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78
1078화
청해호는 그 명칭에 담긴 뜻처럼 작은 바다와 같았다.
십여 장에 달하는 수심과 수천 리를 아우르는 광활한 면적.
원래대로라면 청해성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말까지 버린 아군이 꼬박 며칠 밤낮을 도보로 이동해야 했겠지만, 곤륜파의 장문인인 청허자(淸虛子)에 이어 도착한 수십여 척의 선박은 삼천여 명이나 되는 아군을 능히 수용할 수 있었다.
촤아아악.
구름의 형태가 음각(陰刻)된 뱃머리가 힘차게 물살을 가른다.
혹독한 추위 때문인지 곳곳에 살얼음이 끼어 있는 청해호의 강물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 않습니까? 한겨울이 오려면 앞으로도 한참인데, 벌써부터 이런 광경이라니.”
고개를 돌리자 우직하게 생긴 중년의 도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은 낯선 얼굴과 목소리.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하루 전, 선박에 오르며 짧게나마 인사를 나누었던 나는 그의 도호(道號)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학소 진인.”
그 순간, 중년 도사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어색해졌다.
“학수(學洙)입니다. 학소가 아니라.”
“…….”
“…….”
삽시간에 어색해진 공기.
잠시 침묵하던 나는 어렵사리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 혹시 최근에 도호 바꾸셨어요?”
“없습니다. 곤륜에 입문(入門)한 이래로 단 한 번도.”
“그럼 혹시 입문하신 지는 얼마나…….”
“적어도 어제는 아닙니다. 이미 사십 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러시구나.”
“예.”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내긴 개뿔이.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음. 날씨가 좋네요.”
우르릉, 쾅!
갑자기 뭔 지랄이 났는지 천둥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한 하늘을 힐끗 바라본 학소, 아니 학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험한 날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럼요. 좋아하다 못해 아주 환장하죠.”
진짜 환장하겠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상황.
조졌음을 직감한 내가 흐린 눈빛으로 캄캄한 하늘만 응시하고 있던 그때, 학수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해합니다. 종종 있는 일이지요. 빈도가 딱히 눈에 띄는 편은 아니라서.”
과연 곤륜파의 도사다운 너그러운 배포에, 나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굳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면을 튼 지 고작 한나절밖에 되지 않았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더군다나 진 도우께서는 워낙 중임(重任)을 맡고 계신 몸이니.”
학수는 그 말과 함께 호탕하게 웃어 보였지만, 내가 큰 결례를 저지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그가, 언젠가 청허자의 뒤를 이어 곤륜파의 장문인이 될지도 모르는 장제자(長弟子)라면 더더욱.
“도우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자주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셋째의 말대로 아주 유쾌하시군요.”
“셋째라고 하시면.”
“짐작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곤륜운룡 학우, 그 아이가 제 막내 사제지요. 연배만 따지면 사제보다는 제자에 가깝지만 말입니다.”
학수의 나이는 얼핏 보기에도 불혹을 훌쩍 넘어 지천명에 가까워 보이니, 이립도 되지 않은 학우를 제자로 들였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긴 하다.
현실은 청허자를 같은 스승을 모신 사형제 지간이지만.
“여하튼 오래전부터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뵙게 된 것은 심히 안타깝지만…… 도우께서 본문을 구원코자 천릿길을 마다 않고 오셨으니 이보다 기쁜 일은 없겠지요.”
갑작스러운 학수의 공치사에, 괜히 어색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감사 인사를 들은 것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꼭 나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영웅 행세를 하려는 마음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아직 본격적인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고.’
물론 곧 한자리에 모일 아군의 전력은 내가 경험한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하다.
삼성(三星)에 속한 이가 둘이나 합류했고, 그에 능히 견줄 수 있는 고수인 화왕 적천강 역시 함께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더해 나를 비롯한 여러 초절정 고수와 가려 뽑은 삼천의 정예가 본진과 합류한다면, 청해성을 침범한 암천의 대군을 상대로도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
정확한 수치를 알아낼 수는 없으나, 짐작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암천의 병력은 물경 십만에 달한다.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언데드(Undead)나 다름없는, 인간의 신체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괴물들.
그 사실부터가 이미 심각한 변수였지만, 언젠가부터 줄곧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는 따로 있었다.
‘천주(天主).’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심연 너머에 웅크린 채 천하를, 하늘과 땅을 집어삼키고 있는 절대자.
만약 머지않아 놈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천주가 이번 전투에 참전할 가능성은 충분해. 이건 암천으로서도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이미 수족과 같았던 네 명의 마군(魔君)과 마후(魔后)가 내 손에 쓰러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력 손실이 발생한 상황.
이와 같은 시점에서 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청해성에서 잃는다면, 천주로서도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렇다면 왜, 감숙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한 거지?’
조용히 입술을 깨문 나는 다시금 떠올렸다.
더, 지금보다도 더 강해지라는 대술사의 그 한 마디를.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던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아니.
대술사에게 그러한 지시를 건넨 누군가의 의도를.
