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3
1093화
콰아아앙!
귓가가 먹먹해지는 굉음에 이어 지면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에, 고개를 돌려 등 뒤의 광경을 확인한 적천강이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망구가 나섰군.’
지금 이 순간에도 먼지구름을 뚫고 빗발치는 섬광들.
궁성(弓星)이 진태경을 돕고 있음을 확인하자 비로소 그의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듯했다.
궁성이 합류한 이상 자신의 제자는 안전하다.
적어도 적천강이 목적을 이룰, 잠시 동안만큼은.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괜한 우려였나.’
적천강이 판단하기에, 진태경은 아직 혈주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촌각 전 귓가를 파고든 전음(傳音)을 듣고도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제가 혈주를 끌어내며 시간을 벌 테니, 두 분은 놈들의 본진을 노리는 게 좋겠습니다.’
‘뭐?’
‘걱정하지 마세요. 제 인생 신조가 뭔지 아시잖아요?’
물론 알고 있었다.
그 두께가 굵건 얇건, 무조건 살아남아 길게 가는 것.
하지만 세상일이 단순히 바라는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천하의 무림인들은 초절정 고수가 됐을 테고, 백성은 무병장수했을 터.
그렇기에 적천강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니, 반대하려고 했다.
그 태평스러운 대답에 적천강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진태경은 망설임 없이 뛰쳐나가 혈주와 맞서 싸우기 전까지는.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는, 천하의 어리석은 놈 같으니.’
그러나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어느덧 적천강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창 혈풍(血風)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살성이 참다못해 한마디 할 정도로 선명한 미소가.
“하나뿐인 제자가 예뻐 죽겠는 건 알겠는데, 진짜 이대로 죽고 싶어서 환장…… 흡.”
일순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호흡을 삼킨 살성이 신형을 비틀었다.
쉬쉬쉭!
불현듯 공간을 조각내며 달려든 세 줄기의 검광(劍光)이 한 뼘 차이로 스쳐 지나간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 살성의 옷소매 사이로 섬광이 번뜩였다.
카카캉! 퍼걱!
두 개의 불똥과 하나의 섬뜩한 파육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 같은 갑주로 무장한 채, 살성을 향해 벼락처럼 짓쳐 들던 세 명의 흑의인이 주춤하며 물러섰다.
보다 정확히는, 두 명의 흑의인이.
쿵.
흑의인 중 하나가 썩은 고목 나무처럼 쓰러졌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게 깊게 눌러쓴 투구의 눈구멍 사이에는, 조금 전 살성이 쏘아 보낸 비수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우선 한 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부드럽게 착지한 살성의 한 마디에, 지금 막 화염이 실린 일권(一拳)으로 수십여 명의 적들을 쓸어버린 적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아닐 텐데.”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적천강이 쓰러져 있는 흑의인을 향해 턱짓하며 덧붙였다.
“저런 뜻이지.”
바로 그 순간.
푹.
죽은 줄로만 알았던 흑의인이 스스로 팔을 움직여 투구에 박힌 비수를 뽑았다.
그리고 이어 비틀비틀 일어나 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잠깐 벌에라도 쏘였던 것처럼.
“……!”
말없이 눈을 깜빡이는 살성의 모습에, 적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지긋지긋한 괴물을 처음 봤을 때의 자신이 생각나서였다.
“태경이 그 녀석이 말해 주지 않았나? 하늘이 정한 순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빌어먹을 것들이 있다고.”
그제야 눈앞의 적들이 누구인지 깨달은 살성이 침음성을 흘렸다.
“……흑귀(黑鬼).”
감숙에서의 일은 살성 역시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일어나는 괴물들이 있으며, 놈들의 정체는 하나같이 과거 마교를 주름잡았던 마두(魔頭)들이었다고.
“전설로만 내려오는 생강시(生僵尸)와 비슷한 존재라던데. 사실이었나 보군.”
“생강시보다도 더 개 같은 놈들이지. 움직임만 봐도 느낌이 올 텐데?”
살성의 곁에 선 적천강은 대답과 함께 다시금 공력을 일으켰다. 어느덧 여섯으로 불어난 흑귀들이 사방을 점한 채 다가오는 중이었다.
“쓰러트리는 방법은?”
“노부가 듣기로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더군. 첫째, 죽을 때까지 죽이거나.”
화륵.
적천강의 양손을 타고 백색의 불길이 넘실거린다.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공간 속, 기이한 소리를 내며 가까워지는 흑귀들과 빽빽하게 주위를 감싼 적들의 모습이 밝아졌다.
그 거대한 포위망의 깊은 곳에 숨어서 그들을 조종하는, 또 다른 존재들의 모습도 함께.
“둘째, 머리를 잘라서 팔다리를 무력화시키거나.”
그리고 그 순간.
퍼어엉!
적천강은 온 힘을 다해 쌍장(雙掌)을 떨쳤다.
넘실거리는 화염의 파도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동시에, 지면을 박차며 쏘아졌다.
“방(防)!”
– 그아아아아!
인간과 괴물의 고함이 한데 뒤섞인다.
전후좌우를 빈틈없이 뒤덮은 적들의 사이로 불의 길이 만들어지고, 이에 굴하지 않고 적천강의 앞을 막아선 흑귀들의 사각(斜脚)으로 한 줄기의 예리한 바람이 불었다.
