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28
#127화
물음표가 느낌표로, 느낌표가 황당함과 분노로 바뀌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진무경이었다.
“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거친 숨소리. 당장이라도 내 주둥이에 한 방 먹이고 싶은지 주먹이 움찔거린다.
‘음, 제대로 열받았군.’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게는 든든한 방패가 있으니까.
“어허, 무경아.”
나직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진무경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형님!”
“태경이도 다 생각이 있었겠지. 안 그러느냐?”
나는 짐짓 눈을 내리깔았다.
“아닙니다. 소제(小弟)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응?”
“호기심에 그만…… 하지만 큰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갖고 있어서도, 숨겨서도 안 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이 주먹을 부르르 떠는 연출도 잊지 않았다.
“마교! 그 악독한 놈들의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립니다!”
이건 진심이다. 기왕 만드는 거 잘 좀 만들지, 광기에 젖은 살인귀가 되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니!
“허어.”
나를 바라보는 진위경의 눈빛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나중에 커서 협의지사가 되겠다던 작고 귀여운 꼬마 아이가 생각나는구나. 그때 네 나이가 여섯 살이었다. 기억나느냐?”
당연히 안 나지.
재작년 일도 가물가물한데 이 몸의 원주인이 여섯 살 때 뭘 했는지 알 턱이 있나. 그러나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히 기억합니다. 제 유일한 꿈이었으니까요.”
협의지사건 경기도지사건, 오늘 이 시간부로 그게 내 여섯 살 때 장래 희망이다.
“허허, 그 어린 녀석이 이렇게 훌륭히 장성하다니.”
흐뭇하게 웃은 진위경이 이번엔 다른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지. 위팽, 기억나는가?”
위팽이 숨도 쉬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고, 그러고서 딱 십 년 후부터 계집질 시작한 건 기억납니다.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었더니 그때는 천하제일의 풍류남아라고 하던데요.”
“영웅이라면 모름지기 풍류를 알아야지.”
“무공은 쥐뿔도 모르는데 풍류만 알아서 뭐 합니까? 말씀하시는 영웅이 밤의 영웅, 기녀들의 영웅. 뭐 그런 겁니까?”
“조용히 하게. 우리 막내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남달랐어.”
“그러니까 그 싹수가…… 어후, 됐습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벌컥벌컥.
술을 병째로 들이붓는 위팽을 깔끔하게 무시한 진위경의 시선이 다음 주자를 향했다.
“무경아. 이제 막내의 진심을 알았으니 화 풀거라.”
오만상을 쓰고 있던 진무경이 입을 뗐다.
“저 자식 한 대만 때리면 안 됩니까?”
“어허.”
“딱 한 대만. 제발.”
싸늘한 목소리에 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 못난 아우를 용서하십시오, 둘째 형님.”
“지금까지 반말 찍찍 하던 놈이 형님 같은 소리 하네.”
“예? 제가요?”
“그만해라. 마지막 경고다.”
“아닙니다. 차라리 절 때리십시오. 그렇게라도 형님의 분이 풀리신다면 이 아우,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야, 이 새끼야!”
벌떡 일어난 진무경이 헉, 하는 신음과 함께 도로 주저앉았다. 가슴팍에 동여맨 붕대가 붉게 젖어 드는 걸 보니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다.
“아이고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 자식이 또…… 커헉!”
“의원, 의원!”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술자리.
묵묵히 두 번째 술병을 집어 든 위팽이 중얼거렸다.
“가문 꼴 잘 돌아간다…….”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무려 산서제일가다.
* * *
결국, 의원이 다녀가고 나서야 분위기가 수습됐다.
나를 찢어 죽일 듯한 진무경의 시선을 외면하고 잠력단을 품에서 꺼냈다.
“바로 이겁니다.”
마치 피를 응축시킨 것처럼 온통 붉은 단환.
진위경과 위팽이 잠력단을 유심히 살폈다.
“위팽, 어떻게 생각하나?”
“보기만 해도 피비린내가 나는군요. 흉악한 물건입니다.”
“정말 마교 쪽에서 만든 걸까?”
“글쎄요. 그렇다면 마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저로서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뭔가 달라.”
