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34
로그인 무림 1134화(1134/1141)
곤륜산의 공기는 그날따라 무거우면서도 서늘했다.
높이 솟은 봉우리들을 타고 흐르는 안개는 유독 짙었고, 사방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인간과 함께 공존하던 크고 작은 생물체들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만, 짙은 안개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안광과 섬뜩한 괴성(怪聲)만이 있을 뿐.
– 크르르.
싯누런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는 흉포한 울음소리.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곤륜산을 호령했던 산군(山君)은, 살아 있을 적보다도 거대해진 몸뚱어리를 굽혀 자신의 주인을 맞이했다.
어느덧 곤륜파의 상징과 같은 태청전(太淸殿)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던, 수천의 인마(人魔)와 함께.
“명령하신 대로 모두 집결시켰습니다.”
칠흑 같은 장포로 전신을 휘감은 일백여 명의 무리.
그중 앞으로 나선 흑의인의 보고에, 마삼보는 열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전부 몇이냐.”
“약 오천, 그중 삼천은 마물(魔物)입니다.”
마삼보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곤륜산의 영물이 씨가 말랐겠군.”
만약 무림의 사정에 밝은 누군가가 이들의 목적과 대화를 들었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을지도 몰랐다.
오천의 병력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그 옛날 천하를 새카맣게 뒤덮었던 마교의 십만마도(十萬魔徒)조차 중원 무림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마삼보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이야.’
마삼보는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온 사방을 빼곡히 메운 수하들을 쓸어보았다.
쉼 없이 번뜩이는 마물들의 핏빛 눈동자와, 오직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실혼인(失魂人)이나 다름없는 광신도들.
지금 이 순간,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채 마삼보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저들은 실로 마군(魔軍)이라 불릴 만한 존재들이었다.
이제는 과거의 망령이 되어 버린, 한낱 마교도 따위와는 비교하는 것이 실례일 만큼.
그리고 이와 같은 마삼보의 확신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눈앞의 흑의인을 포함한 일백여 명의 강시술사(僵尸術士)였다.
비록 자신에 비할 수는 없으나, 시체만 있다면 각각 일군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괴물들.
그런 그들을 흡족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삼보가 입을 열었다.
“군을 두 개로 나누어 이동할 것이다.”
“송구합니다만, 계획이 변경된 것입니까?”
흑의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마삼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일곱 갈래로 나뉘어 천하 곳곳에 혼란을 일으켰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다름 아닌 검성(劍星) 매종학이 무려 일만에 달하는 무림맹의 정예를 이끌고 청해성에 나타났으니.
‘설마 맹주라는 자가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올 줄이야.’
혹시 모를 이런 상황을 위해 남아 있던 마삼보였지만, 그럼에도 매종학의 등장은 녹림맹과 장강수로맹의 배신만큼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맹주인 매종학이 무림맹을 비웠다는 건, 하남에도 최소한의 방비를 해 놓았다는 뜻.
‘물론 주력이 빠진 이상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겠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우리 역시 과한 분산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마삼보는 신중했다.
실로 어렵게 잡은, 어쩌면 천운(天運)이라 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강시술사들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과한 우려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택하고자 했다.
마삼보가 원하는 바는 천주의 지배 아래 재정립될 천하에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었지, 혈주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심사숙고한 끝에 마삼보가 결정한 표적은, 마침내 단 두 곳으로 좁혀져 있었다.
“하남(下南)과 산서(山西).”
짧은 침묵을 깨트리는 상관의 음성에, 흑의인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존명(尊命). 실로 옳으신 결정입니다.”
태원진가가 자리를 비운 이상 현재의 산서성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고, 하남은 천하 무림에서 차지하는 상징성과 지리적 이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곳이었다.
아니, 매종학이 없는 지금이야말로 하남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최고의 적기였다.
더군다나 하남과 산서는 서로 경계가 맞닿아 있는 위치.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언제든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천의 병력과 술사 절반을 내어준다면, 칠주야(七晝夜) 안에 산서성을 손에 넣을 수 있겠느냐?”
태원진가가 산서성을 일통한 이래, 하루가 다르게 나날이 발전을 거듭해온 산서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관의 요구에, 흑의인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고작’ 이천에 불과한 병력은, ‘무려’ 수십여 명의 술사들에 의해 끝없이 증식할 테니까.
“나흘이면 족합니다.”
“하북(河北)까지 포함한다면?”
“열흘을 주시옵소서. 하면 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겠습니다.”
흑의인의 막힘없는 대답에, 마삼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약속, 기억하마.”
바로 그 순간.
스아아아아.
희미한 빛이 지면을 타고 올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대술사가 곤륜산에 머무를 당시 설치해 두었던 이동진. 아니 마법진(魔法陳)이 마삼보와 함께 남아 있던 몇몇 술사들에 의해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우웅.
시시각각 크기를 더해 가는 빛과 함께, 모두를 감싸 안으며 퍼져 나가는 두 개의 거대한 원.
사방에서 들끓어 오르는 그 신비로운 기파(氣波)를 느끼며, 마삼보는 솟구치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단숨에,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이 두 손으로 직접.’
마삼보를 아는 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는 모산파의 명맥을 이은 가장 강력한 강시술사이자, 한 명의 무인으로서도 능히 십왕(十王)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절정 고수였으니까.
삼성(三星)도, 진태경과 적천강도 없는 작금의 중원 무림은 마삼보에게 있어 조금의 두려움도 심어 주지 못했다.
‘검성, 최소한 당신만큼은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소.’
무슨 방비를 해 놓았건,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단숨에 중원의 허리를 끊어 낼 수 있었다.