쉭. 서걱!
적천강을 향해 휘둘려지던 검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가장 먼저 달려든 흑귀의 팔을 일검에 베어 버린 살성이 힘주어 외쳤다.
“어서!”
짤막한 외침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선명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적천강은 거침없이 전진하며 일권(一拳)을 말아쥐었다.
그그극.
아지랑이로 뒤덮인 공간의 중심, 극의에 다다른 멸염신권(滅炎神拳)이 백색의 화염을 머금는다.
무려 삼 장에 달하는 거구의 괴물도, 촘촘한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던 암천의 교도들도 그 열기를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일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세상 속에서.
“노부가 바로.”
적천강의 일권이 바람을 짓뭉개며 뻗어 나갔다.
“화왕(火王)이니라!”
콰아아아아아!
공간이 일그러진다. 지면이 주저앉는다.
끔찍하리만치 거대한 열기가 가로막는 모든 것의 뼈와 살을 녹이고, 화염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하얀 섬광이 시야를 가렸다.
화악, 쿠구구구궁!
찰나의 명멸(明滅)과 함께, 비로소 눈앞의 광경을 마주한 적천강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욱.
마치 지친 화룡이 불을 뿜듯,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러나 적천강에게는 전력을 쏟아부은 피로감보다도,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기쁨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치익, 치지지직.
푸르르던 지면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화산지대처럼 검게 그을린 땅과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펼쳐진 한 폭의 지옥도(地獄道)만이 있을 뿐.
푸스슥.
어디선가 불어온 뜨거운 열풍(熱風)에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사체들이 바스라진다.
괴물도, 인간도. 심지어는 운 나쁘게 적천강의 정면을 가로막았던 어느 흑귀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수백에 달하는 적들은 그렇게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이는 어느덧 반경 수십여 장을 뒤덮은 짙은 수증기 너머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적어도 적천강만큼은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바로 그때, 그의 오감을 통해 불현듯 전해진 이질감을 느끼기 전까지는.
스아아아.
지면과 공기를 타고 은밀하게 전해지는 무형(無形)의 기운을 감지함과 동시에, 적천강은 즉각 그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건.’
전력을 쏟아낸 직후 잠시 지쳐 있던 탓일까.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어찌 이토록 짙고 커다란 수증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더불어 왜 저 수증기 너머의 적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지.
‘냉기(冷氣).’
뇌리를 관통하는 두 글자와 함께, 적천강은 어느새 조금 전의 그 끔찍했던 열기를 잊고 조금씩 얼어붙어 가는 지면을 짓밟았다.
파슥.
발끝을 따라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모습.
적천강은 침잠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수증기를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어른을 뵈었으면 응당 인사를 올려야 마땅하거늘, 버르장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년이로군.”
그 순간.
쩌저저적!
적천강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증기가 갈라졌다.
아니,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냉기 너머로, 광범위하게 펼쳐진 얼음의 장벽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앞서 적천강이 떠올렸던 한 사람의 모습도 함께.
“용케도 알아차렸네. 역시 당신다워.”
대술사(大術士)의 대답에, 적천강이 가래를 탁 뱉었다.
“그래, 네년일 줄 알았지.”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무수한 적들 사이에 숨어 있던 술사들마저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기에는 차고 넘치는.
설령 그와 비견되는 초절정 고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피해를 완전히 막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단 하나, 진태경이 마법(魔法)이라 부르는 저 기이한 사술만 아니라면.
“그 녀석의 말이 맞았군. 용케도 살아 있었어.”
“진작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어야 할 늙은이도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이까짓게 뭐 대수라고.”
대술사가 조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만큼 늙었으면 이제 뒷방에서 손주 재롱이나 보며 쉬셔야지, 왜 이곳까지 와서 불장난을 벌이실까.”
“하나뿐인 제자 놈이 재롱을 부린다는데, 그깟 불장난이야 백번 천번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나이도 생각해야지.”
“걱정 말거라. 노부가 아무리 늙었다지만 네년을 잡아 죽이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이룰 수 있을 테니.”
일순간, 면사에 가려진 대술사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적천강의 확신이 느껴져서였다.
치이익.
멸염신권의 열기를 완전히 이겨 내지 못한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빙벽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화왕 적천강. 허명(虛名)은 아니라는 건가.’
내심 뇌까린 대술사가 신중하게 기운을 끌어모으던 그때였다.
침잠한 시선으로 그런 대술사와 그녀를 호위하는 세 명의 흑귀를 응시하던 적천강이, 문득 입술을 뗀 것은.
“하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지.”
실상 초조한 것은 적천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없다.
여섯. 아니 이제는 다섯으로 줄어든 흑귀들에게 둘러싸여 분투를 벌이고 있는 살성이 있고,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제자가 혈주와 싸우고 있다.
이제 약속된 시간은 끝났고, 조금은 아쉽더라도 충분한 성과를 거두었다.
“길을 터라. 모조리 불태워 버리기 전에.”
수십여 장의 거리를 사이에 둔 채,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적천강의 시선과 얼음처럼 차가운 대술사의 시선이 부딪힌다.
그리고 짧지만 긴 침묵 끝에, 대술사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죽일 거야.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더 지껄일 개소리가 남았느냐?”
대답이 없는 대술사를 향해 피식 웃은 적천강이, 쾌속하게 신형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