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5
1095화
부우! 부우우우!
수백여 장의 공간을 가로지른 웅혼한 뿔피리 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그 순간, 진태경은 문득 생각했다.
이와 비슷한 소리를,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다고.
축축하고 어두컴컴했던 수천 리 밖의 땅, 바로 남쪽의 끄트머리에서.
‘……설마?’
섬광처럼 머리를 스친 어떠한 짐작과 함께, 진태경은 크게 뜨인 두 눈으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볼 수 있었다.
어느덧 저 멀리에서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구름 사이, 상당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확연하게 눈에 띄는 커다란 코를 휘날리며 이곳으로 달려오는 거대한 존재들을.
‘저건.’
그것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코끼리였다.
그 어떤 맹수보다, 아니 육지와 강에 서식하는 모든 것들을 통틀어 가장 크고 강인한 생명체.
그리고 중원인들이 상(象)이라 부르며 신비롭게 여기는 저 동물들은, 진태경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존재이기도 했다.
코끼리를 포함한 수많은 동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에, 저들을 조련하여 길들이고 죽은 후에는 아름다운 상아(象牙)를 깎아 뿔피리를 만드는 이들과 잠시나마 함께 했었으니까.
“남만야수궁(南蠻野獸宮)! 남만야수궁이 왔다!”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성벽 위,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에 달하는 코끼리 떼를 발견하고 한껏 고양된 혁무진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보고 있냐, 이 개자식들아!”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성벽 아래의 격전을 지켜보며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켰던 혁무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붙어, 제대로 붙어! 이제는 우리도 쪽수로 엥간치 꿇리지 않는다 이거야!”
혁무진의 확신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남천마후(南天魔后)의 흉계로 인해 벌어진 엄청난 파란이 수습된 직후부터 남만야수궁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움직였다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대대적인 이동이었다.
내부에서 자라난 병든 싹을 모조리 숙청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득한 과거부터 선조들이 머무르던 터전마저 버렸으니까.
야수묘왕(野獸苗王) 야율척은 남만의 밀림을 피로 물들게 한 암천의 흉계에 그 어느 때보다 분노했고, 의형제였던 백상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했으며, 동시에 이 크나큰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 준 중원의 이방인들에게 가슴 깊이 감복했다.
그리하여, 야수묘왕의 중심으로 완전히 하나가 된 남만야수궁은 마침내 무림맹으로의 입맹(入盟)과 동족의 복수를 맹세하며 피로 얼룩진 고향을 떠났다.
물경 수만에 달하는 모든 남만인들과, 그들이 거느린 숱한 맹수들도 함께.
그리고 사천에 머무르고 있어야 할 남만야수궁의 전력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만야수궁에, 사천당가에, 청성과 아미까지 한 묶음으로 왔을 거다! 네놈들은 이제 전부 다 뒈졌어!”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 부르짖음는 혁무진의 모습에, 압도적인 암천의 군세 앞에서 바짝 얼어붙어 있던 성벽 위의 아군들도 그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와아아아!”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그래, 이 개자식들아! 시원하게 한번 붙자!”
들려오는 풍월로는 소왕국이나 다름없다는 남만야수궁의 전력에 더하여, 천하 무림 그 자체를 상징하는 명문대파가 무려 세 곳이나 합류한 상황.
그렇기에 이미 패배를 직감하고 체념하던 이들도, 마음속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희망을 부여잡고 있던 이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온 힘을 다해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단숨에 성벽 위를 뒤덮은 그 환희의 물결 속에서도, 어째서인지 더욱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저 멀리 다가오는 먼지구름을 응시하는 이가 있었다.
‘남만야수궁으로 모자라 사천의 다른 세 문파까지? 저들은 결코 사천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유난히도 우뚝 솟아 있는 태산의 어깨 위에 걸터앉은 채, 노회한 시선으로 성벽 너머를 바라보던 남호는 천천히 자신의 머릿속을 되짚었다.
남만야수궁의 전력. 이미 서천마군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은 바 있던 사천 무림의 현재 상황.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까지.
‘사천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광활한 땅. 그 광범위한 전선(前線)을 생각한다면 황군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한데 어떻게?’
작금의 천하는 무림과 국가의 경계선마저 사라진 가파른 산비탈과 같다.
암천이라는 눈덩이는 이미 반세기 전부터 굴러가고 있었고, 만근거석(萬斤巨石)이나 다름없게 된 적들은 눈 덮인 산비탈을 구르고 굴러 그 아래의 마을을 덮치기 일보 직전이다.
아니, 천하를.
그렇기에 무림맹 또한 이런 상황에서 청해를 구원할 별다른 묘수를 떠올리지 못했을 터다.
조금이라도 공백이 생긴다면, 암천은 예리한 송곳이 되어 그 공백을 파고들 테니까.
단지 표면을 찌르는 것이 아닌 내부 깊숙한 어딘가, 이동진이라는 기괴한 술법을 사용해서.
심지어 현재 사천 무림이 처한 상황은 중원의 어느 지방보다도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좋지 않은 것을 넘어,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내부 어딘가에서 유령처럼 나타날 적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진정으로 저들이 자신들의 본거지마저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것이라면, 사천과 맞닿아있는 서장(西藏)의 적들이 곧장 사천을 넘어 중원으로 향할 수도 있…….’
그 순간.
남호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얽히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던 수많은 생각이 단숨에 증발했다.
그리고 등골을 타고 흐르는 한기를 느끼며 얼어붙은 그의 귓가로, 누군가의 나직한 탄성이 흘러들어왔다.
