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84
1084화
끝없는 장강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른다(不尽长江滚滚来).
오랜 과거, 시성(詩聖)이라 불리며 당대를 풍미했던 어느 시인이 남긴 시구다.
그는 장강의 강물에 담긴 아득한 역사와 그 아름다운 자체를 깊이 경애했고, 그것은 눈을 감은 채 뱃머리에 앉아 있는 한 사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당연하게도 그 이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장강을 사랑하여 수적이 되었고, 선화아(船火兒)라는 별호는 어느덧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으니.
둥, 둥, 두웅!
마치 물결처럼 퍼져 나가는 북소리에 사내는, 해상왕의 두 번째 제자이자 수룡채의 채주인 선화아 무송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채주.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무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수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저 북소리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는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룡선(海龍船).’
스승인 해상왕 파륜의 배다.
과거, 그들의 유일한 적수였던 황하수로맹(黃河水澇盟)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홀로 수십여 척의 선박을 침몰시킨 최강의 함선.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바로 그 해룡선이, 장강 최고의 무인을 태운 채 돛을 활짝 편 채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장강의 또 다른 주인.
아니, 실질적인 주인이나 다름없는 대국의 군선(軍船)을 향해.
‘하지만 오늘만큼은 다를 것이다.’
우리가, 장강수로맹이 진정한 장강의 지배자임을 보여 줄 때.
선화아 무송은 마음속으로 뇌까리며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터져 나오는 수하들의 함성과 함께 바람을 받은 돛이 한껏 부풀었다.
촤아아악!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뱃머리.
광야를 달리는 말처럼 대국의 군선들을 향해 질주하던 그때, 비스듬히 측면으로 방향을 튼 군선들 사이로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발포(發砲)하라!”
그 순간.
퍼버벙!
백여 문이 넘는 홍이포(紅夷砲)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일개 수적 따위가 아닌, 대국의 수군이기에 지닐 수 있는 무기.
그러나 인간의 육신 따위는 단숨에 짓뭉갤 수 있는 쇳덩어리가 이백여 장의 허공을 가로질러 들이닥치는 그 무시무시한 광경 앞에서도, 무송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일개 수적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팟.
일순간 흐릿해진 신형이 뱃머리를 박차며 쏘아진다.
어느덧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대도(大刀)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포탄을 향해 흉흉한 궤적을 그렸다.
콰아앙!
울려 퍼지는 굉음 속, 포탄을 튕겨낸 반동으로 뱃머리에 착지한 무송은 저릿해진 손아귀를 느끼며 외쳤다.
“돌격! 돌격하라!”
“와아아아!”
힘이 실린 함성과 함께, 장강수로맹이 자랑하는 쾌조선(快鳥船)들이 더욱더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수적들은 하나같이 가려 뽑은 최정예들. 무공을 익힌 그들의 노질은 힘차면서도 쾌속했고, 선봉에 배치된 절정 고수들은 빗발치는 포탄으로부터 선박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물론, 그럼에도 넘을 수 없는 한계는 있었지만.
콰과과광!
“크아아악!”
“배가, 배가 침몰한다!”
거대한 굉음이 비명을 집어삼킨다. 산산이 부서진 쾌조선들이 곳곳에서 침몰하기 시작한다.
수백여 척이나 되는 배가 결집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과녁판과 같다는 뜻.
특성상 내구성보다 속도를 우선시한 덕분에 장강수로맹의 선박들은 그 선체의 폭이나 크기가 작고 유려했으나, 이는 곧 단 한 발의 포탄에도 침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펑! 퍼어엉!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선체를 빗나가 수면 위를 후려치는 포탄들을 본 무송이 눈매를 좁혔다.
‘역시, 화망(火網)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군.’
조금 전에 쏘아진 포탄들은 신호에 맞춰 일거에 들이닥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첫 발포 이후로 줄곧 그랬다.
쉼 없이 울려 퍼지는 요란한 굉음과는 달리, 막상 장강수로맹의 피해는 총 전력에 비하면 미미했고 되레 홍이포의 불발로 인해 침몰하는 군선마저 보였다.
그저 저마다의 시간차를 둔 채, 대장선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무언가에 쫓기듯 준비가 되는 대로 쏘아 보내는 적들의 모습.
익히 알려진 화포의 위력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수적들 또한 어느 순간 입가에 웃음을 띠기 시작했다.
“채주, 놈들이 당황한 모양입니다.”
“염병. 오줌 찔끔 지렸는데 괜히 머쓱해지네.”
화색을 띤 수하들의 말에, 무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스승님의 말씀대로다.”
“예? 총채주, 아니 맹주님께서요?”
“그래. 평화가 길었던 만큼, 저들 역시 무방비한 상태일 거라고 하셨지.”
무송의 생각 또한 스승과 다르지 않았다.
사냥이 끝난 맹수는 나태해지는 법.
이미 오래전부터 대륙이라는 큰 산을 오롯이 지배하게 된 대국과 맞설 적은 없었다. 장강수로맹은 수적들의 연합체로서 어느 정도 묵인되는 존재들에 지나지 않았고, 길었던 평화는 나약함을 부르곤 한다.
물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정예 함대가 존재 하나, 그들이 있는 곳은 바다지 강이 아니다.
대륙을 일통한 이후부터, 대국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외적(外敵)뿐이었으니까.
