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06
로그인 무림-1106화(1106/1141)
꽈앙!
눈 앞을 가리는 섬광이 피처럼 붉다.
퍼어엉!
일격, 일격에 담긴 아득한 힘이 들끓는다.
콰드드득!
세상이 끊임없이 뒤집히며, 바로 서기를 반복한다.
아니, 세상이 아닌 내가.
쐐애애액, 쾅!
등줄기를 찌르르 울리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충격.
그리고 벼락처럼 펼쳐진 수십 합의 공방이 낳은 결과는, 층층이 쌓인 성벽의 잔해 깊숙이 처박힌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쿨럭.
내 의지와는 달리 울컥 솟구친 핏물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귓가에는 이명(耳鳴)과 함께 찾아온 시스템 경고음이 맴돌고, 몸뚱어리 구석구석에서 전해지는 통증은 그것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명히,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마음속으로 힘없이 뇌까렸다.
맹공에 의해 튕겨 나가기 직전, 찰나의 순간 저 멀리서 울려 퍼졌던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하지만 아무래도 환청이었던 모양이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한 번씩 찾아오고는 하는, 그런 환청.
“……빌어먹을.”
계속해서 핏물이 차오른다. 찢겨나간 손아귀가 저릿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직한 욕설과 함께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내가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서문을 지키고 있는 수천 명의 아군 중 그 누구도 저 괴물 같은 놈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철벅, 철벅.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무거운 발걸음이 이곳을 향해 다가온다.
더불어 그렇게 나아가는 걸음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뒤섞여 발목까지 출렁이던 핏물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촤아아악.
그건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얼어붙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통 붉게 물든 수백 마리의 뱀이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그 섬뜩한 움직임의 끝에는, 이미 새로운 힘을 받아들일 준비를 끝낸 어느 괴물이 있었다.
스아아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피부 위로 스며드는 핏물.
뒤이어 더욱 강렬해진 괴물의 핏빛 안광(眼光)이, 거센 빗줄기 너머에서 번뜩였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수많은 아군 속 오직 단 한 사람, 바로 나를 향해.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낮게 깔린 음성이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든다.
반경 십여 장에 존재하는 모든 핏물을 흡수하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생명력과 힘을 집어삼킨 피의 괴물이 희열 어린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네놈은 결코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아니, 이 전장의 그 누구라도.”
무림이라는 험난한 도산검림 속에서 긴 세월을 살아남은 노강호들은 말한다.
자신감이 과하면 자만과 오만이, 그마저도 넘어선다면 광오함이 되니 이와 같은 감정을 가장 경계하라고.
만약 눈앞의 적이 그러한 감정들에 휩싸여 있다면, 그것을 약점으로 삼아 생로(生路)를 열라고.
이는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격언(格言)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었고, 적천강 역시 내게 종종 비슷한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자만 따위가 아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저 괴물과 직접 맞서고 있는 나였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저건 오만도, 광오함도 아닌 확신이었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 무수한 가능성과 변수를 만들어 온 나조차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의미로의 혈주(血主)로 거듭난 괴물이, 오늘 이 전장의 그 누구보다도 거대한 힘과 존재감으로 사방을 짓누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드드드득.
주위의 공기가, 지면이 뒤흔들렸다.
미친 듯이 쏟아지던 폭우도,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성벽 위의 궁수들이 용기를 쥐어짜 내어 쏘아 보낸 화살들도 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저, 괴물의 심기를 건드렸을 뿐이었다.
우우웅.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붙잡히기라도 한 듯, 혈주의 머리 위 허공에 멈춰 몸을 부르르 떨던 일백여 개의 화살촉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절대자를 향해 가까워진 괴물의 앞길을 감히 막아선, 죽어 마땅한 벌레들을 향해서.
“피해!”
본능에 가까운 외침이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그 순간.
슈확! 푸푸푸푹!
한 줄기로 합쳐진 맹렬한 파공성과 함께, 섬광처럼 번뜩인 화살들이 공간을 관통했다.
철을 덧씌운 방패로 궁수들을 보호하던 방패병들도, 그 뒤에 엄폐하고 있던 궁수들도.
나아가는 경로에 놓인 그 모든 것을.
쿵.
가장 선두에서 지휘하던 부대장이 무릎을 꿇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들 모두는 멍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채, 각자의 몸뚱어리에 새겨진 커다란 구멍과 수십여 장 밖에 우뚝 서 있는 괴물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결을 내뱉었다.
“이, 이건 말도 안…….”
털썩, 투두둑.
피와 빗물 위로 하나둘씩 쓰러지는 시신들.
누군가는 공포에 휩싸여 뒷걸음질 쳤고, 누군가는 죽음을 부정하며 나아가고자 했으며, 누군가는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하고 선 채로 허물어졌다.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으나, 그 누구도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죽었다.
궁수와 방패병. 무림인들까지 포함되어 있던 이백여 명의 아군이.
그것도 단 한 순간에.
스르륵, 철퍽!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진 이름 모를 누군가의 몸뚱어리가 피 웅덩이 위로 처박힌 그 순간.
“천상천하.”
사방에 내려앉은 숨 막히는 정적 속.
어느덧 혈주의 등장과 함께 무너져 버린 전열과 성벽의 잔해를 넘어 진입한 암천의 교도들이, 홀린 듯한 목소리로 그들만의 교언을 읊기 시작했다.
“만마앙복.”
