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22
로그인 무림-1122화(1122/1141)
무너진 성벽을 등지고 선 수비군의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 장렬했고, 또한 격렬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내성으로 퇴각한 그들의 머릿수는 오천 남짓.
온 사방을 새카맣게 물들인 수만의 광신도들에 비하면 고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격차였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최후의 결사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들의 등 뒤에는, 이 무너진 성벽의 잔해 너머에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한들, 나아갈 수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콰드드득!
살이 갈라지고 새하얀 뼈가 드러난다. 격돌과 동시에 전장을 휘감은 붉은 피 안개 속, 고통에 찬 비명과 고함이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버티게! 반드시 버텨야 하……!”
푹!
정수리를 쪼개는 도끼날과 함께 끊기는 외침.
힘없이 허물어지는 이는 지난 수십여 년간 청해성에서 협객으로 이름을 떨친 절정 고수였으나, 이 끔찍한 혼전과 죽음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어찌 그 한 사람뿐만이겠는가.
일문(一門)의 문주도, 여러 식솔을 거느린 가주도.
아직 채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느 젊은 청년도.
광신도들의 눈먼 칼날에 휩쓸린 순간, 그저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어 쓰러질 뿐이었다.
퍼걱! 푸푸푹!
어쩌면 이 처절한 마지막 전투의 결과는, 시작하기도 전에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결사대를 짓누르고 있는 피로는 이미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
오늘의 전투에서 지금껏 살아남았다는 것은 곧 강하다는 증거였으나, 그들의 앞에 놓인 현실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기운, 병력의 숫자.
모든 것이 부족했다. 턱없이.
죽은 이들은 힘없이 지면을 나뒹굴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전우의 시체를 짓밟으며 밀려드는 적들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공포와 분노, 더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며.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온 세상도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가던 그때.
누군가가 피워 올린 불꽃이 더욱 환하게 빛난 것은.
화륵, 퍼어엉!
공기가 타오른다. 태양과도 같은 열기가 빗줄기를 증발시키고 광신도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넘실거리며 나아가는 그 맹렬한 화염의 중심에, 타들어 가는 안광을 번뜩이는 불의 거인이 있었다.
“감히 그 누가!”
화왕(火王) 적천강은 성마른 포효와 함께 소매를 떨쳤다.
거센 바람에 휩쓸린 화염이 강철을 녹이고 광신도들의 살과 뼈를 불살랐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는가-!”
언제나 스스로를 노부(老夫)라 칭해 왔던 적천강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더는 혼자 걷는 길이 아니다.
이제, 함께 걷는 길이다.
적천강이 늘 외롭게 나아가야 했던 그 위태롭고 가파른 사선(死線)에는, 어느덧 그의 일부이자 전부가 되어 버린 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물러서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비틀거리는 진태경의 신형을 부축하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불태우며 적천강은 힘주어 외쳤다.
평소였으면 코웃음을 치며 피했을 칼날들이 전신을 스치고, 공력을 일으킬 때마다 뒤엉킨 혈도에서 불같은 고통이 전해졌으나 지금의 그에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길을 열어라-!”
진태경의, 하나뿐인 제자의 부탁이었다.
너무나도 무모한, 어쩌면 진정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탁.
하지만 이미 생사의 기로에 선 제자의 청을, 늙은 스승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그 혼자만의 의지가 아니었다.
서걱!
눈부신 섬광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는 수십여 개의 목.
때마침 울컥 솟구치는 핏물을 삼키던 적천강이 그 광경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이제 오다니. 느려 터졌군.”
돌아온 핀잔에, 살성(殺星)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내성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대술사와 흑귀들을 막아서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 역시, 이미 상당한 부상을 입은 후였다.
“환자가 안 보이길래 찾아 나섰지.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오려고.”
“그래서, 어쩔 셈인가?”
슈확!
살성은 대답 대신 소도(小刀)를 내리그었다.
유령처럼 쾌속하고 정확한 일격에, 찰나의 공백을 메우며 들이닥치던 광신도들이 짚단처럼 와르르 허물어진다.
마치, 진태경의 상태를 확인한 순간 느꼈던 그의 마음처럼.
“더 늦기 전에…… 내가 앞장서지.”
살성의 나직한 대답에, 적천강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어쩌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고금제일의 살수니까.
그렇기에 살성이라 불리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적천강은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를 느끼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 분명히.
