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3
#112화
마적이 백주대낮에 대로를 활보한다?
평소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먼저 인근의 무림 문파가 나설 것이고 그다음은 관아의 병졸들이 제압할 것이다.
그러나 마적들의 숫자가 수백에 달한다면, 그들을 토벌해야 할 무림 문파조차 압도한다면 관아의 벼슬아치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을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처럼.
“저, 저놈들 마적 아니여?”
“놈이라니, 자네 목숨이 세 개쯤 되나? 그 악명 높다는 적풍단이잖아.”
“그 적풍단? 얼마 전에 항산검문이랑 붙어서 깨진 것 아니었나?”
“그런 줄 알았지. 한데 이번에는 좀 다른가 보더라고. 벌써 저잣거리에 항산검문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그래도 깜냥이 있는데 설마하니 마적들 따위한테…….”
“어허, 그 입! 맨 앞에 가는 저 사내가 풍양이라고, 적풍단 두목인데 절정 고수라더군.”
“뭣이, 절정 고수?”
“그래, 마적이라고 무시할 게 못 된다니까. 듣기로는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머리도 아주 비상하다던데.”
양민들의 두려움 섞인 웅성거림이 풍양과 휘하 마적들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풍양의 오른편에서 말을 몰던 수하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놈들의 주둥이를 찢어 놓을까요?”
“그리하고 싶으냐?”
“단주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 두 놈부터 처리한 다음 마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지요.”
“늙은이들은 죽이고, 젊은 놈들은 사로잡고, 여인들은 겁탈하겠다?”
“흐흐, 저 같은 놈들한테야 늘 하던 일 아닙니까. 어차피 항산검문 놈들은 지금쯤 겁을 잔뜩 집어먹고 담벼락 뒤에 숨어 있을 터인데.”
“그렇겠지. 모든 힘을 끌어모은 일전을 준비 중일 것이다.”
“그래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깁니다. 단주께서 항산검문 놈들을 쓸어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시는 건 기정사실이죠.”
“그래서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예?”
풍양은 어리둥절한 수하의 반응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나같이 생각이 짧고 천성이 잔인하다. 그래서 마적이 된 것이고, 풍양이 그들을 곁에 두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루기가 쉬우니까.’
웃음을 그친 그가 입을 뗐다.
“대동지부를 몰살시킨 것은 전쟁의 일부다. 그러나 지금 양민들을 건드렸다가는 태원진가가 끼어들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밖에 안 돼.”
“그놈들이 산서성의 주인이라도 된답니까?”
“아직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그리되겠지. 그전에 항산검문을 집어삼키고 개처럼 넙죽 엎드려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저어, 단주님 말씀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태원진가 같은 정파 놈들이 우리 같은 마적들을 좋게 보겠습니까?”
“마적? 누가 마적이냐?”
“예?”
“지난번에 보니 항산검문주의 미색(美色)이 대단하더구나.”
눈을 껌뻑거리던 풍양의 수하는 마침내 뜻을 알아차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혼기가 꽉 찼으니 지아비를 맞이해야 하겠군요.”
“멸문지화와 혼인. 둘 중 하나를 택해야겠지.”
“그럼 적풍단은……?”
“알맹이를 취하고 껍데기는 뒤집어써야지. 어디 보자, 다른 놈들에 비해 네가 그나마 얼굴이 멀쩡하니 수문각주를 시켜 주마.”
“으하하!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수하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풍양은 고삐를 움켜쥐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였지만 야망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오래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눈앞을 스친다.
‘벌써 이십 년이 훌쩍 넘었군.’
마적이 되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쉽고 간단했다. 제 발로 찾아가거나, 잡히거나. 풍양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어린 시절 죄를 지어 관아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에 마적단의 습격을 받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두목, 여기 어린놈도 있는데요?’
‘응? 비쩍 곯아서 팔아 봤자 몇 푼 받지도 못하겠네. 꼬마야, 소매치기라도 하다가 걸렸냐?’
‘아뇨. 사람을 죽여서요.’
‘사람을 죽였다고? 네 나이가 몇인데?’
‘열셋이요.’
‘죽인 이유는?’
