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25
로그인 무림-1125화(1125/1141)
콰드드드득!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진 그 순간, 혈주는 불현듯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아.’
뜨겁다. 아득하다.
흔들리는 시야와 멀게만 느껴지는 소음들.
어쩌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꿈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만약 살과 뼈를 불사르는 이 끔찍한 열기가 없었다면, 혈주는 진정 그리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화염으로 인한 매캐한 연기와 아지랑이 너머로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쿨럭.
입술을 비집고 흘러넘치는 선혈.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작열통(灼熱痛) 속, 내장 조각이 섞인 핏물을 울컥 토해 낸 혈주는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한 자루의 창으로 자신과 이어져 있는, 젊고도 무모한 부나방을.
동시에 문득, 피에 젖은 입술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순수한 의문이 담긴 눈빛.
짧지만 많은 뜻이 담겨 있는 그 물음에, 진태경이 대답했다.
“몰라, 나도.”
“뭐?”
“단지…… 당연하게 알 수 있었다.”
놀라우리만치 담담한 음성으로, 진태경은 말을 이었다.
“네 모든 움직임을.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
“그뿐이야.”
일순간, 혈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때문에?
틀렸다.
손바닥을 관통한 것으로도 모자라 몸속 깊숙이 파고들어 열기를 퍼트리는 이 빌어먹을 창날도,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 수 있었다고? 내 모든 것을?’
촌각 전에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한계마저 넘어선 자신의 권능은 실로 강대했고, 상대와의 격차는 가능성이라는 단어조차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거짓도, 허풍도 아니다.’
진태경과 시선이 맞닿은 그 순간, 혈주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한 가지 진실을.
더불어 혈주 자신이 그 진실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물어볼 필요도 없었군.”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진태경이, 흐릿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너보다 강했다.”
마침내 적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에 혈주의 등골이 찌르르 울렸다.
고통마저 뒤덮으며 전신을 휩쓰는 무수한 감정들.
그것은 뼈저린 패배감이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인 동시에 그와는 전혀 상반된 무언가이기도 했다.
깊은 안도와 기쁨.
지금 이 순간, 그는 스스로의 선택이 옳았음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천주시여, 경애하는 나의 주인이시여. 보고 계십니까. 듣고 계십니까.’
혈주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끊이지 않는 빗줄기와 먹구름에 가려진, 자신의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제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나이다.’
사실 혈주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태경의 제거는 확고부동한 충심(忠心)만으로 결심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서운했다. 원망스러웠다.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는 종복들의 안위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한 주인의 모습에.
동시에, 우습게도 질투했다.
그런 주인에게 애정에 가까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진태경을.
하여 죽이고자 했다.
번번이 암천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치운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충성심이라는 세 글자로 덮어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반드시 진태경이 죽어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직접 증명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반드시 그리될 테니까.
“열화신룡(烈火神龍) 진태경. 인정하마. 너는 분명 신룡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해.”
혈주는 진태경을 향해 속삭였고, 그것은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심이었다.
아니, 오히려 신룡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하게 느껴졌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와중에도 무아지경(無我之境)에 휩싸인 채, 더 높은 깨달음을 향해 가까워지던 그 모습은 다시 떠올려보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그래, 네놈의 말이 옳다. 그 순간의 너는 분명 무서우리만치 강했지. 나로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진태경이 얼마나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생사가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어찌 저렇게 분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고작 한 줌에 불과한 기운이 실린 창날로, 어떻게 그의 막강한 강기(罡氣)를 파훼했는지도.
그러나.
“그런 것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지.”
어느덧 혈주는 웃고 있었다.
패배자라면 결코 보일 수 없는, 환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의 몸속 깊숙이 박힌 창날을 붙잡았다.
정확히는, 가슴에서 한 뼘 차이로 벗어난 백염의 창날을.
푸욱. 투두둑.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핏물.
혈주는 짙은 수강(手罡)에 휩싸인 손으로 창날을 뽑아내며 뇌까렸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진태경이 혼신을 다해 내뻗은 마지막 공격은, 혈주로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만약 때맞춰 진태경의 공력이 고갈되지만 않았다면.
그로 인해 힘을 잃은 창날의 방향이 빗나가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랬을 터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
혈주는 몸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환희를 느꼈다.
저 드높은 하늘은, 결국 진태경이 아닌 자신의 손을 들어 주었다.
“네놈이 믿는 그 알량한 하늘이 아닌, 내가 섬기는 진정한 하늘의 뜻이란 말이다!”
바로 그 순간.
고통 따위는 단숨에 잊어버릴, 벼락과도 같은 전율과 함께 관통당한 손마저 빼낸 혈주가 창대를 비틀었다.
쉬릭, 콰드드득!
