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0
1090화
청해성은 엄연히 변방(邊防)에 속하는 지역이다.
천하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광활한 면적과 아름다운 경관을 지녔지만, 물자의 풍부함과 가호(家戶)의 숫자는 중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
그렇기에 누천년에 걸쳐 천하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며 다방면의 문물(文物)을 발전시킨 중원과 비교될 때마다, 청해성의 사람들은 농담 삼아 이렇게 자평하고는 했다.
― 청해와 중원의 공통점은 오직 세 가지뿐이다. 같은 해를 보고, 같은 물(황하黃河)로 이어져 있고, 마지막으로 거지가 있다.
거지는 그만큼 어느 곳에서나 흔해 빠진 존재들이었다.
시끌벅적한 대로변이나 어둡고 지저분한 뒷골목, 혹은 개울가 근처의 움막촌 따위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중원이든 변방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 머릿수가 얼마나 많은지, 천하의 모든 거지를 개방이 흡수한다면 능히 일국(一國)을 세울 수도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니까.
하지만 서서히 동이 틀 무렵, 어스름한 새벽안개를 뚫고 주위를 탐색하던 정찰대에 의해 발견된 어느 백발의 거지는 지금껏 누구도 본 적 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아니, 솜털이 곤두설 만큼 낯설었다.
터벅, 터벅.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틀거리는 발걸음. 혼백이 빠져나간 것처럼 공허한 눈동자.
그리고…….
“전해라. 반드시. 누가 살아남든.”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공포 어린 목소리.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 석상처럼 굳어 있던 정찰대가 뒤늦게 거지의 허리춤에 묶인 두 개의 매듭을 발견한 것은.
“……개방(丐幇).”
틀림없다. 눈앞의 저 거지는 개방에 몸담은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분타주 바로 아랫급의 이결제자.
그리고 정찰대가 출발한 서녕으로부터 서쪽에서 백 리나 떨어진 이곳에서 개방도가 모습을 드러낼 이유는, 그들이 알기로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노인장, 도대체 청해호에서 무슨 일이 있었……!”
그 순간. 다급히 말에서 내려 다가가던 정찰대원이 헛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보았기 때문이다.
희끄무레한 안개 속에서는 그저 노화로 인한 백발로 보였던 개방도의 머리카락이, 사실은 빙하에 갇혀 있던 사람처럼 얼어 붙어 있었음을.
새하얗게 물든 그의 얼굴은 노인이 아닌 청년에 불과했음을.
“이, 이게 무슨.”
한 줄기의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스무 명의 정찰대는 찌르르 울리는 등골을 느끼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다음 순간 들려온 개방도의 한 마디가, 그가 혼신을 다한 마지막 불꽃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전해라. 내가 갈 것이다. 가서, 서녕의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울 것이다.”
“……!”
“……!”
일순간, 정찰대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몸을 떨었다.
그 말에 담긴 무시무시한 살의(殺意) 때문에?
아니다. 틀렸다.
개방도.
그는 웃고 있었다. 동시에 울고 있었다.
마치 이 말을 전하라고 명령한 누군가를 따라 하듯이.
그와 더불어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그리고 온 사방을 짓누르는 그 숨 막히는 침묵 속, 힘겨운 여정을 끝마친 개방도의 몸뚱어리가 흐릿한 목소리와 함께 기울어졌다.
“기다려라. 내가, 혈주(血主)가 돌아 왔…….”
쿵.
썩은 통나무처럼 허물어지는 육신.
아니, 마침내 숨이 끊어진 개방도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찰대원들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이미 마음속에서 싹 튼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곧 마주하게 될 현실을 깨달은 본능적인 직감일까.
저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끔찍한 괴물들이 내지르는 괴성과 악취가 풍겨오는 듯했다.
“……시신을 수습해라.”
간신히 쥐어 짜낸 상관의 목소리에서조차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묻어나왔다.
“서녕으로 돌아간다. 지금 당장.”
* * *
이제는 목 없는 시체가 되어 버린 청해성주의 집무실은 언제 보아도 이루 말할 데 없이 넓고 호화로웠다.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값비싼 흑단(黑檀)을 깎아 만든 탁자는 수십여 명이 동시에 자리할 만큼 컸고, 사천에서도 특등품 취급받는 촉금(蜀錦) 비단을 햇빛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청해성주는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아까워했을 그 요란한 사치품들이, 지금 이 순간 어느 초라한 거지를 위해 쓰이고 있다는 것을.
“이결제자 주제에 이런 호사라니. 거지의 본분을 잊었군.”
궁기방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촉금 비단에 감싸 인 채, 흑단 탁자 위에 올려진 시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 오래 알았던 건 아니지만 썩 괜찮은 녀석이었어.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이결을 허락받을 만큼의 재능도 있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집무실 안에 모여있던 수뇌부 중 그 누구도.
“상황이 괜찮아지면 나중에라도 중원에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고 부탁하길래, 철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역정을 냈었는데……. 제기랄.”
먹먹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궁기방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겠어. 단지 운이 없었던 거지. 이 녀석도, 그들도.”
