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96
1096화
구구구궁.
거대하면서도 육중한 서녕의 철문이 천천히 입을 벌린다.
조금 전 혈주의 손짓과 함께, 좌우로 갈라진 포위망을 벗어나 성문으로 향하는 적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술사가 입술을 뗐다.
“너무 쉽게 풀어줬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직하게 대꾸한 혈주가 드높이 우뚝 서 있는 성벽을 턱짓하며 덧붙였다.
“이대로 곧장 일전을 치렀다면,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거야.”
대술사도 어느 정도는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변방 중에서도 변방에 속한 청해성은 오랜 과거부터 혹시 모를 외적(外敵)의 침입에 맞서 준비되어 있는 최전선.
그래서인지 거대한 암석을 다듬어 쌓아 올린 석벽은 중원에 비할 수 없이 단단했고, 그 위에는 이미 은빛 화살촉이 번뜩이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서녕의 성문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창칼의 숲도 함께.
“궁지에 몰린 만큼 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을 거다. 놈들에게도 무언가를 물어뜯을 이빨은 있으니.”
하찮은 쥐새끼조차 상황이 위급하다고 판단되면 고양이에게 달려드는 법인데, 하물며 저들이야 오죽할까.
게다가 초절정 고수만 무려 일곱.
아니, 끝끝내 성벽 아래로 내려오지 않은 대인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까지 포함한다면 총 여덟이나 된다.
더불어 별다른 손실 없이 일찌감치 서녕에 집결한 청해 무림인과 관군들까지 있으니, 혈주의 판단도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대술사가 생각하기에 그가 이러한 판단을 내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확신이 없었던 거야. 그분의 뜻대로 진태경을 생포할 수 있을 거라는, 아니 어쩌면 그것을 넘어 승리에 대한 완전한 확신조차도.’
그러나 마음속에서 맴도는 그 생각을, 대술사는 굳이 소리 내어 내뱉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혈주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인간군상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같은 주인과 목표를 공유하는 그의 역린(逆鱗)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진태경을 비롯한 초절정 고수들을 순순히 돌려보낸 혈주의 판단에 일부나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뭐,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분께 청해성의 일을 가장 먼저 위임받은 건 내가 아니니까.”
“별일이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공과 사는 구분하는 편이야.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거라는 건 나 역시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고.”
초절정의 경지에도 급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조금 전 그들이 포위하고 있었던 일곱 명의 초절정 고수들은 평범한 수준을 훌쩍 벗어난 존재들이었다.
비록 진태경의 활약상에 의해 조금 가려진 부분이 있지만, 타고난 무재(武才)만 따지자면 고금제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화산신룡 청풍.
공동과 곤륜이라는 저 유서 깊은 두 도맥(道脈)을 이끄는 현천진인과 청허자.
별다른 수식어조차 필요가 없는 궁성과 살성, 그런 그들과 비견되는 화왕 적천강.
마지막으로, 지난 행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변수나 다름없다는 것을 증명해 온 열화신룡 진태경까지.
그 압도적이면서도 화려한 면면들을 보고 있자면, 불사에 가까운 흑귀(黑鬼)들의 존재감마저 흐릿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졌다면, 최소한 우리의 안위를 떠나 저것들은 전부 소멸을 피하지 못했겠지.”
묵묵히 서 있는 흑귀들을 가리키며 입을 연 대술사가 덧붙였다.
“물론, 이미 하나는 형태도 못 남긴 채 녹아 버렸지만.”
그만큼 적천강이 전력을 다한 일격은 강력했다. 그녀가 펼친 방어 마법마저 일부나마 파훼시킬 정도로.
“거기에 더해, 살성과 궁성까지 끼어든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 게다가 진태경은…… 나로서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
강자 지존의 무림에서 힘의 논리는 정직하다.
강자가 약자를 병탄하고,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대술사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오직 한 사람, 진태경만큼은 그 논리에서 누구보다 멀찍이 벗어나 있는 존재였다.
비록 매번 생사를 오가는 위기 때마다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해도, 네 명의 마군과 마후를 쓰러트린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왜 선택받은 자라 불리는지 납득이 될 만큼.
“그런 이유에서겠지. 그 아이가 가진 특별함이, 그분을 그토록 집착하게 만드는 거야.”
미약한 탄성마저 담긴 대술사의 음성을 들은 혈주의 입매가 비틀렸다.
‘집착. 집착이라…….’
마음속 뇌까림과 함께, 그는 어느새 서서히 닫혀 가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성문 사이로 사라져가는 진태경의 뒷모습을.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불현듯 떠올렸다.
