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9
#118화
“너만 약 처먹으니까 좋았냐?”
“뭐?”
“혼자 약 처먹으니까 좋았냐고.”
풍양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고작 약관에 불과한 핏덩이 주제에 혀가 짧아도 너무 짧다. 태원진가의 막내 도련님으로 태어나 잠룡 소리를 듣고 있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건가?
“그놈 참, 허허.”
껍데기뿐인 웃음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고, 살기 어린 눈빛이 빈자리를 채웠다.
“관을 봐야 눈물 흘리겠느냐?”
진태경이 눈을 크게 떴다.
“이야, 저 대사 실제로 들으니까 되게 이상하네. 다시 해 봐.”
“말로 해선 안 되는 놈이군.”
풍양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가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저 어린놈의 주둥이에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올까?
그가 평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혀를 뽑고 사지를 잘근잘근 부러트리는 거다. 하지만 태원진가의 무공을 알려 줄 귀한 몸을 그리 함부로 대할 수가 있나.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다.
‘다리 근맥을 끊어 놓으면 얌전해지겠지.’
태원진가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풍양은 이 싸움이 끝나면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심산유곡에서 무공을 보완한 다음 다시 무림에 나올 생각이었다.
적풍단은 궤멸당했지만, 세력은 얼마든지 다시 모을 수 있다. 무림은 강자가 지배하는 곳이니까.
“전부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 말거라.”
풍양이 곡도를 움켜쥔 그때였다.
“아, 잠깐만.”
손을 내저은 진태경이 뭔가를 입 안에 탁 털어 넣는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에 풍양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지?’
의문도 잠시.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진태경의 전신에서 엄청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어차피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열화신단으로 최후의 도박을 벌이는 것.
위험성이 크긴 하지만 풍양에게 무공 구결을 토해 내고 죽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선택이다.
꿀꺽.
과연 영단은 영단인지, 혀에 닿자마자 스르륵 녹아 목으로 넘어간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띠링.
– [열화신단]을 복용했습니다.
– [운기조식]으로 기운을 다스리십시오.
뜨겁다. 열화신단이 품고 있던 30년의 공력이 사지백해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 일시적으로 [열양지기]의 속성을 부여받았습니다.
– 일시적으로 [공력]이 45년으로 상승합니다.
–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 퀘스트, [영단 흡수]가 생성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울리는 시스템 알림을 확인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당장 몸 안에서 날뛰는 열화신단의 기운을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후우, 후우우우.”
인간 압력밥솥이 된 기분이다. 마치 정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전신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딛고 선 땅 위로 덮여 있던 눈이 녹고, 축축한 흙이 물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건…….’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떠는 내 귓가로 풍양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당황한 놈의 얼굴을 보자 오히려 살짝 열기가 가라앉는 기분이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무슨 짓이긴,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거지.”
“놈!”
대답에서 불길함을 느낀 걸까? 풍양의 곡도가 눈부신 속도로 날아들었다. 쭉 뻗어 나온 붉은 도기(刀氣)가 내 가슴을 노린다.
쉭!
딱 반걸음 차이로 죽음이 빗겨 나간다. 목표를 놓친 곡도가 다시 한번 어지러운 궤적을 그렸다.
쉬쉬쉬쉭!
그러나 이번에도 곡도는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뒤로 물러난 나를 바라보는 풍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뭐, 인마.”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지만 사실 가장 놀란 건 나였다. 앞서 손을 섞었을 때는 이 정도로 손쉽게 피해 내지 못했다.
풍양의 압도적인 기세와 도기에 밀려 피하기에 급급했던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언제부터 몸이 이렇게 가벼웠지?’
공격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똑똑히 보인다.’
풍양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보이고, 읽힌다. 공격이 보이니 못 피할 것도 없다. 도기가 아니라 도강(刀罡)이라 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마침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공력 때문이야.’
기존에 갖고 있던 15년의 공력과 열화신단의 30년 공력이 합쳐진 상태다. 비록 내가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30년의 공력이 가진 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열화신단의 기운은 내 전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문제는 이 풍선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거지만.’
그러니 그 전에 풍양을 쓰러트려야 한다.
나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철창을 고쳐 잡았다.
“덤벼.”
풍양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기고만장하군. 네놈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것치곤 꽤 긴장한 것 같은데.”
“맹수는 토끼를 잡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
“근데 맹수는 토끼 잡을 때 잠력단 안 먹잖아.”
“……!”
풍양의 낯빛 위로 경악이 스쳤다. 입을 벌린 채 나를 응시하던 놈이 더듬더듬 물었다.
“자, 잠력단이라고?”
“그래, 잠력단.”
“그 이름을 네가 어떻게?”
“기업 비밀이다, 이 새끼야.”
“혹시 네놈도?”
“뭐, 비슷한 거 먹긴 했지.”
열화신단이라고 말하면 알까 모르겠다.
잠력단이랑 비교하면 안정성은 영 꽝이고,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는 지금부터 알아볼 생각이다.
“넌 뒈졌어.”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땅을 박찼다.
쐐애애액!
* * *
풍양은 심란했다.
