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05
로그인 무림-1105화(1105/1141)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외침(外侵) 때문일까.
현재 서녕을 둘러싼 네 면의 성벽은 그 길이만 무려 십 리에 달하는, 중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굳건함과 광활한 면적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는 법.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보강된 성벽은 외적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막아 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수비해야 할 범위도 증가했다.
그에 따라 수성 측은 상당한 거리 차이로 인해 아군과의 소통이 곤란하지 않도록 방편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곳곳에 배치한 전고(戰鼓)와 깃발을 이용한 방식으로.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불현듯 서쪽에서 솟구쳐 오른 핏빛 섬광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화아아악.
해 질 녘 노을이 수십, 수백 개가 겹쳐진다면 이런 광경일까.
느려진 세상 속, 도무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 기현상을 목격한 무수한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십여 개의 망루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이 맡은 전고와 깃발을 치고 휘두르던 병사들도, 서녕 중심부의 내성(內城)에 숨어 제 혈육들을 끌어안은 채 문틈 사이를 엿보던 백성들도.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들에 맞서 싸우던 관과 무림의 연합군과 그런 그들의 중심이자 선두가 되어 쉴 새 없이 적을 베어 넘기던 초절정 고수들까지도.
그리고 그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등골을 타고 솟구치는 오싹한 한기를 느낀 순간.
팟.
마침내, 서쪽 성벽을 타고 솟구친 핏빛 섬광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아니, 선명하고도 섬뜩한 붉은 빛무리와 함께 함께 폭발했다.
구구구구궁!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
지면이, 암석으로 이루어진 성벽 전체가 뒤흔들린다.
뒤이어 서쪽 성벽을 넘어 들이닥친 거대한 여파가, 석상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위험……!”
콰아아아아!
누군가의 외마디 외침을 집어삼키며 사방을 휩쓰는 바람.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은 북문(北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먼지와 부서진 암석, 심지어는 주인 잃은 날붙이까지 뒤섞인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모두가 자세를 낮추고 엄폐물을 찾아 몸을 날렸다.
이 순간에도 선두를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화륵, 퍼어엉!
거칠게 내뻗은 일권(一拳)과 함께 터져 나온 화염이 공간을 살라 먹는다.
자연재해와도 같았던 폭풍조차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북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군을 향해 날아들던 모든 것들이 단숨에 증발했다.
스아아아.
어느덧 온순해진 바람에 실려 천천히 흩어지는 잿가루.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위협 속에서 아군을 지켜 낸 그, 화왕(火王) 적천강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침잠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도대체.’
비록 십왕의 수좌로 머무르고 있으나, 이미 삼성(三星)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그다.
그렇기에 온 피부로,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앞서 서쪽에서 솟구친 저 아득한 핏빛 섬광에, 얼마나 거대한 힘이 담겨 있었는지.
더불어 이백여 장도 넘게 떨어진 북문까지 이 정도의 여파가 미칠 정도라면, 저 기현상의 근원지인 서문의 상황은 어느 정도일지.
‘혈주(血主), 네놈이 어찌.’
적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과거 숭산에서 맞닥트렸을 때보다도 확연히 진일보한 혈주의 무위도 무위였지만,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불안감과 함께 떠오른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제가 서문을 맡겠습니다.’
진태경.
자신의 제자가 전투 직전에서야 던진 그 한 마디에, 적천강은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었다.
‘불가.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일 시간에 일주천이라도 한 번 더 하거라. 괜히 까불대다가 칼 맞지 말고.’
‘공력 빵빵하고, 칼은 뭐 적당히 맞겠죠. 그러니까 서문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안 된다고 했다.’
‘아니, 왜요?’
‘몰라서 묻느냐? 저 빌어먹을 놈은 오래전부터 노부의 몫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그날의 혈채(血債)를 받아낼 것이다.’
적천강의 대답은 사실인 동시에, 사실이 아니었다.
이는 오랜 벗이었던 굉도의 복수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서문에는 혈주를 포함한 적들의 주력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는 이유가 더욱 컸으니까.
앞뒤 안 가리는 천둥벌거숭이에, 예의라고는 진즉 밥 말아 먹은 놈이지만 하나뿐인 제자다.
어느덧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해진, 그런 제자를 가장 위험한 곳에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물론, 그 쑥스러운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기에는 그의 제자 역시 스승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또, 또, 괜히 걱정하시네. 이젠 안 그럴 때도 됐는데.’
‘……걱정은 개뿔이. 하여튼 절대 불가인 줄만 알고 있어라.’
‘괜찮다니까요. 비명횡사할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제가 미쳤어요? 이러는 것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러는 거지.’
‘믿는 구석이라니?’