‘너는 호숫가에 드리워진 낚싯대가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비단 진태경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조 섞인 질문이자, 이 자리에 없는 천주에게 건네는 간곡한 투정이었다.
‘왜 저 녀석만 당신께 특별한 존재인 겁니까. 도대체 왜?’
지금 이 순간, 혈주에게 있어 가장 죽이고 싶은 존재는 자신의 팔을 한 차례 빼앗아 간 매종학도, 적천강도 아니었다.
바로 진태경이었다.
불과 이 년 남짓한 시간 만에 거목으로 성장한 애송이.
하지만 이제는 한 걸음으로 짓밟을 수 있는 샛노란 새싹 따위가 아닌, 깊은 뿌리와 굵은 가지를 지니게 되었음에도 그의 주인은 당신의 하인들에게 벌목(伐木)을 허락하지 않았다.
‘천주이시여. 당신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 어리석은 종복으로서는 도무지 짐작하기 어렵나이다.’
낚싯대.
미끼를 문 대어(大魚)의 힘을 이기지 못해 부러진다 해도, 그저 교체하면 그만인 낚싯대.
스스로의 의지로 내뱉은 그 세 글자와, 그것에 담긴 의미가 유난히도 무겁게 혈주의 가슴을 짓눌러 오던 그때였다.
부우우우!
길게 울려 퍼지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서서히 속도를 줄인 포달랍궁의 군세가 이십여 장 밖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철탑처럼 우뚝 멈춰 선 수백 마리의 코끼리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치장된 열세 마리의 코끼리가 앞으로 나섰다.
쿵, 쿠웅!
천천히 고개를 든 혈주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
육중한 굉음을 토해 내며 혈주의 앞까지 도달한 코끼리들의 머리 위로, 누군가의 음성이 떨어져 내렸다.
“오랜만이오, 시주.”
중원인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 같은 어눌한 한어(漢語).
하지만 그 음성에 실린 막강한 공력과 위엄은 일파의 대종사(大宗師)만이 지닐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고, 선명한 분노마저 실려 있었다.
“한데.”
파팟!
거친 파공성과 함께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는 열세 개의 신형.
그 중심에는 마치 말라 비틀어진 고목 나무처럼 호리호리한 키와 앙상한 뼈마디를 지닌 노승이 있었다.
“빈승(貧僧)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한 상황인 것 같구려.”
하나의 왕국처럼 서장을 지배하는 포달랍궁의 궁주, 혹은 그들만의 오랜 관습으로는 달뢰라마(達賴喇嘛)라 칭해지는 노승이 형형한 안광으로 혈주를 응시했다.
“왜 저들을 그대로 보내 준 거요? 빈승이 제아무리 늙어 눈이 흐릿해졌다고는 하나, 멀리서 보기에도 분명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거늘.”
상념에서 깨어난 혈주는 고개를 돌려 이미 굳게 닫힌 성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상당한 전력을 이끌고 와준 달뢰라마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궁주시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지만 매우 보기 드문 혈주의 친절한 태도에도, 달뢰라마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지극히 폐쇄적인 종교 집단의 수장인 그가 수십여 년 전 암천의 제안에 응하여 동맹 관계를 구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포달랍궁의 서장의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청해까지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곳에 있었으니까.
“하면 설마 하는 노파심에 묻건대.”
어눌함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운 어조로, 달뢰라마가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시주께서 돌려보낸 적 중, 혹 혹 빈승이 찾고 있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은백색의 면사 너머로 대술사의 입술이 달싹인 것은.
–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잊지 마. 적어도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포달랍궁은 제법 쓸모있는 패라는 사실을.
대답하기도 전에 한발 앞서 귓가를 파고든 대술사의 만류에, 혈주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리의 목적, 이라고?’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그 한마디가, 지금만큼은 어째서인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도.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언제든 갈아 치울 수 있는 낚싯대에 불과한데.
‘내 목적은 처음부터 줄곧 하나뿐이었다. 몸과 마음을 다해 그분을 보필하여, 만천하의 주인이자 어버이로 군림토록 돕는 것.’
그러나 어째서일까.
도대체 왜.
자신의 주인이, 위대한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이 광대한 천하가 아닌 한 청년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하.”
끝끝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실소.
그런 혈주의 모습에 달뢰라마의 눈빛이 더욱더 깊숙이 가라앉았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소만.”
혈주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뭐,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건, 설마?”
