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26
#125화
“은공.”
오늘의 이소월은 특히 아름다웠다. 눈처럼 새하얀 흰색 궁장에, 옥색 비녀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연달아 고초를 겪은 탓인지 아직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워낙 눈부신 미모의 소유자라 그것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인? 매력적? 열일곱이면 한창 교복 입고 다닐 나이 아닌가. 현실에서는 혼사가 아니라 내신을 준비해야 할 시기다.
하연이보다도 두 살이 어리니 나와는 열 살 차이. 이 정도면 조카뻘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확실히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아니다. 정신 차리자.’
이소월의 그윽한 시선을 피하면서 포권을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문주를 뵙소.”
이소월은 평범한 소녀가 아니라 엄연히 일문(一門)을 책임진 문주다. 나와 진무경의 정중한 인사에 그녀가 화답하려던 그때였다.
“대항산검문의 문주님께서 친히 나와 주시다니. 소생 혁무진, 실로 감격했습니다!”
그래, 네가 빠지면 섭섭하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허리를 넙죽거리는 혁무진을 보니 한숨밖에 안 나온다.
“죄송합니다. 원체 좀 모자란 놈이라.”
“……조장.”
“보셨죠? 저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친한 척하는 거. 그냥 무시하시면 편합니다.”
이소월의 입가에 살짝 보조개가 패었다.
“아니에요. 저분도 본문을 위해서 싸워 주신 은인이신걸요.”
“괜찮아요. 저 녀석은 검 하나 까딱 안 했으니까 은인으로 안 치셔도 됩니다.”
“……아, 네.”
내 친절한 팩트 체크에 그녀의 웃음이 어색해진 그 순간이었다.
“은인이지, 나한테는.”
이소월의 등 뒤에서 들려온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반백의 장년인이었다. 덜컹거리는 목제 수레에 앉은 그가 눈인사를 건넨다.
“일어나지 못하는 부분은 양해 바라네. 이거 참, 나이를 먹었더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나이와 명성으로는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눈앞의 장년인을 따라갈 수 없다.
항산호 철무백의 등장에 혁무진이 잽싸게 허리를 꺾었다.
“철무백 대협을 뵙습…….”
“내 얼굴 처음 보나?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넣어 둬.”
“그래도 위명이 자자하신 무림의 대선배님이신데…….”
“선배는 무슨. 그렇게 일일이 따지면 무림 살기 피곤해.”
“…….”
영감쟁이 성격 쿨한 것 보소.
뻔뻔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혁무진이 조용히 찌그러지자 그다음은 진무경 차례였다.
“오셨습니까.”
별로 대단한 것도 없다. 짧은 한마디에 적당히 포권을 취했을 뿐이다. 그러나 진무경을 발견한 철무백의 얼굴에는 꽃이 활짝 폈다.
“어이구, 우리 진천검 아니신가. 그래, 이제 가려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왜, 좀 더 있다 가지 않고서. 나중에 무공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도 나누고 말이야. 응?”
“죄송합니다. 시간이 촉박한지라.”
“저런, 어쩔 수 없지. 하면 나중에 이 노인네 한 번 보러 와 줄 텐가?”
“강호의 대선배님께서 한 수 가르쳐 주신다니, 오히려 이 후배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입니다.”
“으허허! 후배라, 듣기 좋네그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림이지?
기껏해야 사나흘 머물렀을 뿐인데 사이좋은 조손지간을 보는 것 같다.
거기다가, 뭐? 방금은 선후배 따지면 세상 살기 피곤하다더니 말 바꾸는 것 봐라.
나는 혁무진을 향해 눈짓했다.
‘저 두 사람. 왜 저래?’
‘몰라요, 은인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차별해도 되는 겁니까?’
‘근데 솔직히 까 보면 넌 한 거 없잖아.’
‘…….’
열받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걸 보니 내 뜻이 충분히 전달된 모양이다.
“그래, 다음에 꼭 보자고.”
흐뭇한 할배 미소로 진무경을 바라본 철무백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넨 할 말 없나?”
순간 맹수의 눈빛이 느껴졌다고 하면 기분 탓인가?
나는 앞서 목격한 두 가지 예시 중 좋은 쪽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오셨습니까.”
“그럼 왔지, 갔나?”
“…….”
이게 아닌데?
하지만 힘들 때 웃는 것이 일류인 법. 당황하지 않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몸은 괜찮으시고요?”
이번엔 철무백이 부목을 댄 사지를 흔들었다.
“괜찮아 보이나?”
“……아뇨.”
“괜찮았으면 걸어왔지. 요즘 마적 놈들은 정년도 없이 부려 먹으니 나 같은 늙은이가 버틸 재간이 있어?”
“…….”
노인네가 기억력도 좋다. 처음 만났을 때 말실수했던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다.
상황을 알 리 없는 이소월은 당황한 얼굴로 빽 소리쳤다.
“숙부!”
“아이고, 늙은이 귀청 떨어지겠다.”
투덜거리던 그가 돌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들 고맙네.”
마지못해서 하는 인사가 아니다. 항산호 철무백. 오랜 세월 동안 오직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노고수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명줄을 늘려 줘서가 아닐세. 소월이, 저 아이를 지켜 줘서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항산검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가 잔잔한 눈빛으로 나와 진무경, 혁무진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한 갑자를 넘게 살아오며 깨달은 사실이 있네. 은원(恩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야 한다는 것. 내 이 자리에서 맹세하건대, 이번 일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네. 자네들이 원한다면 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일세.”