무시무시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맹렬하게 회전하는 창대.
백염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것은 마지막까지 애병(愛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단단히 묶어놓았던 옷깃을 단숨에 끊어 내고, 이내 주인의 손아귀를 피투성이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철퍽.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 나가는 몸뚱어리.
신형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쓰러진 진태경을 향해, 혈주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정확히는, 내디디려 했다.
다음 순간, 연못이 아닌 화산(華山)의 산기슭에서 성장한 또 하나의 신룡이 포효와 함께 달려들기 전까지는.
“안 돼!”
쐐애애액!
어둠 너머로 노을이 번진다. 줄기줄기 금이 간 검신을 따라 피어난 강기가 서른여섯 개의 꽃잎이 되어 흩날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아름다운 검격(劍擊).
하지만 그 안에 실린 감정은 어느 때보다 처절했고, 그렇기에 더욱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후우웅!
곧이어 공간을 뒤덮은 핏빛 강기는, 꽃잎이 아닌 숲마저 송두리째 베어 가를 만큼 강맹했으니까.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뒤흔들리는 지축.
세찬 빗줄기마저 가라앉히지 못한 먼지구름 너머로, 비틀거리며 일어난 인영이 쓰러진 진태경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어딜, 쿨럭. 가려 하느냐.”
혈인(血人)이나 다름없는 몰골로 다시 일어나 앞길을 가로막은 적천강과 청풍의 모습에, 핏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북망산(北邙山).”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창을 비스듬히 치켜세우며. 괴물이 덧붙였다.
“물론, 가는 건 네놈들이지.”
우우웅.
주인을 잃은 창날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 * *
솨아아아.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너머, 끝없이 펼쳐진 어두컴컴한 하늘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귓가에 남아 메아리치는, 혈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네놈이 믿는 그 알량한 하늘이 아닌, 내가 섬기는 진정한 하늘의 뜻이란 말이다!’
환희로 들끓던 그 핏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아니, 나를 포함한 모두가 혼신(渾身)을 다해 싸웠다.
더는 쏟아낼 것조차 남지 않을 만큼.
그 어떤 후회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하지만…….
‘하늘의 뜻 따위, 따른 적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동시에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촤륵.
온통 짓이겨지고 부러진 손아귀로, 핏물이 뒤섞인 검붉은 흙덩이를 있는 힘껏 그러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혈주가 비웃었던, 내 알량한 하늘이 바로 저들이었으므로.
퍼어엉!
맹렬한 파공성이 공간을 터트린다.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는 적천강의 모습이, 포탄처럼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는 청풍의 신형이 흐릿한 시야에 담긴다.
마침내 자신을 막아서는 모든 걸림돌을 허물어트린 채, 나를 향해 다가오는 괴물의 발걸음도 함께.
철벅.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선명해지는 핏빛 안광(眼光)을 바라보며,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억도 나지 않는 갓난아이 시절처럼 몸뚱어리를 뒤집고, 두 팔과 다리로 땅을 짚었으며, 힘없이 휘청거리는 육신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느덧 태양처럼 붉게 타오를 만큼 가까워진, 혈주의 두 눈동자와 마주한 그 순간.
‘인벤토리 오픈, 소환.’
이 광활한 천하에서 오직 내게만 허락된 무한의 창고 속에서, 잘 벼려진 단검을 꺼내어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귓가를 파고든, 나직한 조소(嘲笑)를 들으며,
“역시.”
콰득.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혈주가 섬광처럼 움켜쥔 내 손목이, 두 번 다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산산이 으스러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상대를 예측한 건, 혈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륵, 툭.
회광반조(回光返照)로 인해 지워진 고통을 뒤로한 채, 나는 손아귀에서 떨어져 내리던 단검의 칼자루를 발끝으로 후려쳤다.
푹.
“……!”
서늘한 파육음과 함께 살갗 깊숙이 파고드는 단검.
일순간 크게 뜨인 두 눈으로 자신의 정강이에 틀어박힌 날붙이를 바라본 혈주가 입술을 핥았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허나 그 때문에…….”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은 한 다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네놈을 결코 살려둘 수 없는 것이다.”
콰드드득!
짓뭉개진 살갗 사이로 튀어나오는 새하얀 뼈마디.
한쪽 팔에 이어, 두 다리마저 불구로 만든 혈주가 벼락처럼 손을 뻗어 내 목을 움켜잡았다.
우득.
뼈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어두워지는 시야.
숨을 헐떡이는 내 귓가로 깊게 가라앉은 혈주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기나긴 악연이었다. 열화신룡 진태경.”
그 순간.
화아아악.
지나온 삶을 반추하는 마지막 촛불처럼,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지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아니.
어쩌면 노을보다도 붉고 짙은 색으로.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