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
#108화
‘사냥꾼?’
월화의 짐작은 절반만 맞았다. 사냥꾼은 사냥꾼인데, 불청객들의 정체는 조금 더 특별하고 훨씬 더 악랄했다.
“빨리빨리 걸어라, 이놈들아.”
“사내라는 것들이 이렇게 비리비리해서 어디다 써?”
머릿수는 총 열 명.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에, 병장기로 무장까지 했다. 그들의 선두에선 굴비처럼 밧줄로 묶인 포로들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퍽, 퍽퍽!
“아이고, 대혀업!”
“갑니다, 가고 있으니까 제발 그만 좀…….”
“허, 그만? 이놈들이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구나.”
“어허, 적당히 때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라도 하면 값 떨어진다. 가뜩이나 조그마한 놈들이라 제값도 못 받게 생겼구먼.”
“곡마단(曲馬團)에 팔아먹으면 그럭저럭 받겠지. 후딱 들어가서 화주나 한잔하자고.”
“아따, 생각만 해도 침이…… 근데 저건 뭐여?”
인간 사냥꾼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사당 앞에 세워져 있는 사두마차를 응시하던 눈동자들이 스르륵 옆으로 옮겨 간다.
그들의 시선 끝에 나와 월화가 있었다.
“……누구쇼?”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의 질문에 내가 나섰다.
“지나가던 과객.”
“과객이라. 요즘 같은 시기에 돌아다니면 위험한데.”
번들거리는 눈빛이 스스로가 위험한 놈이란 걸 말해 준다.
물론 그래 봤자 겨우 25레벨이라 내게는 위험 축에도 못 끼지만.
“이야, 사두마차에 기막힌 미녀까지. 있는 집 공자님이신가 봐?”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했다면 마차에 새겨진 태원진가의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커먼 밤이었고 놈은 뛰어난 안력(眼力)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없는 집 자식은 아니지.”
“거참. 아까부터 말씀이 짧으시네.”
우두머리가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슬슬 열이 오르는 모양이지만 아직은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있다.
“뭐, 됐고. 이곳은 우리가 며칠 전부터 머무르던 곳인데…… 어쩌겠소?”
“뭘?”
“뭐긴, 약간의 성의를 보여 주면 자리를 내어 드릴 수 있다는 거지.”
“누가 들으면 이 사당이 그쪽 건 줄 알겠네.”
“버려진 곳이니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 아닌가?”
“그럼 부동산 내용 증명서 떼 와.”
“뭐?”
우두머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하들을 돌아봤다. 생전 처음 듣는 용어일 테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는 놈이 있을 리가 있나.
부동산 내용 증명서에 관해 수군거리는 놈들을 향해 쯧쯧 혀를 찼다.
“증명 못 하겠으면 곱게 돌아가라. 거기 잡아 둔 사람들은 풀어 주고.”
“……선을 넘는군. 호위무사라도 기다리나?”
“그런 거 없어.”
“그럼 뭘 믿고?”
“나.”
우두머리의 시선이 내 텅 빈 두 손을 향한다.
“병장기도 없이?”
“너희 정도야 주먹으로 충분하니까.”
“도련님이 어디서 한 수 배우긴 했나 본데…… 무림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무림은 안 우습지. 그냥 너희가 우스운 거야.”
말과 함께 환하게 밝혀진 횃불을 향해 발을 내디딘 그 순간, 얌전히 잡혀 있던 포로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어, 어어어?”
“으어어어! 대형! 대형!”
“이 자식들이 미쳤나. 다들 입 안 닥쳐!”
포로들의 격한 반응에 뒤에 선 놈들이 단검을 뽑아 목에 가져다 댔다. 우두머리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는 놈들인가?”
“아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반응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까지 당황할 정도다. 그리고 갑자기 대형이라니?
“대혀어엉! 접니다! 저흽니다!”
“이놈들은 그쪽을 아는 것 같은데?”
“그거야 그냥 구해 달라고…… 어라?”
나는 포로들을 유심히 바라봤다. 어린애처럼 작은 키에 하나같이 못생긴 얼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체형이 고블린을 닮아서 낯이 익은 건가?’
