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21
로그인 무림-1121화(1121/1141)
높이나 크기, 혹은 내구성을 떠나 성벽의 존재 유무는 공성전에서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한다.
제아무리 볼품없는 성벽이라 할지라도 벽은 벽이니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외적과의 시가전까지 염두에 두고 지어진 서녕의 내성은 외성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을지언정 전투에 있어 상당한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콰아아아앙!
그 모든 것은 찰나에 시작되어, 찰나에 끝났다.
오직 한 사람의.
아니, 한 괴물에 의해서.
구구구궁!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속, 흡사 비명과도 같은 굉음과 함께 허물어지는 내성의 성벽을 바라보며 혈주(血主)는 광포하게 웃었다.
이미 인외(人外)의 힘을 얻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실로 우습기 짝이 없었다.
당장 사방으로 흩어져 꽁무니를 빼도 부족할 판국에, 기껏 도망쳐 온 곳이 내성이라니.
“고작 저런 돌무더기 따위로, 이 몸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더냐.”
나직한 뇌까림과 함께, 혈주는 다시금 적도(赤刀)를 들어 올렸다.
츠츠츠츠!
붉은 도신을 타고 솟구치는 핏빛 섬광.
삽시간에 반월의 형태를 갖춘 거대한 도강(刀罡)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발출되려던 그 순간이었다.
“그만!”
불현듯 울려 퍼진 다급한 목소리.
그러나 갑작스럽게 나타난 누군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혈주는 망설임 없이 적도를 내리그었다.
화아아악!
공간이 붉게 물든다.
마치 벼락이 치는 듯한 찰나의 번쩍임과 함께 수십여 장의 거리를 지워 낸 강기가 먼지구름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니, 집어삼켰다.
실로 괴물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흉포한 기세로.
콰드드드득!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굉음과 진동을 느끼며, 혈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감히 자신을 막으려 했던 불청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늦었군. 조금 더 빨리 말하지 그랬나. 그랬다면 아슬아슬하게라도 멈출 수 있었을 텐데.”
짐짓 태연하기까지 한 혈주의 대답에, 대술사(大術士)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보는 그대로지.”
어깨를 으쓱한 혈주가 턱짓으로 저 멀리 피어오른 먼지구름을 가리켰다.
“놈들의 마지막 희망을 부수고 있었다. 더는 저항할 마음조차 들 수 없도록.”
“너…….”
문득 흐려지는 말꼬리.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한 채, 여전히 웃고 있는 혈주를 말없이 응시하던 대술사가 이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의 생사 유무를.
“그래서, 아직 무사한 거겠지?”
“무사하다 못해 훌륭하지. 날 봐, 이 힘이 느껴지지 않나?”
마치 부모에게 무언가를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두 팔을 펼치는 혈주의 모습에, 대술사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르다.
달라졌다.
평소에 비해 모든 것이.
완전한 핏빛에 물들여진 동공도, 인간과 괴물이 뒤섞인 것처럼 기괴한 몸뚱어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미증유의 기세도 그러했지만 정작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
광기(狂氣).
도무지 그 깊이와 농도를 짐작할 수 없는 끝 모를 광기를, 지금 이 순간 대술사는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사실을 인지했음을 절대 내색해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판단도 함께.
“시답잖은 헛소리는 집어치워.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허, 이거 섭섭한데. 한 배를 탄 동료의 안위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니.”
“우리가 언제부터 그리 살가운 사이였지?”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군. 좋아.”
과장 되리만치 한숨을 크게 내쉰 혈주가 말을 이었다.
“진태경, 그놈이라면 아직 살아있다. 아마도.”
“아마도, 라고?”
“그럼 분명히, 라고 정정하지. 저곳에 남아 있는 노괴(老怪)들이 그 핏덩이 하나를 지키지 못했을 리는 없을 테니.”
대술사가 듣기에도 그리 안일한 추측은 아니었다.
불과 일각 전, 동문을 제외한 삼면의 성벽에서 일제히 퇴각한 수비군들은 내성으로 집결했고 그중에는 궁성과 살성. 그리고 화왕 적천강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비록 내성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하나같이 상당한 부상을 입었으나, 설령 그렇다 하여도 진태경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혈주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때마침 저 멀리 서서히 흩어지는 먼지구름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코 죽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한 사람 역시도.
“……!”
막대한 피로와 내상으로 안색이 파리해진 살성과 궁성.
혹은 그들보다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적천강의 존재 따위는, 지금 이 순간 대술사의 시야에서 잊혔다.
오직 한 사람.
진태경.