자신들의 출현을 알리는 급보가 저들에게 알려졌을 때는, 이미 수천이 아닌 수만의 대군세가 완성되어 있을 테니까.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금 채워지는 불사(不死)의 군단이.
‘바로 오늘, 천하의 역사가 뒤바뀐다.’
또한 세상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능히 천년 간 이어질 이 장대한 역사의 첫걸음에, 마삼보 자신이 있었음을.
화아아악!
시야를 새하얗게 물들이는 휘황한 섬광 속, 마삼보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저 멀리 아득한 어딘가로 자신의 영육(靈肉)을 끌어당기는 신비의 힘에 몸을 맡긴 채.
앞으로 이어질 자신의 한 걸음, 한 걸음과 함께 천하에 새겨질 거대한 족적을 떠올리며.
파앗.
변화는 한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확연히 달라진 주위의 공기와 바람을 느낀 마삼보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대술사가 준비해 두었던 마법진이, 자신을 비롯한 삼천여 명의 수하들을 약속한 곳으로 이동시켜 주었다는 것을.
‘드디어, 시작이다.’
위대한 첫걸음을 내디딘 자에게만 허락된 전율과 함께, 마삼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뜨려고 했다.
퍼걱, 촤아악!
불현듯 울려 퍼진 섬뜩한 파육음과 동시에, 뜨거우면서도 끈적한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뒤덮기 전까지는.
“……!”
콧속 깊이 스며드는, 지긋지긋하리만치 익숙한 혈향(血香).
마치 온 세상이 멈춘 듯한 감각 속에서, 마삼보는 어느덧 파르르 떨리고 있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또 하나의 사실을.
쿵, 철퍽!
달빛조차 찾지 않는 어느 이름 모를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채 짚단처럼 허물어지는 크고 작은 그림자들.
마삼보는 막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아니 그와 함께 살아남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하남에서의 첫발을 떼기도 전에 쓰러진, 무려 이천에 달하는 아군들의 죽음을.
창칼이 아닌 바위나 나무 따위와 한 몸이 된 채, 실로 괴이한 형태로 숨이 끊어진 그들의 끔찍한 최후를.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 넋 나간 목소리로 뇌까리던 마삼보의 귓가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온 것은.
“무슨 일이긴, 보고 있는 그대로지.”
짙은 어둠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담담한 음성.
목소리의 주인을 쫓아 벼락처럼 고개를 돌린 마삼보는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있던 것일까.
수십여 장 밖, 담장처럼 주위를 둘러싼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어느 중년인이 공포와 혼란에 휩싸인 분지(盆地)를 굽어보고 있었다.
아니, 마삼보를.
“만나서 반갑네. 이건 진심이야. 혹여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애간장이 탈 정도였거든.”
마치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마삼보와, 살아남은 그의 수하들을 천천히 훑어본 중년인이 입맛을 다시며 덧붙였다.
“물론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환영 인사는 충분한 것 같군. 안 그런가?”
마삼보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새하얗게 물든 뇌리를 가득 채운 두 글자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함정……!’
그래, 이건 함정이었다.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준비한.
그리고 언덕 위에서 빙긋 웃고 있는 저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은, 과거 대술사가 아무도 찾지 않는 하남의 심산유곡 깊숙이 새겨넣은 이동 마법진에 덫을 설치한 장본인이 틀림없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동시에 끔찍한 덫을 놓은 사냥꾼.
“그렇게 흉흉한 눈빛으로 보지 말게. 되려 아쉬운 건 이쪽이야. 이동진(移動陳)의 정확한 범위를 알아낼 수만 있었다면, 단숨에 끝장낼 수도 있었을 텐데.”
짐짓 한숨마저 내쉬는 중년인의 모습에, 마삼보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분노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네놈은 물론, 네 가솔(家率)들까지 전부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니.”
중년인은 아직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마삼보는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동창에 몸담고 있던 시절 보았던 용모파기(容貌疤記)와 중년인의 손에 들린 저 새하얀 부채는 한 사람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으니까.
“와룡객(臥龍客) 제갈풍.”
확신이 담긴 마삼보의 한 마디에, 제갈세가의 현 가주인 제갈풍이 눈을 크게 떴다.
“오, 날 알고 있나?”
“그래. 기억하고 있었지. 오늘 이후로는 머릿속에서 잊히겠지만.”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한 마삼보는 몸 안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비록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태반이 넘는 수하들을 잃었으나, 가장 중요한 전력인 강시술사들의 피해는 크지 않다.
전투가 시작되면 시체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제갈풍이 어떤 대비를 해 놓았건, 해가 떴을 때 이곳에서 살아 나가는 것은 자신이 되리라고 마삼보는 확신했다.
적어도 다음 순간, 제갈풍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낯익은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나도 기억하고 있겠군. 안 그런가? 마 태감(太監).”
마삼보는 일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수십여 년간 봐 왔던 저 얼굴을.
그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황실을 지켜 온, 노장(老將)의 웅혼한 음성을.
그러나 마삼보를 격동케 만든 것은, 황실 제일의 고수인 금의위 지휘사(錦衣衛指揮使) 백연의 존재뿐만이 아니었다.
황실의 수호하는 검이자 방패인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또 다른 사실을 의미했으므로.
사박.
거구의 노장에게 가려져 있던, 호리호리한 인영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오연한 시선으로, 자신의 옛 신하를 굽어보았다.
아니, 감히 황실을 뒤엎으려 한 천고의 죄인을.
“그래, 역적(逆賊)질은 할만 하던가.”
천자(天子)의 물음에, 마삼보는 신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