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2
#111화
두두두두!
네 마리 준마가 관도를 내달린다. 휴식이 부족했던 탓에 지칠 대로 지친 말들이 숨을 헐떡거렸지만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제한 시간 : 16:25:32
31, 30.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벌써 세 시진, 자그마치 여섯 시간이 흘렀다. 오는 길에 작은 마을에 들러 갈아탈 말을 구하려 했지만 작고 느려 터진 짐말밖에 없었다.
‘휴식을 취하긴 해야 하는데.’
외통수다.
충분히 강행군을 이어 가고 있지만 제한 시간이 아슬아슬하고, 지금처럼 달리면 말이 버티지 못할 거다.
‘어쩔 수 없나.’
월화와 진무경에게 잠시라도 쉬어 가자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어?”
“진 공자! 앞에!”
굳이 월화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미 놈들을 보고 있었다. 수십 장 앞, 관도를 막아선 시커먼 사내들.
하나같이 너저분한 옷차림에 허리춤에는 곡도 한 자루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이제 두말하면 입 아프다.
‘적풍단.’
양민으로 보이는 이들을 빙 둘러싸고 으름장을 놓던 놈들이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멀찍이 선두에서 앞서 달리던 나를 발견한 마적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어이구, 벌써 다음 손님 오셨네. 정지!”
“어, 그래.”
멈추라는데 멈춰야지, 별수 있나.
퍼버벅!
“커허어억!”
“끄악!”
내가 타고 있는 준마는 앞을 가로막고 있던 두어 놈을 짓밟고 나서야 멈췄다. 마적들은 물론이고 붙잡혀 있던 행인들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본다.
“너, 너 이 새끼!”
안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물었다.
“혹시 몰라서 물어본다. 적풍단, 맞지?”
“웬 놈이냐!”
“반응 보니까 맞나 보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끝내자.”
망설임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정강이뼈가 부러진 놈이 주저앉는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 순간 얼이 빠져 있던 놈들이 재빨리 곡도와 창을 들이댔다.
“죽여!”
“남자는 항상 후방을 주의해라.”
“뭐?”
“뒤에 조심하라고.”
열 쌍의 눈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를 돌아보던 그때.
콰드드득! 뻐억!
전속력으로 달려온 세 마리의 준마가 놈들을 쓸어 버렸다.
* * *
전투는 시작되기도 전에 끝났다. 말에 치여 볼링 핀처럼 나가떨어진 놈들은 산송장처럼 누워 있었고 나머지 놈들도 손쉽게 제압당했다.
“사, 살려만 주십시오.”
“안 죽인다. 몇 군데는 손봐 줘야겠지만.”
“히익!”
진무경이 살아남은 산적들의 팔다리를 똑똑 분지르는 사이 혁무진은 길옆에 매여 있던 말들을 끌고 왔다.
“여기 팔팔한 놈들로 갈아타면 될 것 같은데요? 열 마리는 되니까 아예 싹 가져가서 지칠 때마다 교체하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지난번 놈들과는 달리 이번에 만난 마적들은 각자 말을 소지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이놈의 적풍단 놈들은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사당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백 명이 넘는 잔당들이 산서 북부 곳곳으로 흩어졌다고 했다.
더러는 산자락으로, 더러는 궁벽한 마을 혹은 번화한 곳에서 숨어 있다가 명령에 따라 집결지로 모인다는 것이다.
‘이놈들, 패잔병이 아니야.’
놈들은 작전을 수행 중인 복병이다. 적풍단주는 고원에서 병력을 충원하여 남하(南下)하는 한편 남겨 둔 수하들을 북상(北上)시키고 있다.
월화가 적풍단주를 무서운 인물이라고 평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니 신속하게 물러나는 판단력, 그 와중에도 다음 계획을 준비하는 치밀함, 그리고 계획을 실행시키는 추진력.’
거기에 더해 그는 일신에 지닌 무공도 고강하다고 들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마적 취급하기도 미안할 지경이다.
‘이거 일이 상당히 지저분하게 됐는데.’
왜 퀘스트 등급이 절정으로 바뀌었는지 알겠다. 점입가경으로 알고 보니까 뭐, 적풍단주가 절정 고수라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월화에게 물었더니 대번에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는데요?”
“……아.”
“이렇게 급속도로 두각을 드러낸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본 문의 정보에 의하면 적풍단주는 절정 고수가 맞아요.”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아니, 절정 고수가 왜 마적질을 합니까?”
“산적, 수적 중에서는 초절정 고수도 있는데 마적이라고 못 할 것 있나요.”
“초절정 고수요? 산적, 수적이?”
“나중에 녹림맹주나 장강수로맹주를 만나면 물어보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초절정 고수라니, 진심으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새로 뺏은 말에 올라탔다. 적풍단의 마적들을 꽁꽁 묶어 양민들에게 넘긴 진무경과 혁무진이 그 뒤를 잇는다.
제한 시간: 15:59:13
이 순간에도 제한 시간은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는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는 양민들을 뒤로하고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랴!”
* * *
항산검문 깊숙한 내원에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화원이 존재한다. 항산호 철무백은 외부인 중 유일하게 그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이곳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특별한 공간이었으니까요. 아버지는 고민이 있으실 때마다 화원을 찾으셨죠.”
눈 덮인 화원을 사박사박 걷던 이소월이 서리 낀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이에요.”
“그랬느냐?”
“네, 화원을 가꿀 때면 항상 저를 이곳으로 데려와서 꽃의 이름을 알려 주시곤 했죠.”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이소월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네요.”
“오래전 일이니 그럴 만하다. 괘념치 말거라.”
“철 숙부.”
“응?”
“저, 꽃 싫어해요. 어머니가 좋아서 따라왔을 뿐이지, 사실 꽃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화원을 찾으시는 이유와 같은 거죠.”