‘이미 아시잖아요. 천주가 이렇게까지 절 원하는 이상 저놈들은 제 털끝 하나 못 건드립니다. 음, 뭐 약간 다칠 수는 있겠지만요.’
‘그건.’
그 의견에는 적천강으로서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분명 숭산과 사천을 둘러싼 사건 이후부터, 남천마후를 비롯한 강적들은 진태경의 목숨을 취하는 것에 있어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모든 추측은 감숙성에서의 전투로 확실해졌으니까.
그리고 흔들리는 스승의 모습에, 진태경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제가 어느 쪽을 맡건, 놈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인 저를 따라올 겁니다. 그럴 바에는 제일 방비가 잘 되어 있는 서문을 맡는 게 나아요. 안 그렇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고, 결국 적천강은 뜻을 꺾고 마지못해 북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적천강은 그때의 결정을 가슴 깊이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혈주의 무위는 그가 짐작한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적천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던 진태경의 거짓말은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웠다.
‘이대로는…… 녀석이 위험하다.’
앞서 모두의 눈앞에서 펼쳐진 저 일격은, 결코 살심(殺心)을 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위력.
그렇기에 젊어진 육신과 달리, 여전히 늙은 마음을 지닌 스승은 조급해지는 자신을 느끼며 서쪽을 향해 신형을 돌려세웠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바로 다음 순간, 성벽 너머에서 송곳처럼 쏘아진 한 줄기의 예리한 살기(殺氣)를 느끼기 전까지는.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시주.”
나직한 음성.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수 갑자의 공력은 북문 일대의 공간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일찍이 남만야수궁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코끼리의 등 위에 우뚝 선 노승(老僧)이 발산하는 그 무시무시한 기파 역시도.
“시주가 이리 가 버리면, 빈승이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없지 않겠나.”
한없이 왜소한 체구와 지난 세월을 증명하는 자글자글한 주름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거인과도 같았고, 적천강은 이미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노승, 아니 포달랍궁의 궁주인 달뢰라마가 저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북문에 나타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노렸군. 처음부터.”
불현듯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침음성.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달뢰라마의 음성은, 불길한 짐작이 확신으로 굳혀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열화문(烈火門)의 명맥은 끊어질 것이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순간.
부우우우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밀려드는 포달랍궁의 군세를 보며, 적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으득.
새하얗게 물든 입술. 어느덧 살갗을 깊숙이 파고든 손톱 사이로는 그가 느끼고 있는 갈등 대신 뜨거운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직 늦지 않았다.
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제자에게. 진태경에게.
그러나.
“포, 포달랍궁이다! 놈들이 가세했다!”
“화살! 화살을 더 가져와라!”
“방어진을 구축하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마라!”
“적 대협,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고함과 비명이 발목을 붙잡는다.
두려움과 결의. 혹은 믿음으로 가득 찬 눈동자들이 손을 잡아끌고 목을 조이고, 그와 함께 북문을 지키던 현천진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만약 녀석이었다면, 그 아이였다면 어찌했을까.’
마음속 깊숙이 던지는 물음과 함께, 적천강은 질끈 눈을 감았다.
찰나의 그 짙은 어둠 속에서, 전날 제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영웅 따위, 원한 적도 없습니다.’
‘상관없다. 영웅은 단지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이 네 녀석을 그리 부를 때 자격을 얻는 것이다.’
‘노야께서 대협이라고 불리시는 것처럼요?’
‘뭐라?’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구태여 대의를 좇지 않아도, 그저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갔음에도 어느샌가 대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
똑똑히 기억난다.
말문이 막혀 버린 자신을 향하던 그 환한 미소, 장난스러운 표정과 맑은 눈동자까지도.
그렇기에, 다른 그 무엇보다 두려웠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도 적이 두렵냐는 스승의 뒤이은 물음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제자는 이렇게 덧붙였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저는 그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담담했고, 당당했다.
그리고 그날의 모든 것이, 앞서 적천강이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화아아악.
일순간, 공간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열기.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눈꺼풀 너머로, 불그스름하게 달구어진 눈동자가 화염과도 같은 안광(眼光)을 토해 냈다.
허공을 가르며 쏘아지는 달뢰라마와 십이 밀승을 향해.
그리고 어느덧 나타난 두 기의 흑귀와, 그 너머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의 대군을 향해.
그그그극.
끔찍한 열기에 의해 일그러지는 공간 속, 불의 거인은 온 힘을 다해 포효했다.
“오라-!”
마치 온 세상을 불태울 듯이.
“노부가 바로 대 열화문의 십팔 대 문주, 화왕(火王) 적천강이니라!”
이 포효가, 자신의 제자에게 닿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