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4
1094화
시간은 늘 절대적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영역에 있다.
고작 반 각 남짓한 짧은 시간 속,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공방을 이어 가던 진태경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서걱!
옆구리를 타고 전해지는 불같은 통증을 느끼며, 진태경은 생각했다.
어느샌가 하나둘씩 상처가 늘어난 자신의 몸뚱어리가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혈주가 빨라진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하지만 이와 같은 진태경의 생각은, 지금 이 순간 혈주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놈은…… 도대체 뭐지?’
분노에 사로잡혀 핏빛 안광을 줄기줄기 흩뿌리던 혈주의 눈동자는, 어느덧 깊게 가라앉은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세 번.
진태경과는 오늘로 세 번째 만남이다.
처음에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았다.
태원진가가 산서성의 패자로 우뚝 선 그 날, 가문의 수치에서 잠룡(潛龍)으로 거듭난 애송이는 혈주에게 있어 퍽 흥미로운 존재였으니.
일 년 뒤의 두 번째 만남에는 흥미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놀랐다.
화왕의 제자로 선택받은 진태경은 몰라볼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었고, 그보다 더한 독기(毒氣)를 품은 새끼 맹수였다.
그래서 짓밟았다.
더욱 철저하게.
비록 검성의 개입으로 치욕스럽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혈주에게 있어 진태경을 상대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화왕의 가르침 덕분에 맹수로 성장했다고는 하나, 자신과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
하지만 또다시 일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 혈주는 지금까지의 흥미나 놀라움을 넘어선 새로운 감정과 직면하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다름 아닌 경악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것이냐.’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한낱 애송이에 불과했던 진태경의 손에, 어느덧 네 명의 마군과 마후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과거보다도 진일보한 신위(神威)를 갖춘 자신에게 맞서, 이토록 물러섬 없이 맞설 수 있는 것인지.
“놈!”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 위로 다시금 시뻘건 혈광이 솟구친다. 그보다 거대하고 강렬한 도강(刀罡)이 진태경을 향해 쏘아졌다.
쉭, 서걱!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의복 사이로 드러난 살갖이 풍압(風壓)에 의해 찢어졌다.
그러나 그뿐이다.
불과 한 뼘 차이로 도강을 피해 낸 진태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형을 내뻗었다.
팟.
신형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거리가 지워진다.
동시에 저 멀리서 터져 나온 빛살과도 같은 섬광이, 공간을 가르며 쇄도하는 진태경의 어깨너머로 번뜩였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게까지 느껴지는 강기의 화살이.
‘궁성(弓星)……!’
혈주는 이를 악물며 적도(赤刀)를 내리그었다.
꽈앙!
강기과 강기의 격돌.
그리고 그 혼란한 찰나의 틈새를 비집고, 이글거리는 열기가 실린 일장(一掌)이 뻗어 나왔다.
화아악!
주위를 둘러싼 공간이 일렁이고, 올올이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꿈결처럼 시야를 어지럽힌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혈주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감히!”
공력을 실어 터트린 외침과 함께, 혈주는 남은 한 손을 뻗어 코앞까지 다가온 화염을 움켜쥐었다.
아니, 진태경의 일장을.
콰드득!
손과 손이, 핏빛 강기와 화염이 맞부딪히고 뒤얽혔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까무러치고도 남았을 끔찍한 작열통(灼熱痛)도 함께.
치지직.
궁성의 개입으로 반 박자 늦을 수밖에 없었던 반격.
그러나 생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혈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되려 공격을 봉쇄당한 진태경을 향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고작, 이 정도로 날 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고통이라면 이미 이골이 났다.
몇 번, 아니 수십 번도 넘게 목숨을 잃었을 상황 속에서도 그는 죽지 않고 늘 일어섰다.
주인이 내려 준 축복으로. 그 자신의 의지로.
“감히, 감히 네놈 따위가-!”
그리고 그때. 진태경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네놈들, 이라고 해야지. 네놈이 아니라.”
“뭐?”
혈주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한 그 순간.
쉬이이익!
사방에서 힘찬 파공성이 휘몰아쳤다.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구름이 서서히 흩어지고, 그 속에서 일어난 흐릿한 인영(人影)들이 비로소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미안해요, 은인.”
평소와 다르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 그리고 자줏빛으로 물든 두 눈동자.
자하신공(紫霞神功)의 기운을 전신에 두른 청풍의 어깨너머로, 노쇠하지만 맑은 두 줄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무량수불. 본산(本山)의 불청객을 이제야 뵙게 되는구려.”
“그래. 네놈이 바로 그 악독한 마두렷다.”
청허자와 현천진인.
청풍에 이어 곤륜과 공동의 두 장문인마저 모습을 드러내자 혈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그보다는 더욱 신경 쓰이는 존재를 발견해서이기도 했다.