두 사람의 표정은 몹시 심각했다. 잠력단을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한 건 나도 매한가지라 힌트를 던져 주기로 했다.
“잠력단이라고 하던데요.”
“잠력단?”
“네, 풍양의 입으로 직접 들었어요.”
진무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풍양이? 도대체 언제?”
“너 기절해 있을 때요.”
“……후욱. 후우욱.”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유일한 목격자고 증인이다. 본전도 못 찾은 진무경이 화를 가라앉히려 호흡을 가다듬을 때, 다른 두 사람은 미간의 골만 깊어지고 있었다.
“잠력단이라, 위팽?”
“저도 처음 들어 봅니다. 이 정도 효력에 마교의 물건이라면 분명 정마대전 때 쓰였을 터인데…….”
“마교가 아닐 수도 있지 않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날 향했다.
“마교가 아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이거죠.”
사실 마교가 만든 단환이 아니라면 다시 가져갈 수 있을까 하는 희망 사항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내 나름대로 달리 떠오른 생각도 있었고.
‘대장로.’
지난번 전쟁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적은 분명 항산검문이었지만 진정한 적은 대장로, 바로 그였다.
이분법적인 추측보다는 제3의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죠.”
내 말을 모두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위팽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신음처럼 흘러나온 한 단어였다.
“암천…….”
“위팽.”
진위경의 날카로운 눈빛이 이어지는 말을 틀어막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황급히 얼버무리는 위팽.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암천이라는 두 글자가 내 뇌리에 깊게 박힌 후였으니까.
‘암천? 그게 뭐지?’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띠링.
– [암천]에 관한 미약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 [잠력단]에 관한 아이템 설명이 변경됩니다.
느닷없는 시스템 알림. 나는 잠력단을 들고 있는 위팽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잠깐 확인해 봐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아이템 확인. 마음속으로 중얼거리자 곧장 잠력단에 관한 정보가 떴다.
변경된 정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아이템창
[잠력단]종류 : 영단
등급 : ???
제한 : [절정 무인] 이상
설명 : [암천]이 제조한 단환. 약 한 시진 동안 복용자의 잠재된 힘을 대폭 끌어 올리는 대신, 그에 대한 대가가 뒤따른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복용하지 말 것.
효과 : 전투 관련 능력치 +100
[공력] +15년 [호신강기] 사용 가능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사라지고 [암천]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그 자리를 채웠다.‘문맥으로 봐서 어떤 모종의 단체인 건 확실한데…….’
뭐, 잠력단 같은 물건을 만드는 놈들이니 마교와 비교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일 게 뻔하다.
‘암천.’
누가 지었는지 작명 센스 하나는 끝내준다. 두 글자만으로 자신들이 수상쩍은 놈들이라는 걸 알려 주니까.
이 새끼들 분명히 뒤가 구린 놈들이다. 99퍼센트 확신한다.
‘진위경과 위팽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앞서 두 사람이 보인 반응으로 봤을 때 암천에 관한 정보 노출을 극도로 꺼릴 거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한 번 찔러 볼까?’
하지만 정작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무경이 한발 빨리 물었다.
“암천? 그게 뭡니까?”
“그게…….”
진위경의 얼굴 위로 곤란한 빛이 스쳤다.
“미안하구나.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다.”
동생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진위경이 이러는데 위팽에게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두 공자님께는 죄송합니다만, 보다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확고한 태도다. 나도, 진무경도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그럴수록 암천에 대한 호기심은 더더욱 커져 갔다.
‘우리한테까지 감춰야 할 비밀이라 이거지.’
가문의 직계라는 혈통은 둘째치더라도, 나와 진무경은 태원진가의 핵심 고수다. 진위경의 오른팔이 위팽이라면 각자 왼팔, 한쪽 다리 역할 정도는 하고도 남는다.
‘그럼 가문 내에서도 두 사람만 아는 특급 기밀이라는 건데.’
나도 사람인지라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항산검문 때는 잠잠하던 시스템이 반응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암천, 잠력단, 진위경과 위팽만 아는 특급 기밀.’