“맞습니다. 화왕 적천강. 그리고 열화신룡 진태경. 궁주께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열화문(烈火門)의 종자들도 저들 중에 있었지요. 아, 그러고 보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달뢰라마의 발치를, 혈주가 곧게 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지금 서 계신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군요. 물론, 어디까지나 촌각 전의 이야기지만.”
“……!”
“……!”
일순간, 주위의 공기가 요동쳤다.
그것은 달뢰라마가, 더불어 포달랍궁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이루어진 십이밀승(十二謐僧)이 뿜어내는 기세였다.
“그렇게 쉽게 돌려보냈다는 건가? 빈승이, 아니 우리가 얼마나 열화문을 증오하는지 알면서도?”
불현듯 달뢰라마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열사(熱沙)의 사막처럼 건조한 음성.
지금 이 순간, 광대한 서장 무림의 지배자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열화문.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포달랍궁의 밀승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저주받을 이름.
단지 필요 이상으로 호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불교의 한 종파였던 포달랍궁을, 강력한 무력을 지닌 하나의 교국(敎國)으로 변모하게끔 만든 존재들.
“감히 약속을 어기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지?”
“이거 참…….”
어느덧 자연스러워진 하대와 함께, 서릿발 같은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달뢰라마의 모습에 혈주가 피식 웃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마십시오. 이백 년이나 낡은 그 눈물겨운 사연도, 서로 간에 오간 그 끈끈한 약속도.”
“뭐라?”
대수롭지 않게 돌아온 대답에 달뢰라마가 눈을 부릅뜬 그때. 혈주가 나직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한데, 저와 달리 궁주께서는 까맣게 잊어버리신 모양입니다.”
“잊었다니. 그게 무슨.”
“본인이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지금의 포달랍궁이 있기까지 그분께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지.”
“그건.”
일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달뢰라마의 모습에, 혈주가 작게 혀를 찼다.
“앞서 말했듯이,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궁주께서 진태경을 사로잡는 것에 크게 일조하신다면, 화왕 그 늙은이의 신병은 물론이고 충분한 보상을 드리지요.”
잠시 침묵하던 달뢰라마가 무겁게 입술을 뗐다.
“그 말,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왜, 못 믿겠습니까?”
“그분은 믿네. 하지만 자네는 놈들을 빈승의 눈앞에서 놓아줬지.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혈주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달뢰라마가 내비치는 불신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그가 가소로웠기 때문이었다.
암천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현재까지 포달랍궁의 일구어 낸 전력은 분명 강력하다.
그중 최고의 고수인 달뢰라마의 무위 역시 말할 것도 없다. 당장 적천강을 제외한 십왕(十王)의 한 사람과 맞붙는다 해도 결코 아래가 아니었으니.
그러나.
‘딱 그 정도야. 당신은.’
무위의 고하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내면의 그릇의, 사람 자체의 문제다.
그렇기에 혈주가 무엇을 예상하고 저들을 풀어줬는지 이미 알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대술사와 달리, 달뢰라마는 눈앞의 대어를 놓쳤음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저는 모든 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빈틈조차 없이.”
뭐라 말하려던 달뢰라마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혈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바로 오늘쯤일 것이다.
장강수로맹이 이끄는 수백 척의 함선이 마침내 청해로 이어지는 황하(黃河)의 지류에 접어들고, 녹림맹이 사전에 합류한 일만의 교도들과 함께 그들과 접선하는 것은.
“앞으로 하루, 길어도 이틀. 그 안에 이 전투는 끝납니다.”
가파른 물살을 가르고 청해에 도달하여 아주 미세한 틈새마저 틀어막을, 총 삼만의 추가 병력.
그것이 이 전투에서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줄 마지막 열쇠였다.
진태경에게 하루 동안 생각할 말미를 준 것 역시도.
약속?
애초부터 지킬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내심으로는 부디 진태경이 스스로 사지근맥을 끊는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진태경이 결사항전을 각오해야만 놈을 죽일 수밖에 없는 명분이 생기니까.
‘천주시여, 용서하소서. 설령 당신께서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해도, 제 행동은 오직 충심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스스로의 죄를 고하듯, 마음속 깊이 뇌까린 혈주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진 안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달뢰라마를 향해.
“입 닥치고 있어. 두 번 다시 내게 하대하는 순간 그 아가리를 찢어 버릴 테니까.”
“……!”
순간 얼어붙은 달뢰라마를 보며, 혈주는 광포하게 웃었다.
누군가에게 낚싯대 취급을 받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