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24
#123화
전신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 있는 중년인.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고, 몸은 한시도 쉬지 않고 꿈지럭거린다.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자 곧장 면박이 날아왔다.
“너무 움직이지 마세요.”
“그게 아니라…….”
“철 숙부, 의원이 했던 말 못 들으셨어요?”
또 시작이군. 항산호 철무백은 천장만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자 이소월이 두툼한 솜이불을 그의 가슴까지 덮어 주며 말을 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나으셔야죠. 좀이 쑤시는 건 알겠지만 누워 계세요. 잠이라도 더 주무시고.”
“이미 충분히 잤다.”
“고작 한 시진밖에 안 주무셨잖아요.”
“고작이라니. 한 시진이면 충분하지.”
“그러시다가 몸만 더 상해요.”
“삼십 년을 넘게 그리 살았어. 끄떡없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크게 다치신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죠.”
“……끙.”
이소월의 일침에 철무백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수라멸권을 익힌 이래 지금처럼 큰 부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부러진 사지와 심각한 내상. 의원의 말에 의하면 최소 넉 달은 요양해야 할 중상이라고 했다.
“네 아비와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철무백의 푸념에 이소월이 반응했다.
“아버지요?”
“그래, 천백이 그 친구 말이다.”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데요?”
“이야기한 적 없었더냐?”
“그냥 두 분의 마음이 맞아서 친구가 됐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랬지. 하지만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싸웠단다.”
“싸워요?”
철무백이 빙긋 웃었다.
“무인 두 사람이 만나서 뭘 했겠느냐? 둘 다 젊은 시절이라 호승심도 강했으니 불 보듯 뻔하지.”
철무백은 창밖을 바라봤다. 삼십여 년 전, 저 높이 솟은 산등성이 어딘가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만났고, 싸웠다.
“날 찾기 위해 석 달 동안 산맥을 이 잡듯 뒤졌다고 했다. 거지 같은 몰골이었지만 기세가 범상치 않았지.”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홀로 무공을 익힌 철무백과 수많은 전투를 통해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한 이천백.
두 절정 고수의 첫 만남이었다.
“나보고 수하가 되라고 하더구나. 산맥 아래에 문파를 세울 테니 함께 초석을 다지자고 했다.”
“아버지답네요. 그래서요?”
“더 무슨 말이 필요했겠느냐? 싸웠지.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이소월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들을 필요가 있나요. 철 숙부께서 지금까지 재야에 머물러 계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서로의 무공에 감복해서 벗이 되었다는 사내들의 낯 뜨거운 얘기 아닌가요?”
“으하하! 맞다! 딱 오백 합 만에 승부가 났…… 윽.”
큰 소리로 웃던 철무백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움찔하자 이소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때문에 상태가 더 안 좋아지시는 것 같은데…… 제가 없는 게 더 낫겠네요.”
“이 녀석. 혼자 늙어 가는 숙부가 가엾지도 않으냐?”
“생각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중매라도 서 드릴 테니.”
“됐다. 다 늙은 마당에 무슨.”
본인 스스로 한 말이지만 입맛이 씁쓸해진다. 철무백은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그래, 어느새 이리 늙었구나.’
가족을 잃은 그 날 이후, 정확히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렀는지 철무백 자신조차도 알지 못한다.
심후한 내력과 극도로 단련된 신체 덕분에 본래의 나이보다 젊어 보일 뿐, 정신은 오래전부터 늙어 가고 있었다.
‘하나뿐인 벗도 떠나고, 평생 갈고 닦은 무공도 형편없이 꺾였으니, 허허.’
이제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항산의 호랑이가 이미 늙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철무백에게는 아직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소월아.”
이소월이 따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숙부.”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알아요.”
“아직 늦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거라. 태원진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산서 땅 어디에서도 안전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원하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항산검문이에요.”
철무백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갓난아이 시절부터 봐 온 이소월이다. 몰락한 문파를 재건하고 부흥시키는 것은 약관도 채 되지 않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숙부님은 절 믿어 주시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네게 수라멸권의 비급을 넘기지 않았을 게다.”
이소월이 철무백의 주름진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 역시 무가의 여식. 눈앞에 있는 이 늙은 무인이 얼마나 큰 결정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감사해요, 숙부.”
어느새 촉촉해진 그녀의 목소리에 철무백이 손을 내저었다.
“난 늙었다. 이제 와서 제자를 들이기도 곤란하던 참인데 좋은 기회가 온 게지.”
수라멸권은 일인전승(一人傳承),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원칙을 따른다. 행동거지가 올곧고 심성이 바른 후인을 찾아 무맥을 이어 가라는 의도다.
그러나 구 대 계승자인 철무백은 그 원칙을 어기고 이소월에게 비급을 넘겼다. 비록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사문(師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깨트린 것이다.
그러나 철무백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진천검과 산서잠룡라면 소월이를 지켜 줄 수 있겠지.’
이소월이 정략혼을 마음먹었다면 그 두 사람이 최선이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불의(不義)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울 만한 협기도 지니고 있다.
‘실제 성정은 어떨지 지켜봐야겠지만…….’
잘만 된다면 정략혼의 목적과 일인전승, 비인부전의 전통.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철무백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둘 중 누구를 택했느냐?”
이소월이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뭐가요?”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보아라. 진천검이냐? 아니면 산서잠룡?”
“글쎄요.”