삼십여 명에 가까운 개방도가 청해호 건너편에 남았지만, 서녕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저 이름 모를 젊은 개방도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도중에 숨이 끊어졌다.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한 정찰대들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하지만 유언(遺言)이나 다름없게 된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는, 이 빌어먹게 호화로운 집무실 전체보다 값진 정보가 담겨 있었다.
“혈주. 혈주라면…….”
불현듯 입을 연 곤륜파의 장문인, 청허자(淸虛子)의 뇌까림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 알고 계시는 그 이름이 맞습니다. 소림혈사(小林血史)를 일으켰던.”
“……!”
“……!”
보이지 않는 파동이 주위로 번진다.
이미 전부터 혈주의 존재를 알고 있던 이들은 말없이 침음성만 흘렸고, 자세한 정황을 몰랐던 이들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화왕 적천강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리웠던 이름이군.”
나직한 음성과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는 표정.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적천강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동시에 그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이제야 그 땡중에게 면이 설 수 있겠어.”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의 방장이자, 법왕(法王)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큼 신망이 두텁던 굉도였지만 적천강은 그를 늘 땡중이라고 불렀다.
일생을 통틀어 몇 안 되는. 아니, 어쩌면 하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친우였으니까.
그렇기에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굉도를 죽인 장본인, 혈주에 대한 원한을.
하지만 지금은 그의 원한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결국 놈들로서도 총력전을 벌일 심산이군요.”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연 젊은 도사, 청허자의 둘째 제자인 학의(鶴義)가 말을 이었다.
“이미 사로잡은 개방도를 구태여 풀어 주었다는 건, 그만큼 승리를 확신한다는 뜻일 테고요.”
“두, 둘째야.”
그와는 달리 옆자리에서 눈치를 보던 사형, 학수(學洙)가 만류하려 했지만 학의는 개의치 않았다.
청해성주에 관련된 지난번 회의 이후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얻게 된 그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적들의 숫자만이라도 알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나은 대책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
그때까지도 말없이 시신만을 바라보던 궁기방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진 것은.
“지금, 뭐라고 했소?”
분노를 내비치는 궁기방을 향해, 학의가 담담한 어투로 대꾸했다.
“단지 아쉬움에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래서? 모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건가? 왜 더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그건…….”
감정이 격해진 궁기방의 모습에 학의가 뭐라 답하려던 그때,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던 한 사람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둘째야.”
다름 아닌 스승, 청허자다.
그의 나직한 부름에 멈칫한 학의가 이내 궁기방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미숙한 탓에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더 이상의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 딱딱한 사죄에 궁기방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진 그때, 청허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빈도가 제자를 잘못 키웠네. 진심을 다해 사과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참 대선배, 그것도 곤륜파의 장문인이 직접 건네는 사과다.
뿐인가.
지금 이 자리에는 그보다 높은 이들도 있다.
궁기방이 아무리 개방의 후개라도 해도 더 이상의 분란은 엄청난 무례로 여겨질 수 있는 상황.
입술을 질끈 깨무는 녀석과 학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때맞춰 전음(傳音)을 흘려보냈다.
― 넘어가자, 우선은.
“……!”
― 아니면 내가 지금 당장 저 사회 부적응자 새끼를 반쯤 죽여 줄 수도 있고. 뭐가 더 나은지 말만 해.
그제야 쓴웃음을 흘린 궁기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괜히 분위기를 흐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일단락되었지만, 학의는 조금도 움츠러든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다행히 적들이 서녕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안에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해야겠지요.”
어째서인지 묘한 어투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줄곧 그를 주시하던 나도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뭡니까. 그 대비책이?”
“진 대협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눈앞의 학의가, 곤륜파의 도맥(道脈)을 이은 그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후방이 완전히 가로막히기 전에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사제, 지금 이게 무슨!”
그러나 참다못한 학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음에도, 스승인 청허자가 침음성을 흘렸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
내부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은 그 순간, 내가 입을 열었다.
“그, 우선 개소리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반박하기도 어렵긴 한데. 우선은 이것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학의를 향해 나직이 덧붙였다.
“혈주, 그 새끼가 그렇게 만만한 놈으로 보입니까?”
나는 곧장 손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군데군데 서리 낀 몸으로 누워 있는 개방도의 시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죽은 육신 군데군데에 남아 있는 저 끔찍한 냉기. 오직 이들 중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익숙한 흔적을 느꼈다.
‘블리자드(Blizzard).’
가공할 위력을 지닌 최고위 빙결(氷結) 마법.
이는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 이미 예상했던 대로 대술사가 저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둘째.
“놈들은 이미 청해호를 넘었어.”
선박 따위는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빙결 마법으로 단단히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면 그만이었으니까.
애당초 개방도를 풀어 준 건, 어디까지나 혈주의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뜻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학의를 향해, 나는 나직이 덧붙였다.
“도망치려면 지금이라도 떠나. 이 겁쟁이 새끼야.”
그리고 그 순간.
드득. 드드드득.
어디선가 들이닥친 진동에, 집무실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서녕 전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