서히 변이(變異)되기 시작한 철새들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근래 들어 대인이라 불리는 웬 정신 나간 놈 하나가 닥치는 대로 휘하의 날짐승들을 때려잡기 시작해서 감시가 쉽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머릿수라면 예상치 못했던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까아아악!
물론 그 전에, 저주받은 피와 살을 섭취하여 난폭해진 저 날짐승들을 위한 각인(刻印)이 필요하겠지만.
“자, 지금부터는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쩔그럭.
마삼보가 손에 쥐고 있던 요령을 흔든 그 순간.
솨아아악!
거친 날갯짓과 함께 그를 향해 쇄도하던 무수한 숫자의 철새들이 일순간 방향을 틀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요령의 움직임을 따라 울려 퍼진, 둔탁하면서도 음산한 방울 소리가 명령하는 대로.
그리고 그에 반응한 것은 비단 날짐승들뿐만이 아니었다.
스륵, 쿠우웅.
굽혀졌던 무릎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허리가, 마지막으로 굳게 감겨 있던 눈이 반개(半開)한다.
“생각보다 많이 살아남았군.”
너른 갈대숲 곳곳에서 거대한 체구를 일으키는 괴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마삼보가 작게 중얼거린 그때. 앞서 사라졌던 흑의인들이 되돌아와 보고했다.
“모두 확인했습니다.”
“어떻더냐?”
마삼보의 물음에, 흑의인 중 하나가 손에 쥔 무언가를 공손히 내밀었다.
얼굴의 일부가 새들에게 쪼아 먹힌 것을 제외한다면 생전의 모습 그대로, 조금의 위화감도 없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굳어 버린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목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삼보의 수하이자, 그들의 동료였던.
“대부분 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건.”
수급을 살펴보던 마삼보의 눈이 문득 크게 뜨였다.
그는 술사인 동시에 일신의 무위가 초절정에 다다른 고수.
그러나 수급에 남아 있는 검흔(劍痕)은, 마삼보로서도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희미했다.
“……살검(殺劍)이다. 그것도 극의에 달한.”
“그 말씀은.”
“무영(無影)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 한때 내가 몸담았던 동창조차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천자를 암중에서 호위하던, 대국 황실이 키워 낸 최고의 살수였지.”
하지만 그런 무영조차 이 정도의 검흔을 만들어 내진 못한다.
끈질긴 조사와 추격으로 무영의 손에 고혼이 된 시체 한 구를 손에 넣은 바 있었던 마삼보는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대연회장을 중심으로 벌어진 혈전 속에서 진태경에게 죽음을 맞이했던 어느 절름발이 노인을.
‘계야부.’
이미 사라졌다 알려진 천하제일의 살문, 살천문(殺天門)의 마지막 후예.
어찌하여 지금 이 순간 그가 떠오른 것일까.
마삼보는 오래지 않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살성(殺星)…….”
그래, 그의 존재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분명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을 이 광활한 갈대숲에 인간의 시체가 단 한 구조차 보이지 않는 것도.
술사들마저 제거된 마당에 어떻게 이토록 많은 괴물이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지도.
“속전속결로 끝냈군. 우리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마삼보는 수하의 수급을 저 멀리 내던졌다.
그에게는 천주에게 선물 받은 권능이 있었지만, 어떠한 제한도 없이 모두를 죽음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돌아간다. 지금쯤 놈들은 청해호를 떠났을 터, 서둘러 돌아가 다음 명령을 이행할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그나마 상당한 숫자의 전력을 수습하고 새로운 수하들까지 얻었으니, 마삼보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고 했다.
“하온데.”
흑의인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기 전까지는.
“한 명. 단 한 명이 빕니다.”
“뭐라?”
“훼손당한 손목 하나를 발견하긴 했으나, 이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시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놈들에게 생포 당한 듯싶습니다.”
“……!”
마삼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토록 조심하라 일렀거늘, 죽은 것도 아니고 생포라니.
하지만 그가 느낀 분노와 동요도 잠깐뿐이었다.
제법 귀중한 수하들을 잃고 생포 당하기까지 했지만, 전체로 보자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곁가지에 불과하다.
곁가지 하나에 신경을 기울이는 이가 없듯이, 마삼보가 그들에게 알려 준 정보 또한 많지 않았다.
다만 조금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곧바로 이어진 수하의 뒷말이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요령들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무슨 도둑놈도 아니고, 알뜰하게도 챙겨 갔군.”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마삼보가 고개를 내저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요령을 손에 넣었다 한들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어느 촌부가 신병이기(神兵利器)를 얻었다고 하루아침에 초절정 고수로 둔갑할 수 없는 것처럼, 요령이 제 쓰임새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수련을 거듭해야 했다.
“게다가 생포 당한 그놈이 우리를 배반해 보았자, 놈이 부릴 수 있는 숫자는 고작 수백에 불과하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를 잘 압니다. 본천에 대한 충성심도 충성심이지만 결코 누군가를 배반한 인물이 못 되는…….”
잡혀간 동료를 비호하는 수하들의 모습에, 마삼보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할 것이다.”
“예?”
“놈은 배반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지.”
마삼보는 나직이 덧붙였다.
“내가 아는 그 빌어먹을 개자식이라면, 반드시.”
불현듯 눈앞을 스치는 ‘빌어먹을 개자식’의 얼굴과 함께, 그는 반사적으로 품 안을 더듬었다.
그와 동시에 불과 몇 달 전, 진태경이 자신을 속이기 위해 중요한 밀서랍시고 건넸던 그 쪽지에 적힌 글자를 떠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학문에 조예가 깊은 마삼보조차 알아볼 수 없었던 정체불명의 기호를.
– 븅신새끼ㅋ
여전히 뜻을 알아내지 못한 그 이상한 기호를 떠올린 마삼보는 이를 뿌득 갈았다.
‘기다려라. 곧 갚아 주마.’
동쪽을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청해호를 가로지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