‘이 전투는, 우리가 승리한다.’
확신에 찬 그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작게 뇌까리던 그때, 시시덕거리던 수하 중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좀 거시기하구먼요.”
“무슨 소리냐?”
“이게 뭐랄까 그,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닌데.”
뒤통수를 긁적인 수하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저희, 이래도 되는 겁니까?”
“뭐?”
“뭔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럭저럭 살 만했는데, 굳이 무림맹을 뒤통수치고 암천 그 썩을 것들이랑 손잡는다는 것이…….”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꼬리를 흐리자, 다른 수하들도 눈치를 보며 슬쩍 한마디씩을 얹었다.
“하긴 뭐, 암천이 좀 구린내가 나긴하지. 정파 놈들이 뒤에서 우리 호박씨 까는 건 있어도 아주 질 나쁜 것들은 아니니까.”
“맞어, 맞어.”
“명령이 떨어진 이상 우리 같은 아랫놈들이야 따르는 게 맞지만, 사실 좀 그렇긴 혀.”
수군덕대던 수하들은 이내 딱딱하게 굳은 우두머리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지만, 정작 무송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거냐고?’
앞서 들었던 말을 떠올릴수록 입맛이 씁쓸해졌다.
아니, 내심으로는 누구보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쓰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스승님의 명령이라지만…… 도무지 내키지 않는군.’
무송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결코 성인군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수적(水賊).
저 두 글자에 담긴 뜻 그대로 그는 도적이고,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정해진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가난해 보이는 자의 재물은 빼앗지 않았고, 수하 중 누군가 살인을 저지르면 그 즉시 엄벌에 처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무송은 굉음과 혼란으로 뒤덮인 강 위를 바라보며 차오르는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열화신룡 진태경.’
몇 번이나 쾌조선을 빼앗듯이 빌려 가 종처럼 부린, 자신들보다 더한 도적이나 다름없는 놈이었지만 그래도 진태경은 협객이었다.
그 성질 무시무시한 화왕도, 심지어 살성도.
그들은 천하를 도탄에 빠트린 암천과 싸웠고, 불의(不義)에 맞섰다.
‘그러고 보면, 그들을 도왔던 나 역시 잠시 동안은 협객이었던 셈인가.’
불현듯 뇌리를 스친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무송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괜한 생각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사제인 철수신룡(鐵手神龍)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던 그였으나, 대사형을 비롯한 몇몇 핵심 장로들의 설득에 넘어간 스승의 의지는 굳건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 장강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났다.
하늘 같은 스승이자 맹주인 해상왕 파륜의 명령이었으니까.
스승을 신처럼 믿고 따르는 제자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의 반론이나 잡생각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
그는 수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단숨에 끝낸다. 다들 준비해라.”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수하들을 뒤로한 채, 무송은 손에 쥔 대도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포연(砲煙)에 휩싸인 장강의 풍경은,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낯설고 불편했다.
‘제기랄.’
혀끝에서 맴도는 욕설을 삼키며, 무송은 다시금 떠올렸다.
천자문도 제대로 못 뗀 주제에 입이 닳도록 외우고 다녔던, 어느 옛 시인이 남긴 한 줄의 시구를.
여느 때처럼 도도하게 흘러야 할 장강의 강물이, 어찌 이다지도 붉게 요동치는지를.
그리고 무송의 그 짧은 상념은,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군선의 그림자와 함께 끊어졌다.
구궁, 콰드드득!
강렬한 충돌.
쾌조선의 날카로운 충각(衝角)이 마침내 군선의 측면을 들이박은 그 순간.
팟!
뱃머리를 박차며 솟구친 무송은 힘차게 대도를 내리그었다.
갑판 위에서 전투를 대비하던 한 무리의 관군들을 향해.
그와 동시에, 또렷하게 보았다.
극도의 긴장과 공포에 젖은 그들의 눈동자를. 파르르 떨리는 창칼과 얼어붙은 몸뚱어리를.
“……빌어먹을.”
끝끝내 참지 못한 욕설을 토해 낸 무송은, 마지막 순간 온 힘을 다해 대도를 비틀었다.
올올히 맺혀 있던 도기(刀氣)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시퍼렇게 날이 선 도신이 비스듬히 굽혀진다.
퍽! 털썩!
예리한 절삭음이 아닌,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힘없이 쓰러지는 군졸들.
“어?”
뒤이어 갑판으로 기어오른 수하들이 상황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들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무송의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죽이진 마라. 노 저을 놈들을 있어야 하니.”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수적들이, 이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들었지? 채주께서 살려 두시란다.”
“암요. 누구 명이라고 거역할깝쇼.”
모두가 알았다.
이것이 얼마나 구차한 변명인지를.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장강의 풍경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쿠구구궁! 퍼엉!
불길을 피워올리며 차례차례 침몰하는 군선들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을 보고 들으며 무송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저 멀리, 막아서는 모든 것을 침몰시키며 나아가는 해룡선에 있을 스승을 향해.
‘이런 모습이었습니까? 당신께서 그토록 원하신 장강은.’
그날, 불과 두 시진 만에 수천의 관군을 실은 일백여 척의 군선을 수장(水葬)시킨 장강수로맹은 뱃머리의 방향을 틀었다.
서쪽 저 너머 어딘가로.
그리고 이 엄청난 소식은 천하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