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15
로그인 무림-1115화(1115/1141)
격전(激戰)이었다.
머나먼 땅에서 온 어느 승려가 갈댓잎 하나에 몸을 실어 장강을 건넌 그날로부터, 자그마치 천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이어졌던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는.
동시에, 혈전(血戰)이었다.
비단 무림뿐만이 아닌, 대륙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도 찾아볼 수 없을.
퍼걱!
정수리가 갈라지고 뇌수가 튄다.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
그러나 이제 그 누구도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소년병의 최후에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조차 없었다.
멈추지 않는 이 잔혹한 지옥도(地獄道)의 수레바퀴 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헐값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다만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오직 복수뿐이었다.
“천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눈이 붉게 충혈된 광신도가 소년병의 시체를 밟으며 성벽 위에 발을 디딘 그 순간.
푹.
그의 미간 사이로, 번뜩이는 날붙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가 함께한다고?”
당연하게도, 이미 절명한 광신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썩은 통나무처럼 허물어지는 시체의 뒤통수에 박힌 단도(短刀)를 뽑아낸 자그마한 그림자는, 마침내 성벽 위를 점령했다는 기쁨에 휩싸여 있던 또 다른 적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팟.
마치 유령처럼 사라지는 신형.
뒤늦게 발출한 검기가 그림자가 서 있던 공간을 향해 쏘아졌지만,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의 서늘한 바람은 이미 그들을 스쳐 지나간 후였다.
서걱, 푸화악!
칠흑 같은 밤하늘 위로 피 분수가 솟구친다.
섬광 같은 속도에 더하여 조금의 낭비도 없는 효율적인 움직임.
하지만 고작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여 명의 적들을 쓰러트린 그림자, 아니 살성의 눈빛은 더없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계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해.’
비단 그 자신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살성과 궁성.
두 거인의 존재감으로 철옹성이나 다름없던 남문(南門)이, 그곳을 지키는 수비군 전원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기적이나 다름없었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싸움이었을지도 몰랐다.
양민들까지 동원해야 했던 아군과는 달리, 적들은 하나 같이 일정 이상의 무공에 잠력단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했으니.
머릿수로도, 질적으로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어디까지나 수성(守城)의 이점을 극대화하고 소수의 정예 병력을 적재적소에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여기까지인가.’
살성은 혀끝에 맴도는 침음성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치지 않는 장대비 너머, 말 그대로 시산혈해(屍山血海)나 다름없는 광경이 그의 시야에 가득 담겼다.
이미 의지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극심한 피로에 사로잡혀 무너져 가는 아군들의 모습도 함께.
지쳤다. 모두가.
육체는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정신은 가까스로 유지하는 것만이 고작이다.
심지어는 살성 그 자신조차도, 적지 않은 피로와 텅 비어 가는 단전을 느끼고 있었다.
‘……대술사(大術士)만 처치했더라면. 그럴 수만 있었다면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살성이 들었던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대술사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를 비롯한 일백여 명의 술사들을 지키는 적들의 방어진은 철벽처럼 두터웠고, 전력을 다해 그 중심부를 파고든 살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려 네 기나 되는 흑귀(黑鬼)였다.
그것도 온갖 강화 마법의 힘을 받아 한층 강해진.
만약 수백여 장 밖에서도 표적을 찢어발길 수 있는 천하제일의 궁사(弓師)가 그를 돕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살성이라 할지라도 지금과 같이 사지 멀쩡히 되돌아올 수 없었을 터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두 기의 흑귀를 쓰러트린 건 살성의 자존심과 집념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쉬이이잉!
불현듯 터져 나온 휘황한 섬광과 함께 찰나의 상념이 깨져 나간 그 순간.
퍼엉!
커다란 빛줄기가 살성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이십여 명의 광신도들을 집어삼키며 폭발했다.
“여유롭군요. 한눈팔 시간도 있고.”
궁성의 뼈 있는 한 마디에, 살성은 대답 대신 소매를 떨쳤다.
푸푸푹!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허물어졌다.
하나같이 길고 얇은 우모침(牛毛針)을 미간에 박아넣은 채.
“차라리 당신 말대로 여유로워 보였으면 좋겠소. 그래야 저놈들이 조금이라도 겁을 먹을 테니.”
“아직도 저들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요?”
“……제기랄.”
씁쓸한 욕설과 함께, 살성은 재차 신형을 내쏘았다.
광신(狂信)이라는 두 글자에 영혼까지 저당 잡힌 악귀들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아군을 지키기 위해서.
