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36
로그인 무림 1136화(1136/1141)
심장이 으스러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간단명료한 사실은, 천하의 온갖 괴공절학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백환강시공(魄環僵尸功)을 익혔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진리였다.
털썩.
썩은 고목 나무처럼 허물어지는 신형.
마침내 최후를 맞이한 대역 죄인의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천자는, 이내 그의 가슴 깊숙이 박혀 있던 손을 뽑으며 입을 열었다.
“지휘사.”
비록 아무런 내용도 없는 짤막한 부름.
그러나 금의위 지휘사 백연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존명(尊命).”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당신의 손으로 직접 역적을 처단한 천자를 향한 경의도.
그와 동시에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언월도(偃月刀) 역시도.
서걱!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분리되는 살과 뼈.
단숨에 참수형(斬首刑)을 집행한 백연은 언월도의 끝으로 잘려 나간 목을 꿰어 바로 세웠다.
채 감기지 못하고 부릅뜬 채 굳어 버린 죄인의 두 눈이, 언덕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끝까지 지켜볼 수 있도록.
쉬쉬쉬쉬쉭!
문득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느낀 것은, 비단 누구 한 사람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천자의 이름에 걸맞게 정예만 가려 뽑은 수천의 금위군.
그들이 일시에 내공을 실어 쏘아 보내는 강궁(强弓)이 실로 강맹한 속도와 위력으로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수십여 장 밖, 야트막한 분지에서 죽을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적들을 향해.
푸푸푸푹!
“크아아악!”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핏물과 비명.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과 동시에 잠력단을 복용한 상당수의 광신도가 검기(劍氣)를 휘두르며 거리를 좁혔으나, 사력을 다한 그들의 발걸음은 결코 언덕에 다다를 수 없었다.
“개(開).”
화아아악.
제갈풍의 나직한 명령에 따라, 대기를 떠돌던 기이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삽시간에 짙은 안개에 휘감긴 언덕 밑.
지금껏 본 적 없는 환영을 맞닥트린 광신도들이 혼란에 휩싸인 순간, 두 번째 명령이 울려 퍼졌다.
“폐(閉).”
철컥.
차가운 쇳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무수한 암기와 화살촉이 고개를 내밀었다.
천하 일절이라 평가받는 제갈세가의 기관진식(機關陣式)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 끔찍한 죽음으로 이어졌다.
쐐애애액, 퍼걱!
안개가 붉게 물들었다.
그 안의 모든 것이 꿰뚫리고, 베이고, 박살났다.
바위 틈새에서, 땅 밑에서, 또 나무 옹이에서.
생각지도 못한 틈새 사이사이에서 발동된 함정은 그들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군의 시체를 방패 삼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일부 광신도가 가까스로 안개를 벗어났지만, 제갈풍이 준비해 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솨아아악!
고작 일백에 불과한 제갈세가의 가솔들, 하지만 그들의 손에 들린 제갈노(諸葛弩)의 무시무시한 연사력은 적은 머릿수를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콰드드득!
눈 깜짝할 새에 벌집이 되어 쌓여 가는 시체들.
깊은 밤 속에서 시작된 전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모두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투라는 단어조차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토록 일방적인 학살은 전투라 부를 수 없으니까.
더불어 이와 같은 지옥도(地獄道)는, 비단 하남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닐 터였다.
“제법 긴 밤이 되겠군.”
불현듯 흘러나온 천자의 뇌까림에, 제갈풍이 대답했다.
“그리고 곧 날이 밝겠지요.”
맞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날은 밝아올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니 더욱 밝아진 태양 아래에 또 한 번의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오늘 밤, 중원을 위협하던 커다란 우환 하나를 제거하게 될 테니.
“비록 지자(智者)에게 있어 확신은 금물이나…… 이 제갈 모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만큼 사력을 다해 세운 계획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적뿐만 아니라 아군의 눈까지 속이면서까지 기다려왔던 제갈풍이다.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역도(逆徒)들이 어디로 향하든,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갈풍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껏 찾아낸 모든 이동진에 각 성의 정예들을 모조리 집결시켰다. 암천의 비수가 어디로 향하든, 오늘 밤이 지나면 그들은 모조리 불귀의 객이 되어 있을 것이다.
특히, 제갈풍이 하남과 더불어 적들이 노릴 가장 유력한 장소로 점쳤던 산서(山西)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곳에는 창천검왕(蒼天劍王)이라는 거인이 진두지휘하고 있었으니.
“모든 것이 폐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런가?”
실로 공손한 제갈풍의 감사 인사에, 문득 실소를 흘린 천자가 입을 열었다.
“지휘사도 그리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곁에 서 있던 백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큰일은 저들이 다했고, 황실이야 마지막에 한 손 거든 것뿐이지요.”
