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13
로그인 무림-1113화(1113/1141)
희생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도와 인의 따위는 개나 줘 버린 야만의 시대 속, 전쟁이라는 가장 끔찍한 폭력의 수단으로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하지만 그 잔인한 현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있다.
이를테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웃으며 말을 주고받던 누군가의 부재를 깨닫게 됐을 때라든지.
“……그래, 결국 그렇게 됐나.”
의식을 잃은 직후에 일어난 일을 들은 진태경은, 혼잣말과도 같은 뇌까림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동시에, 문득 떠올렸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그 수많은 눈동자를.
그와 더불어, 어느샌가 익숙해진 누군가의 무뚝뚝한 얼굴과 음성을.
‘그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금의위는 오직 황상 폐하의 명만을 따를 뿐. 황명에 반하여 앞길을 막아선다면 죽이겠다.’
‘호패도 없는 무림인이라 그런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
‘고맙소. 우리를, 황실을 지켜 주어서.’
아스라이 눈과 귀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들.
그 기억의 끝에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나아가던 누군가의 모습이 있었다.
‘금의위 천호(千戶) 정호군, 상산후의 명을 받드나이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게 된 그의 음성을 떠올리며, 말없이 눈을 뜬 진태경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억눌렀다.
멍청할 만큼 우직했던 무관(武官)은 늘 담담했고, 또한 당당했다.
비록 정호군의 최후를 목격하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으나, 분명 그러했으리라 진태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지난 석 달의 시간 동안 함께했던 휘하의 금의위들도, 목숨을 걸고 싸웠을 서문의 수비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장렬하게 산화(散花)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자신을 포함한 적잖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진태경은 영원히 기억할 터였다.
그의 곁에서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 역시도.
“……미안해요, 은인. 제가 부족했어요.”
물기 어린 눈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
스스로를 자책하는 청풍의 모습에, 진태경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맞아, 부족했지. 청 소협도, 나도.”
“아니에요. 은인은 최선을 다했어요. 만약 제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청 소협.”
“네?”
“만약 혈주가, 아니 천주가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안 그래?”
“……!”
“만약, 어쩌면, 혹시…… 그런 병신 같은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지워. 죽은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살아남은 스스로가 미칠 듯이 원망스러워도 참아.”
까득.
내성(內城)의 성벽에 기대어져 있던 몸뚱어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진태경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마치 세포 단위로 전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 때문에.
그리고 의식을 되찾은 그 순간부터 온 힘을 다해 억누르고 있는, 그럼에도 계속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자책 때문에.
스륵.
불현듯 실 끊어진 인형처럼 풀어지는 다리.
가까스로 성벽을 붙잡으며 비틀거리는 진태경의 모습에, 청풍이 황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
아니, 정확히는 부축하려 했다.
그 도움의 손길이 닿기도 전, 진태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기 전까지는.
“으, 은인.”
흔들리는 청풍의 눈동자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진태경의 모습이 비쳤다.
어느새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구슬땀과 창백하기 그지없는 안색.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그의 신체 내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공력을 불어넣어 힘을 더했던 장본인인 청풍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서 그가 흘린 눈물의 일부는, 진태경의 죽음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턱.
진태경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고통을 참고, 가슴 한구석에서 용암처럼 들끓는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성벽을 잡고 다시금 일어났다.
천천히. 동시에 끈질기게.
그리고 일 초가 십 년처럼 느껴지는 그 아득함 속에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를, 그들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져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대로 무너지면, 포기해 버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테니까.
앞서 목숨 바쳐 퇴로를 연 이들의 희생도.
지금 이 순간에조차도 죽어가고 있을 또 다른 이들의 희생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과도, 질질 짜는 것도 할 일을 전부 끝마친 뒤에 하라고.”
비단 청풍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절박함, 혹은 패배감에 물든 얼굴로 고개를 늘어뜨린 주위의 모두를 향해 진태경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육신과 정신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던, 그들의 의무를.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이자 사명이다.”
저벅.
마지막 한 마디를 토해 낸 진태경이 비로소 발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
“……!”
“……!”
주의의 공기가 찌르르 울렸다.
보이지 않는 격동과 열기가 한 몸이 되어 피어올랐다.
한 걸음.
고작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혈인(血人)이나 다름없는 몰골을 한,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어느 젊은이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쳤다.
전신을 지배하고 있던 짙은 패배감이 서서히 걷혀 가고, 그 빈자리를 뜨거운 무언가가 채웠다.
쿵. 쿵. 쿵.
