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1
#110화
쾅!
굉음과 함께 나타난 것은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억세게 뻗친 눈썹 아래, 성난 맹수처럼 호목(虎目)을 부릅뜬 그가 좌중을 쓸어 본다.
“방금 헛소리를 지껄인 자가 누구냐?”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항산검문의 중진.
전임자만큼은 아니어도 일류의 무공과 일정 이상의 경륜을 지닌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목을 움츠리고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눈앞의 중년인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까.
‘제길, 하필이면 항산호(恒山虎)한테…….’
호사가들이 이르길, 항산에는 두 마리 맹수가 산다고 했다.
혈랑검과 항산호. 절친한 벗이자 서로가 넘어야 할 벽.
중년인, 철무백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항산의 호랑이라 불리는 절정 고수였다.
“어느 놈이냐 물었다!”
그 포효 같은 외침에 항산검문의 중진들은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철무백이 한번 꼭지가 돌면 친우였던 이천백조차 자리를 피한다고 했다. 하물며 무공과 연배에서 한참 뒤처지는 그들이니 두말할 것도 없다.
“일치단결하여 저 말 도적놈들을 몰아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천백의 유지를 어기고 역심을 품어?”
화염이 쏟아질 듯한 눈빛에 항산검문의 중진들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처, 철 대협. 오해십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역심을 품겠습니까.”
“그럼 내 나이가 늙어 귀가 어두워진 것이냐?”
그 순간, 대전 안의 사람들은 갈증을 느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철무백이 뿜어내는 가공할 만한 열양지기(熱陽地氣) 때문이었다.
‘이런 미친.’
‘도대체 뭘 얼마나 처먹었기에 이런 무지막지한 공력이…….’
단순히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땀이 줄줄 흐른다. 항산호. 약관 무렵부터 광활한 산맥의 어딘가에서 홀로 무공을 익혔다는 절정 고수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훅, 후우욱.”
“대협, 부디 고정하십,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항산검문의 중진들, 그리고 용서의 기미 없이 그들을 노려보는 절정 고수.
대전 안의 공기가 용암처럼 들끓어 오르려던 그때였다.
“철 숙부, 더워요.”
시냇물처럼 청량한 목소리와 철무백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와 동시에 분노로 주름져 있던 철무백의 미간이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쫙 펴졌다.
“마, 많이 더웠느냐?”
“네, 숨도 못 쉬겠어요.”
“이런, 내가 미처 네 생각을 못 했구나. 지금은 어떠하냐?”
“한결 나아졌어요. 고마워요, 철 숙부.”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소월이 너를 지키는 게 내 할 일인 것을.”
철무백의 강대한 열양지기가 사그라든다.
그제야 곳곳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 철무백이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 아가씨.”
“아가씨를 뵙습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표하는 중진들의 모습에 눈썹을 치켜뜨는 철무백. 그러나 ‘아가씨’가 한발 빨랐다.
“철검대주님, 수문각주님. 두 분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게요.”
철무백의 거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르고 늘씬한 체구. 푸른색 궁장 밑단이 바닥을 스칠 때마다 사각거렸다.
“호칭을 바꾸세요. 아가씨가 아니라 문주님, 으로.”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사람들은 잠시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 그랬지.’
혈랑검 이천백.
이소월은 그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자식이다.
* * *
나는 승마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무림에 온 후에야 몇 번 타 본 정도지. 현대에서 승마는 부자들에게만 허락된 귀족 스포츠나 다름없어서 접해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워낙 좋은 데다가 잘 훈련된 말을 타고 있어서 그런지, 격렬한 질주 중에도 시스템창을 볼 만큼 여유가 있었다.
‘퀘스트창 오픈.’
띠링.
퀘스트
[어제의 적, 오늘의 동지]모든 진실이 밝혀진 지금, 항산검문은 적이 아니라 손을 잡아야 할 동지입니다. 곧 다가오는 원단에 그들을 태원진가로 초대하십시오.