서걱! 콰드득!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고, 부러트리는 동시에 꺾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두 거인이 아무리 쉼 없이 적들을 쓰러트려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수비군의 저항은 빠르게 수그러들었고 광신도들의 열기 띤 목소리가 성벽을 뒤덮었다.
“위대한 천주시여!”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이 땅에 내리소서!”
으득.
마치 거대한 파도와 마주한 듯한 기분에, 살성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수백을 죽이면 수천이, 수천을 쓰러트리면 수만이 그 뒤에 있다.
과연 이 전투에 진정 끝이라는 존재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조차 쉽사리 이어지지 못했다.
그 또한 결국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이군. 누군가가 이토록 보고 싶어지는 건.’
어느새 전신 곳곳에 아로새겨진 크고 작은 상처 때문일까.
혹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공력 때문일까.
잊고 있던 피로와 공허함에 사로잡힌 살성은 문득 생각했다.
오래전 그날, 열 배가 넘는 마교의 대군 앞에서도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는 승리와 확신을 가져다 주었던 한 사람을.
‘무신(武神),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소?’
멍청한 질문이었다.
그였다면 애초에 이런 의문 따위는 품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천하 무림에서 가장 강인하게 빛나는 세 개의 별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하늘.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살성은 불현듯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태경.’
일찍이 법왕 굉도가 말한 바 있다는 신성(新星)의 주인이자, 이제는 천주의 알 수 없는 집착마저 한 몸에 받고 있는 새파란 청년.
그리고.
‘선택받은 자.’
살성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혹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 아득한 하늘 위의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운명인지.
다만, 유일한 희망을 있는 힘껏 움켜쥘 뿐이었다.
비록 그것이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도.
서걱!
허공을 가로지르는 단도를 따라 흘러나온 강기가 마치 채찍처럼 휘어져 성벽을 휩쓴다.
조각난 사지와 흘러넘치는 핏물 속, 얼마 남지 않은 공력을 끌어모아 일거에 적들을 도륙 낸 살성이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전원, 퇴각한다.”
“……!”
“……!”
가까스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던 수비군들이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살성의 음성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전령은 지금 즉시 남문과 북문에도 소식을 전하라. 각 문에 배치된 정예가 후미를 맡아 잠시 시간을 버는 동안, 남은 병력은 최대한 신속하고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도록.”
찰나지만, 한편으로는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다.
그들에게 있어 성벽을 포기한다는 것은, 애써 외면해 왔던 패배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왔다는 뜻이나 진배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살성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직 침착함을 잃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결국, 그게 최선인가요?
문득 귓가에 내려앉는 한 줄기의 전음.
살성은 궁성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 모르겠소. 다만……. 믿고 싶을 뿐이오.
그래, 그뿐이다.
천기를 읽었던 법왕 굉도가.
그 천기마저 어그러트린 혈주가.
이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무신이 선택한 유일한 사람을.
―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겠소.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운명인지.
설령 그 끝에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살성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터였다.
그가 살성이 아닌 문경으로서 지켜본 어느 애송이의 모습은, 연배와 무위를 떠나 목숨을 걸 수 있을 만한 대종사(大宗師)의 그릇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 마음만은 모두가 같을 테니까.
― 궁성.
나직한 부름과 함께, 살성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궁성을 바라보았다.
― 당신이 정확히 무슨 의중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나 한 가지만큼은 알고 있소. 아니, 진태경을 조금이라도 가까이했던 이들이라면 모두가 알 거요.
― …….
― 제아무리 거리를 두고 애써 입을 닫아도, 그 녀석만큼은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는 걸.
― ……!
― 나는 믿고 싶소. 그 녀석뿐만 아니라, 당신 역시도.
찰나 지간 흔들리는 동공.
하지만 그런 궁성의 동요도, 침묵도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화아아악!
아득한 허공 위, 거센 빗줄기마저 증발시키는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던 그 순간.
쉬이이잉!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인 궁성의 손을 따라, 눈부신 섬광의 화살이 쏘아졌다.
꽈아아앙!
천지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붉게 물드는 하늘.
수백, 수천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떨어져 내리는 크고 작은 불덩어리들 아래,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궁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실 모르겠어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살성이 침음성을 흘리려던 그때, 그녀가 나직이 덧붙였다.
“그래도, 나 역시 믿고 싶네요.”
“……!”
“함께 가요. 내성(內城)으로. 그 아이에게로.”
그제야 비로소, 살성의 지친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