누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울림이 고요한 연못의 파문(波紋)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내성 밖, 점점 더 급박해지는 전고(戰鼓) 소리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뜻했으나 상관없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도산검림을 헤쳐 나가는 무림인이자 대국의 열후이며, 더 나아가 이 광활한 천하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백성인 그와 함께하는 한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콰아아앙!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영원토록 울려 퍼질 것 같던 전고 소리가 멎었음에도.
두두두두!
어느새 대로(大路)를 휩쓸며 내성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적들의 발걸음에서 터져 나오는 진동과.
차차차창!
거센 강철의 소음을 따라 처절한 비명이 온 사방에 흘러넘쳐도.
쿵쿵쿵쿵!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발을 구르고, 병장기를 내리찍으며, 아직 꺼지지 않은 함성의 불씨를 피워 올렸다.
내성 깊은 곳에 웅크린 채 떨고 있을 수많은 백성들을 떠올리며.
뜨거운 열기를 띤 눈동자에 한 사람의 모습을 담아내며.
“모두 기억해라.”
어느덧 선명해진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은백색의 창날을 응시하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지금껏 살아 있는지.”
스릉.
씹어뱉는 듯한 그 한 마디와 동시에 창날이 서릿발 같은 기세를 내뿜은 그 순간.
스아아아아.
철탑처럼 우뚝 선 진태경의 등 뒤에서, 올올이 피어오른 자줏빛 섬광이 횃불보다 강한 빛으로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해 질 녘 노을처럼 번져 가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의 기운에 뒤덮인 한 사람의 눈가는, 더 이상 젖어 있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 역시도.
“해낼게요. 반드시.”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붉다. 붉었다.
적어도 지금 한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풍경은, 온통 시체와 피에 잠겨 있었다.
서걱!
심호흡 한 번에 사라지는 생명의 숫자가 몇일까.
곳곳에서 목이 솟구치고, 팔다리가 날아가며, 혹은 고통에 의해 천천히 죽어 가는 이도 있다.
그들은 한때 신선처럼 고아한 자태로 새하얀 도포를 휘날리던 도사요, 나라의 녹을 받아먹고 사는 관군이며, 무림인이자 백성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제대로 된 분간이 불가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채, 서녕의 대로변에 그려진 이 참혹한 지옥도(地獄道)의 일부가 되어 갈 뿐이니까.
그리고 이 지옥도의 첫선을 그려 낸 동시에, 마지막 방점(傍點)을 찍을 장본인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학살을 관망하고 있었다.
‘미련한 것들 같으니.’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고작 혈통 하나만으로 자격을 얻은 황제를 위해서?
아니면 형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정의(正意)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위해서?
‘우습군.’
아마 저들 중 대부분은 황제의 얼굴조차 본 적 없을 것이며, 중원의 무림인들이 그토록 죽고 못 사는 정의란 결국 저들의 울타리 속에서만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천주(天主)는, 그분만큼은 달랐다.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려올 만큼 강대한 권능과 위압감.
힘이 곧 정의인 세상에서, 이보다도 적합한 주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충실한 종복이, 당신의 염원을 이뤄드리겠나이다.’
천주를 향해서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위함인지 모를 다짐과 함께 혈주는 신형을 내뻗었다.
쉭!
소름 끼치도록 낮은 파공성이 울려 퍼진 다음 순간.
투두두둑.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내성을 향해 뻗은 대로변을 가로막고 있던 수비군의 전열(前列)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실 끊긴 인형들처럼 쓰러지는 일백의 신형들 위로 높이 솟구치는, 짙은 피 분수와 함께.
푸화아악!
온 사방에 흩뿌려지는 핏방울.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한 수비군들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괴, 괴물…….”
“그래, 너희에겐 그렇게 보이겠지.”
웃으며 대꾸한 혈주가 손을 뻗었다.
퍼어엉!
핏빛 섬광이 부풀어 오르며 폭발한다. 굉음이 비명을 집어삼키고, 뜯겨나간 뼈와 살점이 비산했다.
“허나, 그분께서 천하를 손에 넣으신 후에는 누가 나를 괴물이라 부르겠느냐.”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세상이다.
피에 미친 괴물이, 하늘이 내린 신장(神將)으로 불릴 날도 머지않았다.
비록 그 위대한 대업을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할 한 사람의 목숨을 취하지는 못했으나.
“길을 열어라. 이 하잘것없는 부나방들아.”
서걱! 푸푸푹!
지금의 혈주에게 있어, 그 모든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어느덧 내성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졌고, 나머지 세 면의 성벽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한 자신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대술사, 네년만큼은 끼어들지 말거라. 아무리 그래도 내 손으로 그분이 아끼시는 종년을 죽이고 싶진 않으니.’
마음속 뇌까림과 함께, 혈주가 도륙을 이어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잉, 쾅!
예리하고도 눈부신 섬광이,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던 괴물의 발걸음을 가로막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