‘궁성.’
묵묵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해 대궁(大弓)을 겨누고 있는 저 여인은 혈주에게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아직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석가인지 나발인지가 찾아와서 그러더군.”
저벅.
뒤늦게 혈주의 귓가에 닿은 발소리와 함께, 자신의 하나뿐인 제자에게 돌아온 스승이 들끓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굉도. 그 땡중을 죽인 개자식을 털끝 하나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리라고.”
“자네 입에서 나온 이상 당연히 헛소리겠지만, 이번만큼은 믿어 주도록 하지. 나도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방법을 생각해 놨거든.”
“전부 사실이야.”
“그래, 그런 것으로 하자고. 아무리 그래도 석가모니가 개자식 운운하진 않았겠지만.”
별다른 인기척도 없이 유령처럼 나타난 살성까지 포위에 합류하자, 혈주는 문득 도산검림(刀山劍林)에 둘러싸인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눈앞의 진태경까지 포함한다면 자신이 상대해야 할 초절정 고수만 무려 일곱.
심지어 그중 셋은 제각각 삼성의 일익이자 그들과 충분히 비견될 십왕의 수좌(首座)였으니, 이는 결코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이것이었느냐? 네놈이 노린 것이.”
콰득.
뒤얽힌 손과 손 사이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금세 녹아 버릴 것만 같던 그의 손은, 믿을 수 없는 회복력으로 화염을 몰아내고 있었다.
치직. 스르륵.
이 순간에도 그을리고 회복하기를 반복하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혈주는 으르렁거리듯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보아라. 정작 포위당한 것이 누구인지.”
진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서로를 향해 맞닿은 손을 타고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혈주의 공력과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괴력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찼으니까.
하지만 깊숙이 가라앉은 진태경의 눈동자와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감각은, 지금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반경 수백 여장에 걸쳐 펼쳐진 또 다른 거대한 포위망을.
그리고 그 선두이자 중심에 선 존재들을.
‘흑귀(黑鬼).’
놈들이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들.
그렇기에 불사(不死)에 가까운 저주를 받은 죽음의 기사들.
다른 세계에서는 데스 나이트라 불리는 그들의 존재감을, 진태경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숫자만 무려 십여 기에 달한다는 것과 철벽처럼 우뚝 선 채 숨 막히는 마기를 내뿜고 있는 그들의 뒤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함께.
‘대마도사. 아니, 대술사.’
이미 예상했었던 바다.
그녀는 그토록 쉽게 죽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제아무리 한발 앞서 예측했다고 한들, 현실의 무거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공멸(共滅)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최악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진태경은 직감했다.
소림혈사 때보다도 더욱 강한 무위와 이능(異能)을 갖추게 된 혈주와 대술사가 있는 한, 모든 흑귀를 쓰러트린다 해도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는 미지수였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갈등에 휩싸인 것은, 비단 진태경뿐만이 아니었다.
‘진정…… 이놈을 살려 두어야 한단 말입니까?’
주인에게 전하고 싶은 그 한마디를, 혈주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물론 그도 안다.
천주(天主).
세상 그 누구보다 그리 불릴 자격이 있는 자신의 주인이 눈앞의 저 빌어먹을 놈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그렇기에 네 명의 마군과 마후들이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되려 그들을 비웃고 욕했었다.
단지 그들의 나약함 때문에?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혈주가 죽은 이들을 욕했던 이유는, 그들이 주인의 명령과는 달리 진태경으로 하여금 몇 차례나 생사의 고비를 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군. 그 연놈들이 어찌하여 널 죽이려 했는지.’
지금 이 순간, 혈주는 그들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했다.
또한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사건건 암천의 행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자, 고금(古今)을 통틀어 전례 없는 성장 속도를 보여 주고 있는 진태경을 그토록 원하고 있는 주인의 마음을.
언제나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당신을 목숨 바쳐 섬기는 충복들보다, 진태경의 안위를 더욱 중요시하는 천주의 모습을.
‘천주시여. 내 하나뿐인 주인이시여. 부디 이 종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지금이라도 이 샛노란 싹을 잘라 내라고.
아니, 어느새 거목(巨木)이 되어 버린 진태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라고.
혈주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청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의 음성은 주인에게 닿지 않을 것이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으득.
일순간, 이를 악문 혈주는 전신에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실어 손을 떨쳤다.
쾅!
굉음과 함께 열 걸음을 물러난 진태경을 향해, 혈주가 씹어뱉듯이 입을 열었다.
“다음은 없다. 네놈을 죽일 것이다. 기필코.”
그리고 그 순간.
부우우우!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를 단번에 끊어버리는, 웅혼한 뿔피리 소리가 저 멀리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