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16
로그인 무림-1116화(1116/1141)
청해성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서녕성은 익히 알려져 있듯 수성전에 있어 매우 유리한 이점을 가졌다.
그러나 지난 세월에 걸쳐 벌어진 수십 차례의 전투를 돌이켜 보자면, 침입자들에게 가장 큰 악몽을 선사한 것은 단단하면서도 높은 성벽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저 악귀 같은 놈들도 해자(垓字)만큼은 쉽게 넘지 못하는군요.”
중년 도사의 감탄 섞인 뇌까림에, 곤륜파의 장문인인 청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 해자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곱절은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진즉 성문이 뚫리고도 남았을 터이니.”
청허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폭만 무려 십여 장이요, 깊이 또한 상당한 해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에게 크나큰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으니까.
뿐인가.
해자를 넘는다 하더라도 엄청난 두께의 묵철(墨鐵)로 이루어진 성문이 기다리고 있었니, 제아무리 무공을 익힌 암천의 광신도들이라 한들 성문을 노리기보다 피해를 감수하고 성벽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압도적인 머릿수와 잠력단을 이용한 힘의 증폭 덕분인지 때때로 성벽이 위태로울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이 지키는 동문(東門)은 다른 어느 곳보다 순조로운 수성전을 이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만 잘 유지한다면 승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품을 정도로.
그리고 그것은 청허자의 곁에 서 있던 중년의 도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만약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모두 함께 본산(本山)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모두 함께라, 그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은 청허자의 음성에, 중년의 도사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둘째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청허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하면.”
“제자를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 어느 어리석은 스승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있었다.”
“……!”
“빈도의 잘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이.”
“스승님…….”
중년의 도사, 아니 청허자의 장제자인 학수(學水)는 안타까운 얼굴로 자신의 스승을 바라보았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스승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느냐?”
“저는 압니다. 아니, 곤륜의 모두가 알지요. 스승님께서 그 누구보다 둘째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각별히 보살피셨다는 사실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늘 온순했던 너나 활기찬 셋째와 달리, 그 아이는 늘 어딘가 거칠고 불안해 보였으니까.”
“스승님께서 학의(學意)라는 도호를 내리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지 않습니까.”
“그래, 분명 그랬었지.”
어둡고 험한 뒷골목에서 성장한 소년은 그렇게 새로운 이름과 가족을 얻었고, 청허자는 거친 기질을 타고난 자신의 둘째 제자에게 늘 말해왔다.
학의라는 두 글자에 담긴 뜻처럼, 조금 더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단 한시도 스스로 도사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고.
“하지만…… 감히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녀석이 암천과 내통하던 간자(間者)였다는 사실을.”
지그시 입술을 깨문 학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저 역시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도 않고요.”
그의 시선이 문득 옆을 향했다.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그 자리에, 자신의 둘째 사제가 여느 때와 같은 삐딱한 얼굴로 서 있을 것처럼.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니, 불가능했다.
학의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는 오늘 동이 트기 전, 깊은 밤을 노려 간자를 포박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맞서 저항하던 끝에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학수는, 잘려 나간 사제의 목과 피가 흐르는 검을 들고 있던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처럼, 어느 때보다 슬픈 눈빛을 한 그를.
“……스승님.”
학수가 복잡한 눈빛으로 청허자를 바라보던 그때.
쐐애애액!
공간을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온 힘을 다해 경신법을 펼쳐 달려온 전령이 다급한 외침을 토해 냈다.
“장문인!”
피투성이나 다름없는 행색에 더하여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
반사적으로 흘러나오려는 침음성을 삼킨 청허자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남문, 후욱. 남문입니다.”
“그렇다는 건, 두 선배께서 내성으로의 퇴각을 명하신 겐가?”
“그걸 어찌…….”
“알겠네. 다른 곳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겠군.”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전령의 모습만으로 어렴풋이 상황을 짐작한 청허자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속히 가서 전하게. 곧 동문의 병력을 이끌고 내성으로 합류하겠다고.”
“부디, 무운(武運)을 빕니다.”
짧은 목례와 함께 전령이 떠나자, 학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먼저 가십시오. 제가 일부 병력과 함께 시간을 벌겠습니다.”
결의로 가득한 눈빛과 음성.
하지만 청허자는 즉각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를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다.”
대답에 묻어나오는 듯한 스승의 우려에, 학수가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내성까지 가는 길도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곳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겠지요. 저들에게는 저보다 스승님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예측이었다.
혈주의 맹공에 의해 서문이 무너졌다는 비보는 전고(戰鼓)가 무너지기 직전 동문으로 전달된 상황.
다른 세 곳에 비해 비교적 전력이 약한 적들이 배치된 동문과 달리, 대책 없이 퇴각했다가는 서문을 통해 무인지경으로 성 내부를 휩쓸고 있을 혈주와 광신도들을 맞닥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학수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청허자는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다.
“불허(不許)한다.”
“스승님, 시간이 없습니다!”
조바심을 참지 못한 학수가 다급하게 외친 그때.