또한 이것이 살성으로서가 아니라, 신의(神醫)로서 내린 진단이라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저 대답에 혹시 모를 희망이 아닌 절망이 담겨 있었다는 것도.
‘죽는다, 녀석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잔인한 진실.
그러나 자신의 팔에 붙들려, 혼절한 듯 축 늘어진 진태경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적천강은 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의 그들에게 있어, 남아 있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그저 모두가 온 힘을 다해, 최후가 될지 모를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릴 뿐.
그리고 그 불꽃의 크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그 크기와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솨아아악!
어디선가 불현듯 뻗어나와 공간을 뒤덮는 강기(罡氣).
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처럼 예리한 살성의 그것과는 달리, 바람처럼 자유롭게 느껴지는 강기의 그물은 적들을 휘감았다.
침착하고 부드럽게.
동시에 그 찰나의 느낌을 송두리째 잊게 만들 정도의 파괴력으로.
서걱, 푸화아악!
피 분수가 솟구친다.
힘없이 허물어지는 적들 사이로 나타난 궁성(弓星)의 손끝을 따라, 서문에서 펼쳐진 격렬한 전투 속에서 두 동강 난 활대가 쾌속하게 움직였다.
콰드드득!
비록 본래의 형태를 잃었으나, 애당초 그녀의 활은 결합과 해체를 통해 두 자루의 곡도(曲刀)로도 쓰여왔던 것.
일언반구조차 없이 폭풍처럼 광신도들을 휩쓸며 힘을 보태는 궁성의 뒤를 따라, 익숙한 얼굴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은인!”
다급한 외침과 달리, 청풍이 펼치는 검결은 마치 화선지를 누비는 화공의 붓처럼 유려했다.
쉬쉬쉭!
노을을 닮은 자줏빛 강기가 한 움큼의 꽃을 그려 냈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수십여 개의 매화는 광신도들에게 닿은 순간, 더욱 붉게 물들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왜 네 녀석까지…….”
그리고 이 위험천만한 동행을 위해 적진 깊숙이 파고든 그를 살성이 만류하기도 전에, 저 멀리에서 울려 퍼진 함성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
“……!”
소리라는 것이 거인의 형태로 드러난다면 이랬을까.
이미 터져 나간 누군가의 고막마저 뒤흔드는 그 함성은 그만큼 거대했고, 한편으로는 악에 받친 듯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랬기에 함성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이들 모두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진태경을 부축한 채 적들을 상대하던 적천강과 청풍도.
마침내 동문을 점령한 적들의 지원군이 도착했음을 직감한 살성과 궁성도.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막강한 기운을 흩뿌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한 사람.
아니, 괴물도.
“저건…….”
채 끝맺어지지 못하고 흐려지는 말꼬리.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함성의 근원지를 바라보던 혈주가,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핫, 푸하하하하!”
시산혈해로 뒤덮인 전장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웃음소리.
하지만 혈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듯이 웃어 젖혔다.
허리를 숙이고 배꼽까지 부여잡은 채, 마치 살아생전 이보다 재미있는 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는 듯이.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하늘을 찌를듯한 함성과 함께 다가오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지금껏 상대한 그 어떤 적들보다 나약하고 하찮은, 그렇기에 더욱더 그를 분노하게 만드는 저 빌어먹을 부나방들을.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을 보았나.”
혈주는 진심으로 의심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 순간, 핏빛으로 물든 그의 동공에 비치고 있는 저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의심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혈주가 진정한 불로불사(不老不死)의 힘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깨달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늙고, 힘없고, 혹은 너무나도 어린 저들이.
오직 일평생 짓밟히고 두려움에 떠는 운명을 타고난 약자들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필사의 각오와 차마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으로 뒤섞인, 굳은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로 함성을 내지르며.
조잡한 죽창과 녹이 슨 도끼를 온 힘을 다해 움켜쥔 채.
자신들을 위해 각자의 운명을 내건 이들을 돕고자, 일평생 순응해오던 운명을 거스른 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들의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수많은 백성(百姓)들이.
바로 오늘, 이곳에 있었다.
“감-히!”
그리고 미증유의 기운이 담긴 괴물의 포효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백성들의 함성을 짓누른 그 순간.
“……해라.”
극소수의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희미한 음성과 함께, 스승의 품에서 온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진태경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조용히 좀 해라…… 이 시벌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