“키야, 저렇게 많은 상(象, 코끼리)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높은 곳에서 보니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구먼. 역시 남아 있길 잘했어.”
대인(大人).
바로 그였다.
궁성과 청풍을 비롯한 다른 초절정 고수들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는 마치 구경꾼처럼 태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독특하긴 하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동네라고 듣긴 했지만, 남만 사람들은 죄다 저렇게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니나?”
그때,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 있던 남호가 벼락처럼 고개를 돌려 대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냐니?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한 것뿐인데.”
고개를 갸웃거린 대인은 수백여 장 밖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먼지구름을 가리켰다.
수십여 장이나 되는 높이의 성벽 위라는 조건과 초절정의 안력(眼力)을 갖춘,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광경을.
아니.
정확히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은 희뿌연 먼지구름 속, 붉고 노란 의복을 두른 채 코끼리 떼를 앞세워 진군하고 있는 수천여 명의 무리를.
“어라? 가만. 지금 다시 보니…….”
그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대인이, 턱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꼭 승려 같기도 한데?”
그 순간.
어느덧 슬슬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 은영각 요원의 입술 사이로, 그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고함이 뛰쳐나왔다.
“이 염병할 호래자식아! 포달랍궁(布達拉宮)이잖아!”
그와 동시에.
부우우우!
웅혼한 뿔피리 소리에 맞춰, 수백 마리의 코끼리를 앞세운 포달랍궁의 군세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21세기의 현대와 이 세상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흡사한 것도,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그리고 세인들이 서장(西藏)이라 부르며 중원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새외(塞外)로 규정지은 땅은, 내가 이해하기로 후자에 가까웠다.
서장.
무림에서 나만이 아는 다른 명칭으로는, 티베트(Tibet).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쌓고 살아가는 또 하나의 종교 집단, 포달랍궁(布達拉宮).
그것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저 거대한 먼지구름의 정체였다.
뿌우우우!
수백 마리의 코끼리 떼가 동시에 울음소리를 토해 내며 미친 듯이 달려온다.
지금 보니 길고 아름다워야 할 상아는 어디에 한 번 튀기기라도 했는지 거무튀튀했고, 벌겋게 달아오른 눈깔은 이미 맛이 갔다.
‘저딴 게…… 내가 알던 코끼리?’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느꼈다.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저 코끼리들은 엄마 손을 잡고 갔던 동물원 철창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도, 남만에서 보았던 것들과도 그 궤를 달리했다.
덩치, 광기, 흉포함. 그 모든 것에서.
어릴 적 보았던 아기코끼리 덤보?
지랄하지 마라.
만약 원작자가 저 미친것들을 소재로 삼았다면, 내가 본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일단 아기인데 존나 쎈 코끼리 천마군림보’가 되었을 테니까.
구구구구궁!
진짜 천마군림보라도 쓰고 있는지 지축이 요동친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쩍쩍 갈라진다.
반지 부수는 난쟁이 영화에서나 보던 거대 코끼리들을 실사화로 마주한 청풍이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감상평을 중얼거렸다.
“으아, 저런 건 진짜 태어나서 처음 봐요…….”
나도 처음이야, 시발.
그 한 마디가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유?
간단하다.
상당한 거리를 빠르게 좁히며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포달랍궁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싼 암천의 군세가 있었으니까.
“생각보다도 일찍 도착했군. 운 좋게도.”
어느덧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혈주가 말을 이었다.
“물론, 네놈들에게는 더없는 불운이겠지만.”
나는 대답 대신 창대를 힘껏 움켜쥐었다.
점입가경이다.
가뜩이나 불리한 형세에, 생각지도 못한 서장의 포달랍궁까지 암천에 가세하다니.
‘처음부터 사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물론 이런 상황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확률 자체는 희박하다고 여겼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암천이 서장에 잠자코 있던 포달랍궁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사천의 전선을 틀어막고 청해성으로 향할지도 모를 지원군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혈주가, 아니 그의 뒤에 있는 천주(天主)가 청해성의 일을 통해 반드시 얻고자 하는 것은 중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 따위가 아니었다.
‘나. 바로 나였어.’
비로소 찾아온 깨달음과 함께, 거대한 바위가 가슴 한구석을 짓눌렀다.
더없이 무겁고. 저려올 만큼.
“도대체 어째서?”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짤막한 물음.
그러나 내 말뜻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혈주는 선선히 대꾸했다.
“너는 호숫가에 드리워진 낚싯대가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뭐?”
“나도 모른다. 다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이지. 저들로 하여금 사천을 공격했다면 중원으로 향할 길이 뚫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분께서는 생각이 다르시더군.”
“……!”
“걱정하지 마라. 오늘만큼은 살려 주겠다는 그 약속은 지킬 테니. 다만 한 가지는 똑똑히 알아 둬. 너희는 이미 그물에 갇혔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에.”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낮게 깔린 혈주의 전음(全音)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하루. 앞으로 단 하루의 시간을 주마. 그 안에 스스로 근맥을 끊고 투항한다면 너 이외의 다른 이들은 살려 주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얼어붙은 나를 향해 혈주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그분, 내 유일한 빛이자 하늘이신 천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게 내 마지막 자비이자 네 사람들을 살릴 유일한 길이야.
그것으로 끝이었다.
혈주의 손짓을 따라 갈라지는 포위망과 함께, 그의 입가에 걸린 조소가 내 폐부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