등급 : 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초대장 전달 (미완료)
보상 : ???
실패 : 없음
퀘스트는 유동적이다. 상황에 따라서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기도 하고 지금처럼 퀘스트가 갱신되기도 한다.
‘등급 상향 조정이라.’
퀘스트 등급이 일류에서 절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항산검문으로 가는 길이 녹록지 않아졌다는 걸 의미했다.
예를 들자면 적풍단이라든지. 혹은 적풍단이라든지. 아마 적풍단…… 됐다. 더 말해 봤자 마음만 아프다.
‘이 동네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 따로 없네.’
간만에 쉬운 퀘스트 하나 받나 했더니 또 일이 터졌다.
하지만 예전만큼 초조하지 않은 이유는, 진무경이라는 든든한 존재 덕분도 있지만 나 자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상태창 오픈.’
띠링.
상태창
[Lv.55 진태경]직업 : 일류 무인
명성 : 1300 (+150)
칭호 : 4개 (칭호 효과 적용 중)
– 귀환자 (모든 능력치 +10)
– 산서잠룡 (모든 능력치 +10, 명성 +100)
– 명가의 자제 (모든 능력치 +5, 명성 +50)
– 승부사 (일대일 전투 시 전투 관련 능력치 +10%)
근력 : 196 (+25)체력 : 195 (+25)
민첩 : 192 (+25)지력 : 35(+25)
매력 : 35(+25)공력 : 15년
맷집 : 155(+25)
잔여 포인트 : 0
‘크으, 주모.’
혼자 잘 컸다, 잘 컸어.
각각 200포인트에 육박하는 근력, 민첩, 체력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진무경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생겨난 맷집도 잘 크고 있다.
‘칭호 옵션 효과도 빵빵하고. 이 정도면 충분해.’
지금까지는 살기 위해 스탯을 올렸다. 퀘스트 하나 진행할 때마다 온갖 위기가 삼각파도처럼 밀려오는데 매력과 지력에 포인트를 투자할 여력이 있었을 리가.
‘지력 올려서 아이큐 180 되면 창을 과학적으로 찌르는 것도 아니고.’
매력도 마찬가지다. 조필이나 대장로가 얼굴 좀 잘생겼다고 살려 줄 것 같진 않거든.
물론 올려 둔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겠지만, 당장 목숨이 간당거리는 와중에 비전투 스탯에 투자할 용기가 없었다.
‘이제 내 한목숨 지키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번 퀘스트만 끝나면 공력과 비전투 스탯에 신경을 써 볼 생각이다.
안 그래도 조필을 쓰러트리고 얻은 [열화신단]을 포함한 아이템들이 인벤토리에 고이 잠자고 있다.
‘물론 잘못 먹으면 골로 가겠지만.’
그때 선두에서 달려가던 월화가 개울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잠시만 쉬어 갈게요. 말들이 너무 지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당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동이 트고 해가 중천에 걸렸다. 중간에 근력과 체력이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도 두 번이나 뜰 정도였으니 강행군은 강행군이었던 모양이다.
“후. 엉덩이 아파 죽겠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농부가 아니라 마부 아들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말이 휴식하는 틈을 타 혁무진이 털썩 주저앉았다. 일행 중 가장 레벨이 떨어지는 녀석이니만큼 체력 소모가 눈에 띄었다.
“힘드냐?”
혁무진이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솔직히 힘들긴 한데…… 이상하게 지난번보다는 훨씬 낫네요.”
“지난번이라니?”
“벌써 잊으셨어요? 정찰 임무 때요.”
“아, 기억난다.”
백호당 소속으로 정찰 임무를 맡았다가 조필을 만나는 바람에 죽을 뻔했던 일. 그때도 분명 말을 끌고 가긴 했었지.
‘나중에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말도 버리고 갔지만.’
예전 일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그러세요?”