마침내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녀는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틀림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로 뒤덮인, 영락없는 혈인(血人)의 몰골이었으나 진태경은 분명 살아 있었다.
비록 새하얀 빛을 띤 창을 지팡이 삼아, 청풍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대술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에게는 천주에게서 부여받은 불가사의한 힘, 마법(魔法)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멀리에서 보아도 위태롭게 느껴질 만큼, 진태경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분께 데려가야 해. 한시라도 빨리.’
어쩌면 마법으로도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
초조함을 느낀 대술사가 마음속으로 조용히 이동 주문을 읊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
불현듯 등 뒤에서 들려오는 혈주의 나직한 속삭임에, 대술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어떻게?’
무공의 핵심이자 뿌리가 기운의 축적이라면, 마법은 기운과의 감응.
그렇기에 기운의 파동에 누구보다 민감한 그녀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혈주는 대술사의 후방을 점한 채 웃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입안에 넣은 맹수처럼.
“마법이라는 거,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힘이더군. 수천수만 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동하는 것도 그렇고…… 반쯤 뒈져 가는 놈도 살릴 수 있고. 안 그래?”
목덜미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대술사는 씹어뱉듯이 입을 열었다.
“이미 말했을 텐데. 시답잖은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헛소리?”
피식 실소를 흘린 혈주가 붉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아쉽지만 이번엔 아니야. 나는 다 잡은 먹잇감을 이런 식으로 놓치고 싶진 않거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대술사는 이를 악물었다.
“혈주, 드디어 네놈이 미쳤구나.”
“그거참 희한하군. 네년은 언제나 나를 미친놈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감히 그분의 뜻을…… 거스를 셈이냐?”
잠시의 침묵 후, 혈주가 선명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마침내 가면과 족쇄를 벗어던진 그는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또한 강해져 있었다.
“괜찮잖아? 한 번쯤은.”
바로 그 순간.
서걱!
핏빛 섬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흐릿해진 대술사의 신형이 삼 장 밖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푸화아악!
피 분수를 내뿜으며 비틀거리던 몸뚱어리가, 실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허물어졌다.
철퍽.
그것으로 끝이었다.
피 웅덩이에 잠긴 몸은 미동조차 없었고, 부릅떠진 채 굳어 버린 눈에서는 한 줌의 생기(生氣)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혈주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덧 고요와 적막에 휩싸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들.
내성을 빈틈없이 포위한 수만 명의 광신도가 크게 뜨인 눈으로 이 뜻하지 않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쉽사리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그들을 향해, 혈주는 담담하게 선언했다.
가장 짧으면서도 확실한, 오직 암천이기에 가능한 방식으로.
“위대하신 천주의 명을 받들어 배교자를 처단한 바, 이제 내가 전군을 지휘한다.”
“……!”
“……!”
“단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
마침내 무거운 침묵을 깨트리는 명령이 떨어진 그 순간.
두두두두!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물경 수만에 달하는 광신도들이 내성을 향해 돌격했다.
살아있는 신이자 유일한 절대자.
천주에게 맞서는 간악한 이교도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아가는 광신도들의 모습에, 크게 소리 내어 웃은 혈주는 발걸음을 뗐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진태경-!”
미증유(未曾有)의 기운이 실린 괴물의 포효가, 전장을 집어삼키며 울려 퍼졌다.
* * *
“……!”
“……!”
공기가 떨린다. 귓가가 먹먹하다.
사방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함성과 비명이. 몸서리쳐질 만큼 차가운 강철의 소음이 전장을 휘감는다.
하지만 그 극심한 혼란과 흐릿한 감각 속에서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적과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를.
동시에, 들었다.
기쁨과 광기에 물든 괴물의 포효를.
‘진태경.’
그래, 그건 내 이름이었다.
탄생과 동시에 주어진 것.
각기 다른 두 세계에서, 나는 하나이자 둘로 존재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내게 주어진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가야 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기경팔맥(奇經八脈)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텐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공력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
하지만 그럼에도, 청풍의 부축을 뿌리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서걱!
눈먼 칼이 어깨를 스친다.
아직 남아 있는지조차 몰랐던 핏물이 흘렀지만, 나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손을 뻗었다.
우드득.
번들거리는 광신도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부릅떠진다.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내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뻗어 나온 뜨거운 열기가 놈을 휘감았다.
퍼엉!
누군가에게는 타들어 갈 것 같은 불길이, 나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온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나를 구해 준 이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야.”
온 힘을 다해 쥐어 짜낸 음성과 함께, 나는 적천강의 어깨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길을. 길을 열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