‘천주는 나의, 열화신룡 진태경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피와 시체로 뒤덮인 그날의 설원에서 깨달은 진실이, 예리한 송곳이 되어 머릿속을 들쑤신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과, 믿을 수 없는 짐작을 남긴 채.
‘어쩌면. 어쩌면 천주의 진짜 목적은…….’
불현듯 찾아온 두통 속, 내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려는 침음성을 가까스로 삼킨 그때였다.
“……도우. 진 도우, 괜찮으십니까?”
상념을 깨트리는 한 줄이 음성.
어느덧 학수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지금 안색이…….”
말꼬리를 흐리는 학수의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강물을 바라보았다.
맑은 수면 위로 비친 누군가의 경직된 얼굴이, 이내 빠르게 나아가는 뱃머리를 따라 어지럽게 흩어졌다.
지금의 내 마음처럼.
“괜찮습니다. 단지 멀미 때문에 잠시.”
초절정 고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기에는 너무나도 옹색한 변명.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학수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비록 도우의 심경을 속속들이 헤아릴 재주는 없으나, 마음속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빈도를 찾아와 주셔도 됩니다.”
그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덧붙였다.
“물론 그리 진지하게 드린 말씀은 아니니 괘념치 마십시오. 다만 도우의 마음을 조금 더 가볍게 해 드릴 좋은 소식 정도는 알려 드릴 수는 있겠지요.”
“좋은 소식이라면.”
“지금쯤이면 중원에도 청해성의 상황이 알려졌을 터. 머지않아 검성(劍星), 아니 맹주께서 천하의 의협지사들을 이끌고 합류하실 것입니다.”
기대에 가득 찬 학수의 음성과는 달리, 잠시나마 설마 하는 마음을 품었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아생연후살타(我生然后杀他).
우선은 내가 살고, 그 이후에 적을 치라는 의미가 담긴 바둑의 오랜 격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작금의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못한 폭탄고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놈들에게 이동진(移動陳)이 있는 이상, 청해성 한 곳에 완전한 총력을 기울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혀끝에 감도는 말을 애써 삼켰다.
우직하고, 선해 보이는 눈앞의 저 도사가 품고 있는 희망을 무참하게 꺾어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적어도 나 자신조차 혼란에 휩싸여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음.”
“왜 그러십니까?”
애매한 반응에 학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내심 쓴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도 곧 냉정한 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아뇨.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좋은 소식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그보다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대략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듯싶습니다.”
“반나절이라, 길어야 두세 시진 정도군요.”
선박으로 청해호를 곧장 가로지른 덕분에 적지 않은 시간이 단축된 상황.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그 순간 잠시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 맞다.”
“뭔가 궁금하신 거라도……?”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슬슬 꺼내 줄 때가 된 것 같아서요.”
“예?”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학수를 뒤로한 채, 나는 어딘가에 있을 집요정을 향해 외쳤다.
“대가리 박아!”
잠시 후, 싸가지 없는 어느 집요정의 억울한 외침이 들려왔다.
“미치겠네, 또 왜요!”
“그냥 불러봤어. 위치 확인 차.”
허겁지겁 달려온 집요정, 아니 혁무진이 내 태연한 대답에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제가 뭐 길거리 똥갭니까?”
“절대 아니지. 착한 똥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너랑 비교를 당하겠냐.”
“……진짜 내가 언젠가는 드러워서 때려치우고 만다.”
“그래, 제발 그래라.”
투덜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피식 웃은 나는 걸음을 내디디며 물었다.
“그보다,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그렇지 않아도 한창 작업 중이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입이 무겁던데요?”
“그래서?”
“발목에 쇠사슬이랑 물통 달아서 더 무겁게 해 줬죠. 아주 좋아 죽던데요.”
“잘했네. 소질 있어.”
“뭘요. 이게 다 조장님한테 배운 거 아니겠습니까.”
혁무진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던 그때, 엉겁결에 뒤따라오던 학수가 눈을 껌뻑거렸다.
“그, 실례지만 대관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텅 빈 갑판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나는 입을 열었다.
“보시면 압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뭐를…….”
“무진아.”
“옙.”
드르륵.
씩씩하게 앞으로 나선 혁무진이 갑판 밖으로 튀어나온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전신이 새파랗게 질린 흑의인이 강물 속에서 튀어나왔다.
“푸헉, 말, 말하겠소! 말하겠소!”
“목숨 걸고?”
“물론, 쿨럭. 물론이오!”
꼬박 하루 밤낮을 청해호의 푸른 강물과 한 몸이 되었으니, 이제 좀 고분고분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나는 심유한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는 흑의인을 응시했다.
“만약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섞여 있을 시, 너희 부모님은 유병장수한다.”
“…….”
“효자네. 안 그러냐, 무진아?”
“예엡!”
“아, 안 돼! 그것만은……!”
드르륵, 첨벙!
신명나게 대답한 혁무진이 쇠사슬을 풀자, 푸른 강물이 처절한 비명을 집어삼켰다.
장강 찍먹의 유구한 전통은, 청해호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