“누구에게 말이냐?”
이상하리만치 착 가라앉은 청허자의 음성이,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스승님?”
“누구에게 시간이 없느냐 물었다.”
학수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아니,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뒤바뀐 노 도사의 기세에, 그의 평소 모습을 아는 곤륜파의 제자들은 물론 주위의 수비군들 모두가 청허자를 바라본 그 순간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음성이 빗줄기를 뚫고 울려 퍼진 것은.
“어찌 대답을 망설이는 거요. 하늘 같은 스승님께서 묻고 계시지 않소.”
철벅.
딱딱한 음성과 함께 비 웅덩이를 밟는 발걸음.
그와 동시에 깊게 눌러쓴 초립(草笠)을 벗은 이립 어림의 사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학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대답하시오, 대사형(大師兄).”
“……!”
“……!”
일순간, 보이지 않는 격동이 성벽 위를 휩쓸었다.
아니, 그것은 경악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알려진 망자(亡者)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러나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말없이 자신의 사제를 바라보던 학수는 이내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그리 보였다면, 맞소.”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립 어림의 사내, 학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간밤에 잘려 나갔던, 아니 그리 알려졌던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당신을 진심으로 아꼈던 그 멍청한 놈은 이미 죽었소. 그리고 동이 트기 전에 새로 태어났지.”
“그럼 내가 보았던 그 수급은…….”
“잊은 모양이구려. 서녕의 뇌옥(牢獄)이 얼마나 붐비는지.”
그제야 학수는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며칠 전 청해성주를 비롯한 몇몇 수뇌부는 저잣거리로 끌려 나와 즉결 처형되었지만, 그들을 제외하더라도 물경 일백이 넘는 죄인들이 뇌옥에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중 학의와 체형이 흡사한 자를 찾아, 모두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완벽한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제작할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살성(殺星).”
혼잣말처럼 뇌까린 학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학수, 바로 그였다.
암천과 결탁한 배신자의 정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곤륜파 장문인의 장제자가, 무려 삼십 년간 몸담았던 사문을 저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던 제자의 이와 같은 모습을, 청허자는 형용할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느냐.”
그 짤막한 물음에, 학수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유도, 의문도 필요 없다. 오직 주어진 임무만을 생각하라.”
그것은 대답이었고, 동시에 기억이었다.
저 머나먼 사막 너머의 땅에서 태어난 한 갓난아이가, 열세 살의 소년으로 자라날 때까지 수도 없이 들었던.
그렇기에 수십 년이 지나도 거역할 수 없는, 뼛속까지 각인된 의무이자 사명.
“천상천하(天上天下), 만마앙복(萬魔仰伏).”
“……!”
“오직 그것만이 전부요. 더 이상의 이유는 필요 없지.”
파르르 떨리는 스승, 아니 스승이라 불렀던 자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학수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과 목소리로.
“종종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곤 했었지. 청해호(靑海湖)에서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진심이었다.
청허자는 그 누구보다 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고, 우연을 가장한 채 청해호 인근을 떠돌던 어느 소년과의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니까.
“고마웠소. 딱히 특출난 무재(武才)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르리라는 건 나 자신조차도 몰랐거든.”
하지만 청허자는 신분과 재능을 따지지 않았다.
설령 곤륜파가 정마대전의 여파로 극심한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그는 기꺼이 학수를 제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학수가 간자로서 길러졌듯이, 청허자 역시 본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청허자, 모두 당신 덕분이오.”
그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떠오른 순간.
“학수, 네놈이 감히-!”
보다 못한 학의가 분노에 찬 고함을 터트리며 신형을 내쏘았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사문을 등진 배신자를 향해 달려드는 것은 비단 학의 혼자만이 아니었다.
쐐애애액!
표횰한 신법과 범상치 않은 기세.
곤륜십객(崑崙十客)이라 불리며, 향후 곤륜오선의 뒤를 이을 장로들이자 작금의 곤륜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추로 여겨지는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고.
서걱!
적의 몸통을 파고든 검광(劍光)과 함께, 뜨거운 핏물이 솟구쳤다.
촤악, 투두둑.
성벽 위에 흩뿌려지는 선혈(鮮血).
그리고 어느덧 앞을 가로막은 청허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학의는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학수라, 그리 불리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지던 참이었지.”
목이 베이고 심장이 관통되어 숨이 끊어진 다섯 구의 시신 들을 바라보던 학수가, 아니 암천의 간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보다 앞서, 혹은 비슷한 시기에 걸쳐 곤륜파에 스며들었던 또 다른 그림자들과 함께.
“육호(六號). 그게 내 이름이다.”
그 순간.
와득.
이제는 다섯으로 줄어든 곤륜오객이, 정확히는 암천에 의해 길러졌던 간자들이 품에 숨기고 있던 잠력단을 꺼내어 씹어 삼켰다.
스아아아아!
들불처럼 일어나는 거대한 기파 속, 청허자의 나직한 한 마디가 공간을 울렸다.
“진정으로, 너를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