“그놈이 그놈이긴 한데…… 아무래도 진천검이 낫지 않겠느냐?”
“산서잠룡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뭐, 마음에 안 들 것까지야 있겠냐마는…….”
철무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 년의 대부분을 산속 깊은 곳에서 머무르는 그조차도 태원진가의 개망나니에 관한 소문은 들어 봤다.
“아무리 개과천선했다 한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법이다. 나중에 네 가슴에 대못을 박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진천검은요?”
철무백의 찌그러졌던 안색이 펴졌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했다. 어제 잠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사람이 참 괜찮더라. 무재가 아주 뛰어나.”
“무공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들리는데요.”
“떽! 계집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언행부터가 아주 의젓하고 무게감이 있어. 사내란 자고로 그래야지, 암. 그렇고말고.”
흐뭇하게 웃는 철무백이었다.
* * *
반쯤 눈을 뒤집어 깐 진무경이 내 멱살을 잡고 탈탈 털었다.
“당장 혼인해!”
“컥, 컥!”
가뜩이나 코로 찻물이 들어가는 바람에 사레가 들렀는데 쉬지 않고 멱살을 흔들어 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놔, 안 놔?”
“수라멸권! 혈랑검법! 혈랑보법!”
“알았으니까 일단 놔!”
“이 멍청한 놈! 수라멸권이 어떤 무공인 줄 알고!”
“놓고 얘기하자고!”
“일인전승! 비인부전!”
“그만해, 이 미친놈아!”
잠시 후, 간신히 진무경의 손을 떼어 냈을 때는 전각 내부가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헉, 허억.”
나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탁자는 주저앉았고, 의자는 박살 났으며 산산조각 난 다기(茶器) 파편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그때 차분해진 얼굴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진무경이 입을 열었다.
“음, 진정했다.”
“…….”
이거 생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네.
나는 그나마 덜 젖은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수라멸권이 무슨 천하제일 무공이야? 왜 그렇게 집착해?”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권법이지. 아니, 이었다.”
“이었다?”
“이백 년 전의 일이니까. 수천, 수만 권의 서적이 있는 천무학관의 서고에도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무공이지. 그런데 항산호 대협이 바로 그 수라멸권의 당대 계승자였다니!”
상상만 해도 설레는지 진무경의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나는 코에 들어간 찻물을 털어 내며 물었다.
“그래서?”
“뭣이? 그래서라니!”
진무경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바로 그 수라멸권이란 말이다! 이미 오래전 무맥이 끊겼다고 알려진 절정 무공!”
“이백 년 전의 천하십대권법이고?”
“바로 그거다!”
“어, 잠깐만 기다려 봐.”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굵직한 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었다. 불과 5분 전까지는 탁자 다리라고 불렸던 물건이다.
“이게 뭔지 알아?”
“몽둥이?”
“잘 아네.”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이게 이천 년 전쯤에는 천하십대병기.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한 놈이 아니다.
곧 진무경이 눈을 치켜떴다.
“수라멸권을 그따위 것에 비교하다니.”
“그럼 뭐가 다른데?”
“그건…….”
“물론 이런 나무 몽둥이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는 물건이긴 하지.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일까?”
과거 인류는 돌로, 몽둥이로 싸웠다. 그러나 청동과 철기가 등장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뒤로 밀려났다.
수라멸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지금도 모두가 탐내는 뛰어난 절정 무공이긴 하겠지.”
그걸 몸소 입증한 것이 항산호 철무백이다. 그는 수라멸권으로 산서성에서 이름 높은 절정 고수가 되었다.
“하지만 수라멸권이 지금까지 천하십대권법인 건 아니잖아?”
돌과 몽둥이가 강철로 바뀐 것처럼, 무공도 발전한다.
나야 뭐, 지금 천하십대권법이 뭔지는 모르지만, 진무경의 표정은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막말로 수라멸권이 그렇게 강한 무공이었으면 풍양에게 질 일도 없었지.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나는 탁자 다리를 대충 구석에 던지고 쐐기를 박았다.
“난 혼인할 생각 없어.”
“……!”
“당사자가 안 한다는데 뭐 어쩔 거야.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진무경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여기서도 우기면 한 판 붙으려고 했는데, 의외로 순순하게 수긍하는 것 같다.
그래도 수라멸권의 비급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지 아련한 눈빛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자식도 어지간히 무공 덕후네.’
하긴, 무공을 더 익히고 싶어서 천무학관에 간 녀석이다.
바로 그 천무학관에서도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수백 년 전의 무공을 발견했으니 몸이 달 수밖에.
“후우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진무경이 중얼거렸다.
“아쉽구나, 아쉬워.”
“그렇게까지 아쉬울 것까지야. 인연이 닿으면 다음에 구할 수 있겠지.”
“멍청한 녀석. 절정 무공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느냐?”
“그래? 난 떨어지던데.”
“천하의 무공이 모두 모여 있다는 천무학관에서도 절정 무공들은 철저히 관리…… 뭐라고?”
“난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나는 품에서 낡은 서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겉면에 적힌 네 글자는 세월의 풍파로 흐릿했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을 만큼 또렷했다.
화염신장(火焰神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조필은 죽어서 초절정 무공을 남겼다.
“화, 화, 화…….”
아마 오늘이 진무경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놀라운 날일 거다.
눈을 부릅뜨고 나와 비급을 번갈아 보는 녀석에게 씩 웃어 주었다.
“앞으로 형이라고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