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89
1089화
유시(酉時)에 막 접어들 무렵, 어느덧 서산으로 조금씩 기울어 가는 태양을 본 늙은 거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희한하군.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
그 말에 가까운 모닥불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또 다른 거지들이 반응했다.
“그럼 지금 같은 계절에 이런 날씨인 건 말이 되고요?”
“맞지.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분타주(分舵主)님도 괜히 거기서 찬바람 맞지 마시고, 와서 모닥불이나 좀 쬐시우. 뜨뜻한 국물도 한 사발 하시고.”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세상이 요지경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니까.
늙은 거지, 아니 개방의 청해성 서녕 분타주인 만총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모닥불로 걸음을 옮겼다.
후개(後丐)인 궁기방은 이미 서녕으로 돌아간 지 여러 날이었지만, 휘하의 개방도 삼십여 명과 함께 남아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그였다.
“먹을 것 좀 있나?”
“그 무슨 당연한 말씀을.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어도 어떻게든 배는 채우는 게 우리 아니오?”
“정찰 나가 있는 놈들 몫은 남겨뒀고?”
“어허. 누굴 상도덕도 모르는 거지로 보시나. 걱정 마시우. 그놈들도 돌아와서 배터지게 먹을 만큼 해뒀수.”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은 거지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발을 내밀자, 만총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향은 끝내주는구먼.”
“드시기나 하슈. 향만 끝내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불과 촌각 만에 게 눈 감추듯 사발을 싹 비운 만총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겉보기에는 잡탕도 이런 잡탕이 없었지만, 청해호(靑海湖)에서 갓 잡은 물고기로 만든 덕분인지 그 맛은 일류 숙수가 만든 것처럼 훌륭하게 느껴졌다.
‘하긴, 몸도 늙었는데 이런 호사라도 있어야지.’
포만감에 나른해진 만총은 생선 가시로 이를 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천히 노을빛에 젖어 들어가는 청해호의 강물을 보고 있자니, 근심과 걱정도 잠시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기만 했지만.
‘경치 좋고 배부르면 뭣하나. 그놈들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발 뻗고 자지도 못하는 것을.’
암천. 그 무시무시한 악귀들을 떠올리자 만총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나흘 전, 진태경을 비롯한 지원군들이 이곳을 지나 서녕에 합류한 후에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찰나의 희망을 짓밟기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악화 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면 영락없이 앞뒤로 포위당할 텐데……젠장, 용코로 걸렸군.’
당장 곤륜산을 점령한 암천의 대군만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인데, 후방에서는 중원 무림의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친 도적놈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고 있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딱 하나.
암천의 본대가 아직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시간 문제. 놈들은 반드시 들이닥친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 전 느꼈던 포만감이 싹 가시고, 불안과 두려움이 빈자리를 채웠다.
“……염병할.”
삽시간에 기분이 더러워진 만총은 손 닿은 곳에 있던 자갈을 주워 냅다 내던졌다.
쐐애액!
행색은 남루해도 그 역시 개방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분타주 급의 고수.
손끝을 떠난 자갈이 끝없이 펼쳐진 청해호를 향해 쏘아졌다.
촤아아악!
거칠게 갈라지는 수면. 그제야 답답했던 속이 조금이나마 풀린 만총은 콧김을 뿜으며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고 했다.
자갈로 인해 일어난 파문이 가라앉으며, 서서히 평온함을 되찾는 강물을 보기 전까지는.
‘뭐지?’
그리고 그 불현듯 찾아온 기시감의 정체를, 만총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색. 강물의 색이…….’
어둡다.
아니, 먹물이라도 풀어놓을 것처럼 새카맸다.
불과 촌각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을빛에 물들어 있던 청해호의 강물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고, 귓가로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는 유난히도 꺼림칙했다.
“아따, 오늘따라 왜 이리 빨리 어두워진대? 그래도 평소에는 노을 지는 데만 한 식경은 걸리더만.”
“우리가 따져봤자 뭘 어쩌겠소. 그냥 그런 갑다 해야지. 정찰간 놈들 돌아오기 전에 밥이나 더 드쇼.”
“나야 물론 좋지. 아, 분타주께서도 한술 더 뜨시렵니까?”
만총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본능이 머릿속에 붉은 경종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이건……뭔가 이상하다.’
물론 다른 개방도들의 반응처럼 별 것 아닌 일일 수도 있다.
추수철이 오기도 전에 서리가 내리고, 인간 같지도 않은 외관을 지닌 거대한 괴물들이 날뛰는 마당에 뭘 더 놀랄 것이 있겠나.
그러나 알 수 없는 직감이 있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까지 쌓아온 경륜, 노강호로서 뼈에 새겨진 듯한 본능이.
“정찰대, 정찰대는 언제쯤 돌아온다더냐?”
“예? 아니 갑자기 그건 왜.”
“대답하거라, 어서!”
늘 사람 좋던 늙은 분타주의 불호령에, 당황한 개방도들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고, 곧 올 겁니다요.”
“그, 사실 평소보다 반 각 정도 늦긴 했습니다만 코앞까진 왔을 테니 분타주께서 걱정하실 필요는……어라?”
대답하던 개방도 중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만총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해 쏠렸다.
약 이백여 장 밖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언덕.
그 위로 자그마한 점처럼 막 모습을 드러낸 한 무리의 인마(人馬)가 흐릿한 어둠을 뚫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때맞춰 왔구먼.”
“저저, 게을러터진 놈들 같으니라고. 늦은 주제에 설렁설렁 오면 쓰나?”
“분타주께서는 이만 고정하시우. 내 아주 이번 기회에 혼쭐을 낼 터이니.”
모두가 만총의 눈치를 살피며 한 마디씩을 던지던 그때, 침잠한 눈빛으로 정찰대를 응시하던 그가 신음처럼 뇌까렸다.