이소월은 눈 덮인 화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꽃은 시들었고 화원 중앙에 마련된 봉분(封墳)은 하나에서 넷으로 늘었다.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봉분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누구의 잘못일까?’
어쩌면 무림인의 딸로 태어난 자신의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십 년 전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를 차례로 잃어야 했던 이유다.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문득 두 달 전의 기억이 떠올라 눈 앞을 가린다.
그건 어느 야심한 밤, 단둘이 나눴던 부녀(父女) 간의 대화였다.
‘널 태원진가의 셋째와 엮어야겠다.’
‘셋째라면. 설마 그 망나니와 절 맺어 줄 생각이신가요?’
‘아니다. 그러나 너로서는 견디기 힘든 추문(醜聞)이 될 것이다.’
‘그렇군요.’
‘그뿐이냐?’
‘어쩌겠어요. 비정한 아비를 둔 제 잘못이죠.’
‘알다가도 모를 아이구나.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게냐?’
‘제가 싫다고 하면, 마음을 돌리실 건가요?’
‘적어도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지.’
‘결국 태원진가와의 전쟁은 기정사실이군요.’
‘산서괴협(山西怪俠)과 진천검이 없는 지금이 적기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가주와 이공자가 없어도 태원진가는 강해요. 부디 재고를.’
‘불가(不可). 결정은 이미 내렸다.’
‘그렇다면 반드시 승리하세요. 산서 땅에서 저에 관한 추문 따위는 입도 벙긋 못 할 정도로 강해지세요.’
‘……네가 사내였다면 소문주로 삼았을 것이다.’
‘여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네요. 본문의 소문주 따위, 관심도 없으니.’
우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바뀌었다.
보름이나 지났을까, 이소군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이천백이, 결국은 큰 오라버니인 이소광마저 잃고 말았다.
‘이제는 나 혼자야.’
그렇게 혈랑검 이천백의 마지막 남은 혈육은 새로운 문주가 되었다.
말없이 봉분을 응시하는 이소월의 어깨를 따뜻한 손바닥이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미안하구나. 내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철 숙부, 그런 말씀 마세요. 숙부께서 와 주시지 않았다면 본 문은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테니까.”
적풍단의 거친 공세에 항산검문은 속절없이 밀리는 중이었다. 뒤늦게 이천백의 변고를 접하고 달려온 항산호라는 절정 고수가 없었다면 적들이 물러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내 반드시 그놈의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적풍단주를 떠올린 이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절정 고수끼리의 생사결이라면 철무백이 한 수 앞선다.
이미 앞서 한 번의 격돌이 있었고 풍양은 가벼운 내상과 함께 물러난 전적이 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아.’
항산검문은 북쪽 고원의 마적들에 관해 늘 정보를 수집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고원에 존재하는 마적단은 수십 개지만 그중에서도 풍양이 이끄는 적풍단은 눈에 띌 정도로 무섭게 성장했다.
고원의 우두머리 중에서도 특히 강하고 치밀한 자. 그가 바로 풍양이다.
‘그런 자가 철 숙부와 생사결을 펼칠 리 없어. 섣불리 상대하려 했다가는 거꾸로 당하고 말 거야.’
이소월은 철무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철 숙부. 풍양의 무공에 대해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절정 초입. 도법과 비도술이 경지에 오른 자였다. 다만.”
철무백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초식 하나하나가 음험하기 짝이 없더구나. 아마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공을 익힌 듯싶었다.”
“사마외도…….”
정마대전 이후 중원에서 사마외도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었다. 정파를 표방하는 사파는 있을지언정, 당당히 사파라고 외치는 이들은 없다.
“아직까지는 짐작일 뿐이다. 다시 한번 붙어 보면 알게 되겠지.”
“철 숙부를 믿어요. 그러나 적풍단주를 우습게 보진 마세요. 그에게는 목숨을 대신할 수하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위아래로 짓쳐 드는 적들을 합하면 삼백에 가까운 대병력.
반면 항산검문은 각 지부에 나가 있는 무인들까지 모두 끌어모았음에도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반 무인들은 물론이고 새로 임명된 중진들의 사기도 저조했다.
“소월아. 내 한마디 해도 되겠느냐?”
죽은 벗과의 우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은인의 말이다. 이소월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새겨듣겠습니다.”
철무백이 무겁게 입을 뗐다.
“떠나거라.”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한마디.
그러나 이소월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넌 살아남아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을 거고요.”
“천백이 그 친구가 이런 걸 원한다고 생각했다면…….”
“숙부님.”
단호한 목소리에 철무백이 입을 다물었다. 이소월의 맑은 눈동자엔 굳은 결의가 어려 있었다.
“제가 원한 겁니다. 항산검문의 문주로서.”
“휴우…….”
철무백은 대답 대신 한숨을 토해 냈다.
“숙부께는 이미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이대로 떠나신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굳이 내 대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이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자식처럼 아껴 주었던 철무백이다.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철 숙부는 저와 항산검문의 은인이십니다.”
“어려서부터 봤지만…… 너는 참 영악한 아이다.”
“어릴 때는 영악했고, 지금은 독한 년이죠.”
싱긋 웃는 이소월을 보며 철무백은 연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승산은 있는 게냐?”
“지금이라면 일 할.”
“뭐라?”
“하지만 지원군이 도착한다면 오 할. 그 이상이죠.”
“지원군이라니, 혹시 태원진가에서?”
“두 시진 전에 하오문 정양 지부에서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어요.”
“얼마나 된다 하더냐? 백? 이백?”
“넷이요. 그중 하나는 진천검 진무경이고, 다른 하나는…….”
이소월이 실소를 흘렸다. 그와 얽힌 악연이 생각나서다.
“산서잠룡 진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