잠깐만. 고블린?
문득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니, 사실 그리 오래된 기억도 아니다. 불과 몇 달 전 튜토리얼 퀘스트에서 있었던 일이니까.
“설마 그, 천력부랑 같이 있었던?”
포로들, 아니 천력부 장삼의 부하였던 오색귀(五色鬼)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흽니다!”
“대형! 살려 주십시오!”
이놈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황당해하는 내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월화가 물었다.
“진 공자가 아는 사람들이에요?”
“일단은 구면이네요.”
인신매매범과 산적이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조합이다.
방금까지는 구해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살짝 고민되네.
“대혀어어엉!”
“저흴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날 이후 산적질도 그만두고 착하게 살았습니다!”
“…….”
눈치 하나는 귀신이다. 하긴, 천력부가 죽었을 때도 바로 항복해 버린 놈들이니 오죽할까.
“구해 줄 건가요?”
“쓰읍. 일단 구하긴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날 이후 새사람이 됐다는데 이대로 보내기에는 영 찝찝하다. 무엇보다 현직 인신매매범보다는 전직 산적이 훨씬 낫지.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들은 우두머리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구해? 네놈이?”
“다 들어 놓고 뭘 또 물어봐. 너 인생 피곤하게 사는구나?”
“이 애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차차창!
우두머리가 창을 겨누자 수하들도 무기를 빼 들었다. 월화가 짐짓 겁먹은 얼굴로 내 옆구리에 달라붙는다.
“어머, 무서워. 나 꼭 지켜 줘야 해요?”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촉촉한 눈망울. 간절한 표정.
월화의 실체를 아는 나로서는 기가 차는 광경이지만 놈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널 죽여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우두머리의 끈적끈적한 눈빛에 월화가 꺅,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어떡해! 소녀, 너무 무서워요!”
“허허, 너무 겁먹지 말거라. 내 비록 일평생 거칠게 살았어도 마음만은 비단결처럼 고운 사내라는 걸 알게 될 테니. 잠시 후에 몸으로 대화를 나눠 보자꾸나.”
“어, 그전에 나 좀 보자.”
더러운 주둥이를 찢어 놔야 다시는 저딴 소리를 못 하지.
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우두머리가 껄껄 웃었다.
“왜, 막상 싸우려니까 겁이 나나? 하지만 이미 늦었어.”
“그러게. 너, 진짜 큰일 났다.”
“……뭐?”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놈을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좆 됐다고. 인마.”
말이 끝난 그 순간, 땅이 울림과 동시에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쿵, 쐐애애액!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
무서운 속도로 나와 월화를 스쳐 간 그것은 어느새 우두머리의 앞에 서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진무경.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어마어마한 기파(氣波)가 장내를 짓눌렀다. 우두머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덜덜 떨었다.
“요, 용서. 제발…….”
차가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한참 늦었어.”
* * *
어쩌면 진무경은 우리 중 최고의 비폭력주의자일지도 모른다. 불과 십여 초 만에 이어질 모든 불필요한 싸움을 종결지었으니까.
“하,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공포에 질린 얼굴. 모두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고, 누군가가 지린 소변은 언덕 아래로 흘렀다.
그건 오색귀도 마찬가지였다.
“시끄럽다.”
진무경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툭 던진 한마디에 죽음 같은 침묵이 내리깔린다. 눈 한쪽이 시퍼렇게 멍든 혁무진이 내게 속삭였다.
“저 지금 살아 있는 거 맞습니까?”
“어, 귓가에 숨결 닿는 거 소름 돋으니까 좀 떨어져.”
“아까 전만 해도 이렇게 개처럼 맞을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혁무진의 시선은 쓰러진 우두머리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흐윽, 흐으윽.”
사지가 부러지고 단전(丹田)이 파괴당한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잘만 요양하면 다시 걸어 다닐 수는 있겠지만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장이다.
기감으로 파악한 레벨창이 그 증거였다.
[Lv.2 이삼]감시자들이 패밀리어로 쓰던 똥파리가 1레벨이었지, 아마.
한때 일류에 근접했던 25레벨의 무인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버린 범인은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다.