생각지도 못한 답에 제갈풍은 입을 딱 벌렸지만, 천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어째서?”
“괜히 묻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말투가 참 불경하군. 조금 전에는 대역죄인도 제대로 막지 못했으면서.”
천자의 지적에 백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앞서 폐하께서 직접 놈을 처단하시겠다고 신신당부하신 탓이지요. 왜, 삭탈관직(削奪官職)이라도 하시렵니까?”
“곤란해. 짐에게는 아직 그대가 필요하거든.”
“폐하의 혜안이 날로 갈수록 깊어지시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기쁠 따름입니다. 고생하는 것에 비해 몇 년째 제자리걸음만 하는 녹봉이 아쉽지만 말입니다.”
“저런. 명색이 금의위 지휘사가 그러면 쓰나. 역도들에게서 회수한 재물도 있으니, 이참에 녹봉을 두 배로 올려 주지.”
“신도 늙은 모양인지, 오늘따라 갑옷이 무겁습니다.”
“세 배.”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절도있게 군례를 취한 백연은 슬쩍 고개를 들어 천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두 군신(君臣)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눈앞에서 지켜보던 제갈풍이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시원한 웃음을.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사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수십여 년간 황실을 지켜온 노장에게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고, 이를 떠나 그의 말은 전부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그래, 지휘사의 말이 실로 옳다. 짐이야 마지막에 한 손 거든 것뿐, 이 정도로는 지금껏 진 빚의 십 분지 일도 갈음하지 못할 것이다.”
천자는 얼빠진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갈풍을 향해 미소지었다.
살얼음과 같던 과거, 사방에 도사린 위협과 병마에 맞서 싸우던 시절의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웃음이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아니, 달라지게 만들었다.
바로 그가, 진태경이 모든 것을 뒤바꾸고 오래전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아 주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자이기에, 형식적으로라도 제갈풍의 공치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도, 천하가 다시 한번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덕분이었으니까.
“고민이군. 자꾸만 늘어나는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쓴웃음이 담긴 천자의 뇌까림에, 어느덧 눈빛을 가라앉힌 제갈풍이 대답했다.
“아마도……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문득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았다.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세 사람의 눈에는 수천 리 밖에 어딘가에 있을 한 사람의 모습이 비쳐 오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어깨너머로 어렴풋이 번지는 흐릿한 빛처럼.
“해가 떴군.”
“예. 날이 밝아 오고 있습니다.”
천자는 처음으로 빛을 마주한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기분 탓일까.
어느새 정적과 피 웅덩이에 잠긴 분지 위, 산처럼 쌓인 수천의 시체를 뒤덮으며 다가오는 햇빛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셨다.
“명(明).”
밝다.
어둠이 흩어지고, 빛이 타오른다.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나날 또한 이러하길, 천자는 간절히 바랐다.
분명 또다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을 진태경의 운명 역시도.
“대명(大明).”
모두의 앞날을 밝혀 줄 새로운 국호(國號)와 함께, 대명제국의 천자는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숨을 내뱉었다.
“백연.”
“하명하시옵소서.”
“그대의 녹봉을 네 배로 올려 줘야 할 것 같구나. 제법 고난한 일이 될 터이니.”
“그 말씀은.”
“짐은 환궁(還宮)하지 않을 것이다.”
“……!”
“천하의 만백성에게 전하라. 사막 너머에 도사린 저 극악무도한 역도들을 뿌리 뽑지 않는 한, 짐이 옥좌에 앉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크게 뜨인 눈으로 천자를 바라보던 노장이 미소와 함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금의위 지휘사 백연. 지엄하신 황명을 받드나이다.”
그날, 수많은 전서구와 파발마가 천하의 땅과 하늘을 가로질렀다.
* * *
말발굽과 날개를 타고 전해진 황명(皇命)은 불과 며칠 만에 온 천하를 뒤덮었다.
아니, 뒤흔들었다.
무림과 민간, 더불어 관부까지도.
“황명이오!”
천하 각지로 향한 전령들은 황실의 인장이 새겨진 방을 곳곳에 내걸었고, 마침내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턱 끝까지 다가와 있던 칼날의 존재를.
그리고 단 하룻밤 사이에 시작되고 끝난, 일방적이면서도 위대한 승리를.
하지만 천자가 전하고자 한 것은 비단 승전보뿐만이 아니었다.
친정(親征).
사 황자라 불리던 시절, 이미 정복 군주의 그릇으로 평가받던 천자는 대명이라는 새로운 국호 아래 금위군의 집결을 명령했고 그의 목적지는 모두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신강(新疆).
열사의 사막 너머 존재하는 옛 마교의 본거지.
광오하게도 스스로를 천주(天主)라 칭하는 역도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온 천하의 창끝이 겨누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