“열둘.”
“예?”
“열둘이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게 무…….”
뜬금없는 말에 의문을 표하던 누군가가 문득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진 전, 인근을 둘러보기 위해 떠났던 정찰대의 머릿수는 총 열 명이었으니까.
“그,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겠지. 천운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를 구했거나.”
손때 묻은 철곤(鐵棍)을 허릿춤에서 빼어 들며, 만총이 나직이 덧붙였다.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어떤 개자식들이, 정찰대 행세를 하고 있거나.”
“……!”
“지금 당장 배로 이동한다. 우선 닻을 올리고 거리를 벌린 후에 상황을 지켜볼 것이다.”
“며, 명을 받듭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강가에 정박시켜두었던 배에 올라타 빠르게 노를 저은 개방도들이 충분한 거리를 벌렸을 때쯤에는,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무리가 그들이 피워두었던 모닥불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석삼이, 석삼이 거기 있는가!”
불쑥 울려 퍼진 만총의 외침에, 어느덧 확연히 짙어진 어둠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 여기 있네! 무슨 일인가?”
그 순간, 만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그를 포함한 모든 개방도가 마찬가지였다.
청해호에 머무르던 이들 중, 분타주이자 최연장자인 만총에게 하대를 할 수 있는 개방도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부분은, 짙은 어둠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들이 아는 석삼이의 것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부, 분타주.”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개방도들을 뒤로한 채, 이를 악문 만총이 다시금 외쳤다.
“네놈들은 누구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영원처럼 느껴지는 정적이.
그리고 질식할 것만 같은 그 적막함을 단숨에 깨트리는, 낯선 목소리가 불현듯 울려 퍼졌다.
“이런. 거지새끼들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웃음기마저 묻어있는 들뜬 음성과 함께,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을 향해 윤곽으로만 보이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다닥.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불똥 사이, 일말의 소음도 없이 자갈밭을 가로지른 한 쌍의 인마를 목격한 만총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그는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새하얀 뼈를 훤히 드러낸 해골마의 모습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위에 태연히 앉아있는 사내에게서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히죽.
이질적으로까지 보이는 새하얀 이빨이,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난다.
그뿐인가.
먼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는, 마주한 것만으로도 심신을 옭매는 듯했다.
“네, 네놈은.”
파르르 신형을 떠는 만총을 향해, 사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대충 알잖아. 누구인지.”
더욱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천연덕스러운 태도.
그러나 만총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정찰대는……그들은 어찌 되었느냐.”
“크. 감동적인데. 구걸하면서 쌓은 정이 상당한가 봐?”
“놈!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할까!”
“이거 거지 무서워서 말이야 제대로 하겠나. 알겠어, 알겠으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은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결론만 말하자면, 다들 좋은 곳으로 갔지. 별로 맛은 없었지만.”
“뭐, 뭐라?”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어떠한 짐작으로 굳어버린 만총의 모습에,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 불쾌한 오해는 하지 마. 비루먹은 거지새끼들이라 그런지 몸뚱어리도 영 아니더라고. 장난도 칠 겸 피만 조금 빨아먹은 게 전부니까.”
“……!”
“왜,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영 별로였나? 그래도 목소리는 제법 감쪽같았을 텐데.”
으득.
삽시간에 입안을 물들이는 비릿한 혈향.
그럼에도 만총은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단지 형제나 다름없던 수하를 잃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분노 때문만이 아니다.
그래야만, 이렇게라도 해야만 지금 이 순간에도 더욱 강하게 마음을 옥죄어 오는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사술(邪術).
그 두 글자가 이토록 섬뜩하게 다가왔던 적이 없었다.
백여 장이나 떨어진 상대에게서, 당장이라도 목이 달아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은 것도.
“네놈이구나. 말로만 듣던 그 수괴(首魁)가.”
“뭐,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당장 이곳에서만큼은 그분께 모든 것을 일임받았으니까.”
사내, 아니 혈주(血主)는 미소 띤 얼굴로 만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서 어떤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있는 스무 명의 개방도를 천천히 훑다가, 불현듯 입술을 뗐다.
“그나저나, 누구로 할래?”
“뭐?”
“적어도 한 놈은 살려줄 생각이거든. 너희는 하나라도 살아서 좋고, 나는 말을 전할 놈이 필요하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
“표정들이 볼만하군. 왜, 설마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일백여 장 밖, 딱딱하게 굳은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히죽 웃은 혈주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슬슬 나서지?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그 한마디에, 어둠 속에서 머무르고 있던 인영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스륵.
긴 옷자락이 자갈밭을 스친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혈주를 지나쳐 강가에 다다른 대술사가 손을 뻗었다.
“서늘한 북풍(北風)이여.”
우우우웅.
파르르 떨리는 공기와, 청해호의 수면을 타고 몰아치는 거대한 냉기.
그리고 다음 순간, 보았다.
“얼어붙어라.”
드드드득!
결빙(結氷)과 함께, 새하얗게 굳어버린 청해호를.
“……!”
“……!”
만총이, 아니 스무 명의 개방도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이적(異蹟).
그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 멀리, 짙은 어둠 너머로 괴물들의 끔찍한 악취가 풍겨오기 시작했음에도.
그리고 산보하듯 빙판을 가로지른 혈주가, 뱃머리 위에 올라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을 때도.
“누가 살아남든, 가서 전해라. 내가. 혈주가 간다고.”
그 순간, 만총은 모든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네놈은 결코 이길 수 없을…….”
퍼걱!
새하얗게 얼어붙은 호수 위로, 선홍빛 피가 흩뿌려졌다.
“그래서, 누가 살아남을지는 정했나?”
차갑고 깊은 밤, 혈주의 핏빛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