“조장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이공자님께서 피가 부족하신가 봐요.”
“헛소리하지 말고 쟤나 좀 적당한 곳에 옮겨 놔. 저러다가 죽겠다.”
“죽어도 싼 놈 아닙니까? 멀쩡한 양민들 팔아먹던 놈들이잖아요.”
“그래도 옮겨. 아직 살아 있잖아.”
내가 무림과 현대를 오가며 느낀 가장 큰 괴리감 중 하나가 바로 살인(殺人)에 관한 문제였다.
27년간, 법과 질서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았던 나다.
날붙이로 적을 죽이는 법을 단련해 왔지만 그 대상은 몬스터였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이제는 몇 명을 죽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지금까지 내 손에 죽어 나간 적들이 NPC가 아닌 진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을 때도 큰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적이었으니까. 저들도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헌터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무림의 방식에 익숙해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무덤덤한 마음과 단순한 자기 합리화에 스스로 놀랐을 뿐.
‘지금은 이 정도로도 괜찮겠지.’
나는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살아가는 중이다. 어설픈 불자(佛子) 흉내를 낼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들러붙는 생각을 떨쳐 내며 주저앉아 있는 놈들을 향해 다가갔다.
“히익!”
“흐아악, 살려 주십쇼, 대형!”
“이 자식들은 구해 주려고 해도 난리네. 가만히 있어 봐.”
밧줄을 풀어 주자 자유의 몸이 된 오색귀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은인으로 모시긴 개뿔이. 그나저나 어쩌다가 이런 놈들한테 잡힌 거냐? 그것도 다섯 명이 한꺼번에.”
오색귀 놈들이 체구가 작긴 해도 명색이 성인 남자다. 천력부를 따라 산적질 할 정도의 수준은 된다.
“아니, 저 그게.”
“……?”
뭐지, 이놈들.
머뭇거리는 태도에 이상함을 감지한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인신매매범의 멱살을 붙잡고 끌어올렸다.
“이놈들 어떻게 붙잡았어?”
“저, 저잣거리에서 저희 전낭을 슬쩍 하려던 걸 붙잡았습니다.”
“…….”
이런 십색귀들을 봤나. 산적 관두고 농사라도 짓나 했더니 직종을 바꾼 거였어?
“변명해 봐.”
날카로운 내 시선에 다섯 놈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 그러니까.”
“대형, 저희 같은 놈들은 배운 게 그런 것뿐이라.”
“그, 그래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착실하게 일하려고 했는데 영 신통치가 않아서…… 딱 한탕만 치고 빠지자 했던 게 그만.”
“마적단 놈들인 줄 알았으면 건드리지도 않았죠. 저희도 피해잡니다. 대형,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익숙한 단어에 잠시 멈칫했다.
“뭐라고?”
“진짜 딱 한 번만 더 용서해 주시면 착실하게 살겠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저놈들이 뭐라고?”
“아, 마적단 말씀이십니까요?”
“그래, 그거.”
“저희도 잡힌 후에야 들었습니다. 웬 왈패 무리가 기루에서 은자를 뿌리며 다니기에 따라붙었는데…… 마적들 사이에서도 흉악하기로 소문난 적풍단(赤風團) 놈들이었지 뭡니까.”
“적풍단? 확실해?”
“예. 제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맞지?”
다른 놈들도 앞다퉈 한 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떠날 거라고도 했습니다.”
“산음(山陰)까지 가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고. 괜히 늦었다가 목 달아나는 거 아니냐고 걱정까지 하던데요.”
“그렇단 말이지.”
어제, 그리고 오늘. 이틀 연속으로 만난 마적이 하필이면 적풍단 소속인 것도 공교로운데, 산음은 항산검문의 본거지가 있는 응현(應現)과 가까운 곳이다.
“이 녀석들 말이 모두 사실이냐?”
내 오른손에 멱살이 붙잡혀 있던 인신매매범, 아니 적풍단의 마적이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이었다.
삐이익!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한 마리의 매가 사당 앞에 내려앉았다. 발목에 묶인 자그마한 원통이 눈에 들어온다.
‘전서응.’
이거 어째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