‘저놈이 어떻게 잠력단의 존재를 알고 있지?’
잠력단의 존재는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이다.
언젠가 목숨을 구해 줄 숨겨 둔 한 수이기도 했지만, 세상에 알려진다면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기물(奇物)이기 때문이다.
복용자가 가진 힘의 두 배, 세 배를 끌어 올릴 수 있는 효능만 봐도 천하의 무인들이 군침을 삼키고 달려들 텐데.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유산이니까.’
정마대전 이후 천하 무림은 정파 무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풍양이 사마외도의 기연을 이었다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태원진가가 아니라 천하 무림이 그를 쫓기 시작할 것이다.
‘산서잠룡 진태경…… 반드시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한다.’
풍양은 이를 악물고 무공을 펼쳤다.
단 몇 년간의 수련으로 어느덧 칠 성의 경지에 오른 적혈십이도(赤血十二刀)다. 나이로도, 무공으로도 턱없이 부족한 저 어린놈을 죽이기에는 차고 넘친다.
“죽엇!”
쉬잉-!
적혈십이도는 패도적인 무공, 곡도에서 쭉 뻗어 나간 붉은 도기가 사방을 난도질했다. 그 흉험한 기세에 땅거죽이 갈라지고, 바람이 터져 나갔다.
그러나 정작 베어야 할 목표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딱 반걸음 차이로 공격을 피해 낸 진태경이 창을 찔렀다.
쐐애애액!
목젖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창날. 황급히 고개를 꺾어 공격을 피한 풍양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빠르다.’
빠르고 정확하다. 절정 고수의 상징인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움직임은 이미 그를 따라잡고 있었다.
‘설마 이 녀석도 잠력단을? 아니다. 나와는 전혀 달라.’
이미 잠력단을 몇 번 복용한 전력이 있는 풍양이다.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진태경의 모습으로 앞서 그가 삼킨 것이 잠력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도대체 뭘…… 헛!’
풍양은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마침내 공세를 잡은 진태경이 본격적으로 진가창법을 펼쳐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쉬쉬쉬쉬쉭!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수십 개의 창영(槍影).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광경이다. 아니,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풍양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이건…….’
열양지기.
그것도 절정 고수인 자신에게까지 영향을 줄 만큼 엄청난 열양지기다. 앞서 싸웠던 항산호 철무백도 열양지기의 소유자였지만 지금 진태경이 뿜어내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영단, 열양 계열의 영단을 먹었구나!’
후우우웅!
알아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찔한 열기와 날카로운 공격. 연달아 물러서며 창날을 피하는 데에 급급하던 풍양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작 이런 어린놈한테!’
일평생을 치열하게 살아온 그다. 잠력단까지 복용한 지금, 이제야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어린놈을 상대로 물러서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 분노가 고스란히 곡도에 실렸다. 도신 위로 피어오른 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붉게 타올랐다.
쉬이익!
진가창법과 적혈십이도는 사용하는 병기와 투로는 다를지 몰라도 패도적인 무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눈 깜빡할 시간, 진무경의 철창과 풍양의 곡도가 십여 합의 치열한 격돌 끝에 떨어졌다.
“음.”
먼저 물러난 것은 진태경이었다. 찢어진 손아귀에서는 피가 흘렀고, 무겁고 견고하던 철창은 예리한 도기에 잘려 나가 채 반도 남지 않았다.
“멍청한 놈.”
풍양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무인이 병장기를 잃었다는 것은 패배를 의미했다.
오로지 권각으로 일가를 이룬 항산호 철무백도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는데, 아직 절정의 벽도 넘지 못한 진태경은 무기를 잃은 순간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면 승부로 날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진태경이 손아귀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 대신 귀중한 정보를 알았지.”
“……귀중한 정보?”
“그래, 너의 공격 패턴을 알았다.”
“패, 뭐?”
“너의 공격 패턴은 강강강강강이다.”
이건 무슨 개소린가.
자신의 무공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알겠는데 패 뭐시기라는 말은 난생처음 들어 본다. 게다가 강강강강강이라니?
풍양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진태경을 노려봤다.
“헛소리를 한 대가로 사지 근맥을 잘라 주마.”
진태경이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지 자르고 뽑는 거 되게 좋아하네. 사지 성애자야?”
“이 애새끼가…….”
“이 늙은 새끼가…….”
풍양은 깊게 심호흡했다. 그는 절정 고수였고 일평생을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로 살았다. 하지만 분노로 뚝뚝 끊기는 목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넌,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난, 가끔, 사지를, 자른다, 가끔은, 이런 내가, 별로다.”
그는 인내심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단언컨대 근 십 년간 이 정도로 분노한 적은 처음이다.
“크아아악!”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른 풍양은 광인(狂人)처럼 돌진했다.
그 어떤 초식도, 무공도 없이 있는 힘껏 진태경의 정수리 위로 곡도를 내리쳤다.
“죽엇!”
그때였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풍양의 핏빛 눈동자에 진태경의 담담한 표정이 비친 것은.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잘못됐다.’
풍양은 공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호신강기가 일어남과 동시에 텅 비어 있던 진태경의 손아귀에서 비수가 번쩍였다.
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