이소월이 곧장 철무백의 말을 이어받았다.
“항산검문도 은인들을 기억하겠습니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저지른 과오……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립니다.”
“사죄드립니다!”
“부디 용서를!”
쩌렁쩌렁한 외침은 항산검문 무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그들이 아직 녹지 않은 눈밭에 무릎을 꿇은 채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툭.
– 네가 답해라.
진무경의 전음에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용서라.’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상처는 남았다.
명령에 따라 끊임없이 싸우고 죽어 간 무인, 심지어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여인과 아이들까지 희생됐다. 아들의 복수에 눈이 먼 이천백이 저지른 짓이었다.
항산검문과의 전쟁이 남긴 상처는 깊었고, 아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흉터가 남겠지.’
어떤 종류의 흉터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한순간에 집과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가 그럴 것이고, 나 역시 그렇다. 고금제일인이라는 허무맹랑한 꿈을 꾼 녀석의 얼굴이 지금까지도 어른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이 봉합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상처를 준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각자의 복수를 꿈꿨던 대장로와 이천백은 이미 최후를 맞이했다.
우리가 항산검문을 구하기 위해 며칠 밤낮을 달려왔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진심 어린 사과와 용서가 있다면…… 흉터가 남을지라도 상처는 아물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사죄는 받지 않겠습니다.”
고심 끝에 튀어나온 한마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군가에게 사죄받고, 용서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못 되거든요.”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럴 만한 자격이 안 된다. 저들이 사죄해야 할 사람들은 태원진가에 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이소월과 철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원단(元旦)에 뵐게요.”
“태원이라. 삼십 년 만의 외유가 되겠군.”
항산검문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다. 특히 형편없이 쪼그라든 현재로서는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저들이 모두 감내해야 할 문제.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끼어들 이유도 없다.
– 잘했다.
진무경의 짤막한 전음을 들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마차를 향해 돌아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은공.”
“네?”
“그거 아세요? 원단까지 보름도 남지 않았다는 거.”
이소월의 시냇물 같은 목소리가 졸졸졸 이어졌다.
“지난번에 듣지 못한 대답, 기대할게요.”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진무경이 잡아끌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철무백의 심기 불편한 듯한 기침 소리를 마지막으로, 마차가 힘차게 출발했다.
* * *
태원진가로 돌아가는 길은 빠르고 순탄했다. 마부의 숙련된 솜씨도 한몫했지만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니 모든 게 그렇게 느껴졌다.
“후우.”
막 운기조식을 끝마친 진무경이 문득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절정 무공은 구경도 못 했군.”
항산검문에 가면 절정 무공을 볼 수 있다는 진위경의 꾐에 빠져 동행하게 된 그다. 나는 점잖게 대꾸했다.
“괜찮아. 풍양 덕분에 북망산 구경은 했잖아.”
“그따위 말을 위로라고 하는 거냐?”
“아니, 놀린 건데.”
진무경의 손에서 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컸군.”
“부상 다 회복하면 비무 한 판 하실?”
“지금 당장이라도…… 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진무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 한들 이제 고작 나흘이다. 그가 입은 부상이 완쾌되기에는 턱도 없이 짧은 시간.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녀석이 나를 노려보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운 좋은 건 모르겠고, 명줄 하나는 기똥차게 굵지.”
매번 죽을 고비를 맞이하는데도 사는 걸 보면 날 때부터 명줄 하나는 튼튼한 모양이다. 아니면 천운(天運)을 타고났거나.
“어쨌건 잘했다.”
“응?”
“이잉?”
뜬금없는 칭찬 스티커에 나와 혁무진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작 당사자는 뭐 잘못됐냐는 얼굴이다.
“왜 그러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표정들인데.”
“귀신이 따로 없네.”
“앗, 혹시 이미 풍양한테 죽고 원귀가 되어서 여기 계시는 거 아닐까요?”
제법 그럴듯한 가설이었지만 진무경 앞에서는 자나 깨나 입조심해야 한다.
나는 먼지 나게 두들겨 맞는 혁무진을 바라보며 품 안을 더듬었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다음 순간, 동그랗고 단단한 뭔가가 손끝에 닿았다.
풍양이 남기고 간. 아니, 풍양에게서 빼앗은 유일한 물건이다.
‘아이템 확인.’
띠링.
아이템창
[잠력단]종류 : 영단
등급 : ???
제한 : [절정 무인] 이상
설명 :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제조한 단환. 약 한 시진 동안 복용자의 잠재된 힘을 대폭 끌어 올리는 대신, 그에 대한 대가가 뒤따른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복용하지 말 것.
효과 : 전투 관련 능력치 +100
[공력] +15년 [호신강기] 사용 가능제한 시간이 짧은 걸 감안해도 무지막지한 효과. 풍양이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목숨이 위태롭다면 두 개가 아니라 스무 개도 먹어야지, 뭘.
하지만 정작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제조한 단환이라.’
아이템 등급도 물음표에, 정확한 후유증은 나와 있지 않으며 심지어 제조자는 베일에 싸여 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괴상한 물건을 만들어 냈을까?
‘이거,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잠력단을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외침.
– 무경아아! 태경아아아!!
열정적으로 혁무진의 이마를 후려치던 진무경이 멈칫했다.
“환청인가?”
응,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