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30
로그인 무림 1130화(1130/1141)
빛은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지우고, 잊게 해 준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진태경의 시야를 새하얗게 뒤덮으며 날아드는 빛줄기처럼.
쉬이이이잉!
부풀어 오르는 섬광 속, 진태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일체의 잡념이나 의문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깨끗이 비웠다.
아니, 비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수십여 개로 나뉜 빛줄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전신의 요혈(要血)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허초(空招)가 아니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실체를 지닌 저 섬광 하나하나에,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담겨 있음을.
그러나 진태경이 내린 선택은, 후퇴가 아닌 전진이었다.
화륵, 쾅!
힘주어 뻗은 발끝을 따라 흐르는 화염.
한껏 자세를 낮춘 채, 빗발치는 섬광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쏘아지는 그의 모습을 본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화일로(炎火一路)라, 확실히 싸울 줄 아는군.”
그리고 이와 같은 노인의 칭찬에, 진태경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답했다.
스륵.
삽시간에 좁혀지는 공간 너머, 노인을 향해 나아가던 창이 잔상(殘像)에 휩싸여 파도치듯 일렁였다.
마치 거대한 용의 꼬리처럼.
화아악!
창날을 따라 피어오르는 군청색의 불길.
앞서 노인이 펼친 한 수와 같이, 단숨에 수십 개로 분화(分火)한 화염이 공간을 뒤덮으며 들이닥쳤다.
콰아아아!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이 실재한다면 이런 광경일까.
하지만 용암과도 같은 그 끔찍한 열기 앞에서도, 평온하게 가라앉은 노인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 창날을 향해 마주쳐가는 그의 양손 역시도.
콰드드득!
일순간, 진태경은 눈을 부릅떴다.
합장(合掌)하듯 그러모은 노인의 손바닥 사이로, 부르르 떨고 있는 창날이 그의 동공에 비치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의문.
그러나 단 한 번의 합장과 함께 자신을 향한 모든 화염을 날려 보낸 노인은, 되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그냥 붙잡은 건데.”
“……!”
“그건 그렇고, 이번엔 더 뜨끈한 것으로 해 보게. 모처럼 노곤해지는 기분이라 썩 괜찮군.”
진태경은 문득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력을 다한 일격을 공수납백인(空手納白刃)으로 막아 낸 것부터가 미친놈인데, 이제는 강철마저도 녹여 버리는 수 갑자의 열양지기를 온천수 취급하다니.
‘뭐 이런 늙은이가 다 있지?’
지금껏 싸웠던 상대 중 가장 강했던 혈주(血主)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턱없이 못 미쳤다.
혈주는 핏물을 원료로 삼아 재생에 가까운 회복력과 끝없는 공력을 손에 넣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권능에도 결국 한계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혈주와는 타고난 결이, 격이 달랐다.
인적 드문 호수처럼 잔잔한 눈빛에는 별다른 살의(殺意)조차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단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한 느낌.
그리고 진태경의 뇌리를 스친 그 짧은 생각을, 노인은 또렷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잡념(雜念)이 그득한 것을 보아하니, 아직 살 만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 순간.
파창!
붙잡혀 있던 창날이 산산이 부서지는 동시에, 부드럽게 나아간 노인의 손바닥이 진태경의 가슴에 닿았다.
퍼엉!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폭발음.
진태경은 눈앞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격통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이명(耳鳴)으로 가득 찬 귓가를 유독 선명히 울리는, 노인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 잡념, 다시 비워 주지.”
“……!”
진태경에게는 뭐라 대답할 시간도, 고통을 가라앉힐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노인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
후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정수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기운.
고통조차 잊게 만드는 그 무시무시한 기파(氣波)에, 진태경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콰아아아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에 이어 들이닥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붕 뜬 듯한 감각과 함께 저 멀리 나가떨어진 진태경의 등 뒤로, 순식간에 십여 장의 공간을 가로지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판단이었어. 나려타곤(懶驢打滾)을 펼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끝났을 테니.”
평소의 진태경이었다면, 눈앞의 적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말했을 것이다.
아가리 닥치라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노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심호흡조차, 티끌만 한 잡념조차 크나큰 사치라는 것을 그는 다시금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 간단한 걸 이제야 알았나?”
……저 정체 모를 늙은이가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한, 지금 같은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함께.
“오, 이건 아주 큰 깨달음이로군. 그럼 이제 어쩔 셈인가?”
노인의 흥미로운 눈빛을 마주하며, 진태경은 자루만 남은 창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천천히, 동시에 신중히.
그리고 마침내 두 다리로 우뚝 섰을 때, 그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스륵.
불현듯 감기는 두 눈.