이제 더 이상, 놈들은 고함을 내지르지 않았다.
성벽을 넘기 위해 발악하며 내뿜던 살기(殺氣) 또한,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걱!
그들은 그저 묵묵히 각자의 손에 쥔 날붙이를 휘둘렀고.
“천상천하……!”
하나 같이 황홀함에 물든 얼굴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이 놀라운 이적(異蹟)에 감격했으며.
“만마앙복……!”
지금 이 전장에 없는, 그럼에도 저 짙은 어둠 속에서 천하의 모든 것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지배자를 찬미했다.
설령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퍼걱!
“천, 크륵. 천주시여.”
눈먼 칼에 맞아 목울대가 베어져도, 팔과 다리가 날아가도, 가슴이 관통되어도 놈들은 결코 입가에 새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내게 달려들었던 십여 명의 광신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 드디어. 순교(殉敎)의 영광을…….”
푸푹! 콰드득!
결국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인 이상, 머리가 사라진다면 더는 말을 할 수 없다.
이는 목숨을 담보로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잠력단(潛力團)이 아니라, 그 무엇을 복용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수도(手刀)를 휘둘러 놈들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렸음에도, 지금 내 귓가에는 미처 끝맺어지지 못한 조금 전의 음성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계속해서. 단 한 시도 끊임없이.
“이런…… 미친 새끼들.”
어느새인가 가빠진 숨결 속, 나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전신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다.
정신 나간 놈들이라면 이미 이골이 날 정도로 보고 겪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고 자란 21세기의 현대는 바로 이곳, 무림과는 또 다른 야만을 간직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구름 위에 솟은 마천루가 즐비하고, 인류가 우주를 향해 나아간 지 어언 반세기도 넘는 세월이 흘렀으며, 최첨단 과학과 마법이 결합 된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고 강력하게 거듭났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아직도 현대에는 미친놈이 즐비하다.
해가 중천에 뜬 백주대낮에 살인이 일어나고, 판사의 법봉과 기자의 카메라는 돈과 술의 무게에 흔들린다.
뿐인가.
구시대의 유산과도 같은 독재자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또한 일으킨다.
저마다의 종교와 종파 간의 거리를 용서와 화해대신, 미사일과 테러로 메우려는 놈들도 한 무더기다.
이렇듯 내가 지켜본 세상 속에서는, 그들 모두가 광신도였다.
저마다의 목적에 맹목적인 가치를 두느라 정신이 나가버린. 원하는 것만 보고 느끼며 그것에 한껏 취해 비틀거리는 미친놈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도플갱어를 따르던 광신도들이었지만, 지금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과거 그들에게서 보았던 광기의 크기와 순도는, 눈앞의 저 암천의 교도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다고.
그리고 이 광기에 휩싸인 피바람의 중심에는, 태산(太山)과도 같은 기세로 쏘아지는 괴물이 있었다.
“부나방을 본 적이 있나?”
느껴졌다.
여유롭지만, 결코 방심하지 않는 혈주의 태도가.
사방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전(亂戰)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오직 나만을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는 확신과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보았다. 천산산맥(天山山脈)이 그분의 지배하에 놓이기 이전에 수도 없이 보았지. 횃불에 달려든 그 멍청한 놈들이 불타 죽는 꼬락서니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아귀에 쥐고 있던 백염의 창대를 발치에 깊숙이 박아 넣고, 그 즉시 주위에 널브러진 병장기들을 발로 차올려 놈을 향해 쏘아 보냈다.
쐐애애액, 콰앙!
콰드드득!
강기가 실린 날붙이들이 차례차례 공간을 가르고, 곧이어 굉음을 동반한 엄청난 충격파가 공간을 후려쳤다.
본래의 목표였던 혈주가 아닌, 허공과 지면 어딘가에서.
“한데, 어느 날에는 부나방들을 보던 중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군.”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적도(赤刀)를 휘둘러, 날아드는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쳐낸 놈이 또렷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놈들은 불에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횃불에 달려드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기에 달려들 수밖에 없는 것일까.”
퍼걱!
나는 곳곳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베어 갈랐다. 무너진 성벽에 이어, 이제는 전열마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순교를 부르짖으며 달려드는 광신도들의 모습이, 그로 인한 공포의 물결이 일기당천의 효과마저 짓누르고 있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아니, 굳이 찾지 않았지. 나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그분을 만났고, 부나방의 심정 따위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대한 힘을 얻었으니까.”
그 순간.
후우우우웅!
혈주의 손을 따라 높게 들어 올려진 적도의 시뻘건 도신 위로, 거대한 강기가 솟구쳤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존재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미증유의 기운이.
“하지만, 지금의 네놈이라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군.”
스스로에 대한 확신.
칼날과도 같은 살기. 분노를 넘어선 증오. 마침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희열.
그 모든 감정이, 기세와 힘이 오직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힌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어쩌면 최후의 일격을.
그리고 크게 심호흡하며, 혀끝에서 맴돌던 한마디를 토해 냈다.
“난 그중에 없어.”
“뭐?”
“불길에 달려들어도 안 뒈지는 새끼. 모르건 알건 우선 달려들고 보는 새끼. 그게 나다.”
“……!”
영원과도 같았지만, 찰나였던 침묵.
그 끝자락에서 혈주가 대답했다.
아니, 움직였다.
나 역시도.
팟.
단숨에 지워지는 십여 장의 공간 너머, 놈의 적도가 거대한 핏빛 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