‘사흘 동안 굶었는데 왕초가 만두를…….’
‘만두? 동냥질한 걸 뺏긴 거냐? 그럼 눈 돌아갈 만하지.’
‘그게 아니라요. 배는 고프고, 동냥질할 힘도 없고. 앞에서는 만두를 먹으니까.’
‘……그래서 죽였다?’
‘뺏어 먹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야, 이놈 풀어 주고 뭐라도 먹여. 오늘부터 우리 식구다.’
풍양은 그날부로 마적이 됐다. 천애 고아로 유리걸식하던 그는 눈치가 비상했고 머리 회전도 빨랐다.
사흘에 한 끼를 먹을까 말까 했던 과거에 비하면 마적 생활은 풍요로웠다.
약탈? 살인? 고작 열세 살에 만두를 먹고 싶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렀던 풍양에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불과했다.
‘허 참, 내가 마적질만 십 년 넘게 했는데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죄책감이라는 게 없는 놈 같아.’
‘왜요? 전 마적이잖아요.’
‘자식이. 보통은 그게 아니라니까. 차차 익숙해지는 거지, 처음부터 능숙한 놈은 없다고.’
‘두목도 그러셨어요? 전 쉽던데.’
‘쉽다, 쉽다라……. 이거 범 새끼를 키우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나한테 무공 한 수 배워 볼 테냐?’
‘무공이요?’
‘그래, 무공. 너야 아직 어린 나이니까 근골과 무재만 좀 받쳐 준다면 충분히 고수가 될 수 있을 게다.’
‘그럼 오늘부터 사부라고 부를게요.’
‘사제지간은 염병, 됐으니까 지금처럼만 해.’
사제지간을 맺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일 년 후, 두목은 일류 고수에게 목이 잘려 죽었고 풍양은 새로운 마적단에 둥지를 틀었다.
‘광칠이 밑에 있었다고?’
‘예. 배불리 먹여 주시기만 하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눈치는 제법 있어 보이는군. 어린놈이라고 봐주는 거 없으니까 알아서 잘 따라와라.’
고원은 치열했다. 상단을 잘못 건드렸다가 마적단 전체가 몰살되는 일도 있었고 마적단들끼리의 알력 다툼도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풍양은 매번 살아남았고, 점점 강해졌다.
그의 나이 이립(而立)이 되었을 때, 무공은 일류에 접어들었고 제법 규모 있는 마적단의 조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지.’
힘의 법칙은 어디에나 적용되는 법.
고원도 결국 강자가 지배하는 무림의 일부분이었다.
풍양에게는 원대한 야망과 뛰어난 머리가 있었지만, 우두머리에 걸맞은 무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삼류 무공의 한계.’
풍양의 무재는 뛰어났다.
어린 시절 명문 정파에 입문하여 훌륭한 내공심법과 무공을 익혔다면 진즉 절정의 벽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지 소굴에서 자라고 고원의 마적들에게 삼류 무공을 배운 그의 한계는 명확했다.
‘천운(天運)이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도 제자리걸음이었겠지.’
풍양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맺혔다.
삼 년 전, 그날을 기점으로 풍양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마적단의 일개 조장에서 고원의 한 축을 움직이는 적풍단의 단주, 그리고 이제는 무림 문파를 집어삼킬 차례다.
“단주!”
수하의 외침에 풍양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 멀리, 성벽처럼 높게 쌓아 올린 돌담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항산검문.’
자신과 적풍단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바라보던 풍양의 시선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불같은 기세.
‘항산호 철무백.’
항산검문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
비록 지난번에는 약간의 손해를 보고 물러났지만…….
‘오늘은 다르지.’
풍양은 무의식적으로 품 안을 더듬었다. 단단한 목갑을 확인한 그의 웃음이 더더욱 진해졌다.
“단주, 명령을.”
“포위해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다음에 사자를 보내.”
멸문과 혼인.
항산검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항산검문을 손에 넣을 것이다.”
* * *
“놈들이 본 문을 빈틈없이 에워쌌습니다!”
“그 숫자가 이백이 훌쩍 넘어갑니다!”
“문주, 부디 결단을.”
상석에 앉아 있던 이소월은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병력 배치는 끝났나요?”