미친 짓이라는 생각도, 혹시 모를 두려움도 잠깐뿐이었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은 곧 미동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미 어둡게 물든 시야는 눈으로부터 전달되던 정보를 차단했다.
그렇게, 진태경은 중요한 한 가지를 버림으로써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앞서 벌어졌던 암천과의 격전 속에서 미처 끝맺어지지 못했던 깨달음의 끈을.
또한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그리고 이와 같은 진태경의 모습에, 노인은 다시 한번 흐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래, 응당 이래야지.”
그 순간.
팟.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청년과 노인은 서로를 향해 쏘아졌다.
화륵, 콰아앙!
진태경은 홀린 듯이 멸염신권(滅炎神拳)을 내뻗었다.
천년 거석마저 녹여 낼 듯한 열기가 회백색 공간을 휩쓸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더불어 느끼고 있었다.
노인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소리마저 앞지른 속도로, 자신의 사각(斜角)을 파고드는 중이라는 사실을.
퍼엉!
진태경은 벼락처럼 신형을 비틀었다. 강맹하기 그지없는 한 줄기의 장력(掌力)이 조금 전 그의 머리가 있던 허공을 후려쳤다.
“훨씬 낫군.”
암전(暗轉)된 시야 속, 진태경은 쉴 새 없이 사방을 덮쳐 오는 노인의 공격들을 가까스로 피해 내며 호흡을 삼켰다.
기분 탓일까.
그 무엇보다 선명하던 노인의 목소리는. 어느덧 메아리보다 멀고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들린다는 것이, 부족하다는 증거지.”
맞다. 그럴지도 모른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껏 늘 그래 왔으니까.
힘이 부족했기에 모두를 지키지 못했고, 그로 인한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깊은 밤마다 악몽을 꾸고는 했다.
그렇게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다, 이내 힘없이 사그라지고 말았다.
“허나, 그것은 욕심이다. 인간은 완전무결해질 수 없으니.”
진태경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령 욕심이 아닌 탐욕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누군가를 살리고, 그 자신도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지, 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소중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모두가 그것을 꿈꾸지. 비록 현실은 잔인하지만.”
노인은 담담한 음성과 달리 계속해서 진태경을 압박했다.
채찍처럼 휘어지는 발끝이, 비스듬히 내리긋는 수도(手刀)가, 부드럽게 내뻗은 손바닥이 모두 검이요 창이었다.
그 한 수, 한 수에 진득한 살기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으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소멸시킬 듯한 기운으로 넘쳐흘렀다.
“혹시 모르지. 이대로 완전한 안식에 드는 것이, 자네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그 순간이었다.
연거푸 물러서던 진태경의 발걸음이 못 박힌 듯 멈춰 선 것은.
콰아아앙!
허공에서 부딪히는 두 개의 주먹.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주름진 노인의 일권(一拳)에는 감히 항거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힘이 담겨 있었지만, 진태경은 서서히 밀려 나가는 발끝을 힘주어 버텨 냈다.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지?”
악물린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 진태경의 물음에, 노인이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글쎄,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설마.”
“이미 아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 더는 시간이 없으니 이쯤에서 결정짓도록 하세.”
뜻 모를 통보에 진태경이 반문하려던 그때, 힘이 더해진 노인의 주먹이 그를 밀어 냈다.
꽈앙!
포탄처럼 튕겨 나가는 신형.
그리고 허공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되찾은 진태경은, 지면에 착지함과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공간의 울림을 느꼈다.
우우웅.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려진다.
저 멀리,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무형(無形)의 검이.
날붙이 따위가 아닌, 오직 기운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쥔 노인의 모습이.
“피해 보게. 만약 피할 수 없다면…… 여기까지인 거겠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진태경은 더는 묻지 못했다.
아니, 감히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부여잡은 지금의 이 감각을 잠시라도 잃는다면, 야트막한 잡념이라도 끼어든다면 전신이 조각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고오오옹.
일순간,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노인의 두 손을 따라 회백색 공간이 몸을 떨었다.
동시에 진태경의 칠흑 같은 시야 속 어딘가에서부터, 희미한 빛줄기가 흘러들어왔다.
‘이건, 뭐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정확히는 세 가지의 공력을 합친 뒤에서야 매우 드물게 찾아왔던, 그렇게 잠시 머물다 흐릿해졌던 감각이었다.
이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본능의 영역.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아니 그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영역.
여섯 번째 감각과 맞닿은 그것이 진태경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침내 노인의 손끝을 따라 내리그어진, 무형의 검을 똑바로 직시한 채.
스아아악!
마치 온 세상이 갈라지는 듯한 절삭음이 울려 퍼진 그 순간.
화아악.
진태경은 보았다.
깊은 밤처럼 어두운 그의 시야를 밝히는, 한 줄기의 빛을.
그리고 동시에, 홀린 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