“네 생각 나서. 나한테 멋모르고 까불다가 엄청 맞았잖아.”
“……꼭 그렇게 지난 얘기를 들춰내야 속이 후련하세요?”
“물어본 건 너야, 인마.”
“어쨌든,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다고요.”
“그래?”
“네. 정찰 임무 때보다 훨씬 많이 달렸는데 별로 지치지도 않고 그러네요. 말 타는 게 좀 익숙해져서 그런가?”
“그런 걸지도…… 아, 잠깐만.”
“예?”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어 기감을 끌어올렸다.
띠링. 익숙한 시스템 알림과 함께 어리둥절해하는 혁무진의 얼굴 위로 레벨창이 떠오른다.
[Lv.38 혁무진]“……엥?”
벌어진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혁무진이 언제부터 레벨이 이렇게 높았지?
‘엄밀히 말해서 엄청나게 높은 건 아니지만.’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 20레벨에 불과했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는 말도 부족하다. 이 정도면 거의 새로 태어난 수준인데?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난 이후로 꾸준히 올랐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보다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정찰조로 재회했을 때도 그랬고, 틈틈이 기감을 끌어올릴 때마다 옆에 있던 혁무진의 레벨은 1, 2씩 올라 있었다.
그러던 게 어느새 38레벨. 무림에서의 시간으로만 치면 근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두 배 가까이 성장을 이룬 거다.
‘그럼 혹시?’
설마 하는 마음에 혁무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 녀석도 나처럼 스탯 포인트를 받는다면? 그걸 내가 대신 분배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
내가 비슷한 레벨의 헌터나 무인보다 훨씬 강한 걸로 봐서는 시스템 보정 효과가 있는 것 같긴 한데…….
‘한 번 시도해 볼 만해.’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 그냥 못생겨서.”
“……아, 진짜.”
꿍얼거리는 혁무진의 어깨를 잡고 마음으로 외쳤다.
‘상태창 오픈!’
바로 그 순간.
“뭐 하세요? 어깨 아파요.”
“어, 그래.”
아무 일도 없네. 뭐 하나쯤 뜰 줄 알았는데.
하긴 본캐도 만렙 찍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부캐가 웬 말이냐. 그래도 아쉽긴 하다.
‘소리 내서 해 볼까?’
분명히 이상한 놈 취급받겠지만 화장실 다녀와서 손 안 닦는 기분으로 가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슬그머니 혁무진의 등에 손을 살짝, 아주 살짝 가져다 대며 작게 중얼거렸다.
“상태창 오픈.”
“아, 진짜. 아까부터 진짜 왜 이러세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던 알림 소리와 함께 시스템창이 떴기 때문이었다.
“이야아, 떴다!”
띠링.
– 퀘스트 조건에 [제한 시간]이 추가되었습니다.
– [22:00:00] 안에 항산검문에 도착하십시오. 늦는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야아…….”
사그라지는 목소리. 흔들리는 눈동자.
‘제한 시간이라니. 뭔 놈의 제한 시간.’
나한테 왜 이러냐, 진짜.
한숨을 푹 내쉬는 내게 눈을 동그랗게 뜬 월화가 물었다.
“진 공자, 어디 아파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혹시 우리 언제쯤 도착하는지 알 수 있어요?”
“음. 오늘 같은 속도라면 내일 저녁 전에?”
“아.”
지금 정오를 약간 넘긴 시간이니까 꼬박 하루는 넘게 달려야 한단 말이다.
퀘스트창이 변경된 걸 보니 그 제한 시간 안에 적풍단 놈들이 항산검문을 친다는 얘기 같은데…… 이걸 어쩐다?
“이제 슬슬 출발할까요?”
“말들이 지쳤어요. 반 시진은 쉬어야 해요.”
“말들아, 괜찮지? 방금 들으셨어요? 괜찮다고 대답한 거.”
“…….”
그래, 그런 눈으로 볼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