“백여 명 중 절반은 문을 막고 나머지는 방패와 활로 무장시켰습니다.”
말이 백여 명이지, 실은 그것에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대전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난밤 항산검문의 중진 몇이 가족과 자신들을 따르는 수하들을 데리고 줄행랑을 쳤기 때문이다.
“철 숙부, 제가 따로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됐나요?”
“네 말대로 조치해 두었다.”
이소월의 계책은 다름 아닌 기름이었다. 장원 곳곳에 마차 열 대 분량의 기름을 골고루 뿌려 놓았다.
잘 마른 건초 더미로 덮어 두었으니 불이 닿기만 해도 사방이 불바다로 변할 것은 자명했다.
‘동귀어진이라도 할 셈인가?’
철무백은 걱정스러웠지만 말을 아꼈다. 그가 오랜 세월 지켜봤던 이소월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침착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하루, 딱 하루만 버티면 됩니다. 태원진가의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 그때까지만 시간을 끌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태, 태원진가에서 지원군을 보냈습니까?”
“산서잠룡과 진천검이 직접 오고 있다는군요.”
대전에 모인 이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진천검 진무경이야 이미 중원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무공의 천재고, 산서잠룡 진태경은 떠오르는 샛별이다.
그가 항산검문과의 전쟁을 통해서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껄끄럽지만 한 편이라고 생각하니 천군만마가 따로 없다.
무엇보다…….
“풍양이 아무리 간 큰 놈이라고 해도 태원진가의 직계를 상대로 검을 겨누진 못할 겁니다.”
“……그렇겠죠.”
이소월은 내심 씁쓸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태원진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항산검문이다.
산서 북부를 호령하던 무림 문파가 이제는 마적단을 상대로도 버티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니.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는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 순간이었다.
대전 문이 열리고 수문각의 무사가 헐레벌떡 뛰어와 외쳤다.
“문주님, 적들이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사자?”
“예. 직접 만나 뵙고 전해 드릴 말이 있다고…….”
이소월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각이라도 전투를 늦출 수 있다면 뭐든지 해야 한다.
“들여라.”
수문각 무사가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풍단의 사자가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썩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은 그가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대항산검문의 문주님을 뵙소.”
다분히 조롱 섞인 태도였지만 중진들은 물론이고 불같은 성격인 철무백도 분노를 참았다. 앞서 이소월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사자를 보냈지?”
“거, 먼 길 온 사람한테 탁주라도 한 사발 주고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 헉.”
적풍단의 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철무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엄청난 기세를 내뿜었기 때문이다.
“탁주가 그리 먹고 싶더냐?”
깊게 가라앉은 음성에 사자가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목이 말라서 허, 헛소리를 그만.”
“철 숙부. 그만하세요.”
“……흥, 헛소리 그만하고 말이나 전해라.”
간신히 철무백의 기세에서 풀려난 사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다, 단주께서 말씀하시길, 무익한 전쟁은 멈추고 이제 우의를 다지자 하십니다.”
“우의?”
항산검문의 중진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대 문주인 이천백을 배신하고 소문주 이소광마저 죽인 것이 누구인가? 심지어 바로 얼마 전에는 대동지부의 식솔들을 몰살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소월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사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거절한다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싶으면 혼인 예물로 항산검문을 통째로 바치라는 뜻이군.”
“저, 저는 거기까지는 잘…….”
이쯤 되니 대전 안의 사람들도 풍양이 전한 ‘우의’의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두가 분노했지만 그중 가장 빠르게 움직인 사람은 항산호 철무백이었다.
퍽!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십여 장의 거리를 뛰어넘은 철무백의 일 권이 사자의 가슴에 박혔다. 가공할 열기를 머금은 붉은 권기(拳氣)가 가슴뼈를 박살 내고 피와 살을 태웠다.
“꺼허어어.”
마지막 단말마와 함께 사자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놈의 가슴에서 주먹을 뽑아낸 철무백이 이소월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백번 죽어 마땅한 놈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이소월이 말을 이었다.
“이제 싸움을 피할 수 없겠군요.”
반 시진 후, 항산검문의 모두는 사방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