몇 가지 키워드가 머릿속을 휙휙 스쳐 지나간다.
좋아, 결심했다.
‘신경 끄고 살아야지.’
과한 호기심은 명줄을 짧게 만드는 법이다. 항산검문에 우편 배달하러 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이름부터가 불길하기 짝이 없는 수수께끼의 단체? 엮였다가는 좋은 꼴 못 볼 게 뻔하다.
“자자, 이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한 잔씩들 할까?”
진위경이 억지로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이미 혼자서 두 병을 아작 낸 위팽도, 부상당한 진무경도 잔을 채우는데 나라고 뺄 수 있나. 진위경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아 쭉 들이켰다.
꿀꺽, 꿀꺽.
도수 높기로 악명이 자자한 화주(火酒)가 후끈한 열기와 함께 목을 타고 넘어갔다.
“크으으.”
이야, 이거 장난 아닌데?
도수 높은 거야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마셔 보니 생각 이상이다. 이 정도면 소주, 맥주는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다.
몸을 부르르 떠는 나와는 달리 나머지 셋은 곧장 빈 술잔을 꽉꽉 채웠다.
“마셔!”
“들이부어!”
“죽을 때까지 달려!”
“…….”
산서성이 화북(華北) 지방에 속하며, 화북 사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주당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술로 밤을 꼬박 지새우고 난 후였다.
* * *
다음 날 정오. 상쾌한 기분으로 말에 오르는 나를 혁무진이 괴물 보듯 바라봤다.
“속 괜찮으세요?”
“어, 괜찮은데?”
“혹시 어제 혼자 술 안 드신 건 아니죠? 아니면 중간에 주무셨다거나.”
“응, 넷이서 계속 마셨어.”
“……그걸 전부 다요?”
녀석이 입을 딱 벌렸다.
“그게 말이 됩니까? 사람이에요?”
“다 들어가더라.”
“세상에, 도대체 밤새 몇 병을 드신 겁니까?”
단위가 잘못됐다. ‘병’이 아니라 ‘통’이다.
무슨 해적 나오는 영화에서나 보던 거대한 술통을 끊임없이 비우고, 또 비웠다.
“글쎄, 한 스무 통 가까이 마신 것 같은데. 열 통 넘은 후로는 안 세어 봐서 모르겠다.”
“허, 정말 대단하십니다.”
혁무진이 감탄하며 엄지를 추켜세우는데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세 마리의 좀비, 아니 세 명의 절정 고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흐어어.”
“우욱.”
“허억, 허억.”
창백한 안색, 바짝 마른 입술과 퀭한 눈동자.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발을 질질 끌며 마차로 쏙 들어가는 모습에 호위대의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자기 왜 마차를…….”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자네들 우리 대주님이랑 술 안 마셔 봤어? 주신(酒神) 위팽. 몰라?”
“대주님 별호는 귀검 아니었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주량으로 따지면 무신(武神)도 이길걸. 그냥 지금까지의 피로가 쌓여서 저러시는 거겠지.”
무인들이 쑥덕거리던 그때, 마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람이 후다닥 뛰쳐나와 허리를 숙였다.
“꺼억, 끄우웨에에엑!”
촤르르르륵.
희멀건 액체만 한참 쏟아 내고 비틀비틀 마차로 복귀하는 위팽의 뒷모습에 한창 떠들던 무인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긴. 저건 누가 봐도 숙취지. 잠도 안 주무시고 그렇게 마셔 댔으니 저러실 만도 해.”
“그럼 삼공자님은 왜 저렇게 멀쩡하신데?”
호위대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전신에서 섬뜩할 정도로 풍기는 술 냄새.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상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편안한 호흡.
“설마?”
“삼공자님이 대주님을 이겼다고? 그 주신을?”
술렁이는 장내.
이제 혁무진은 감탄을 넘어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아, 역시! 허구한 날 기녀들 끼고 술 마시던 조장님 수준!”
“…….”
“조장님이 삼 년만 더 술을 마셨으면 본가 기둥뿌리가 뽑혔을 거라는 총관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래서 항상 공금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거였군요!”
“……야, 인마.”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 이미지가 뭐가 되냐.
안 그래도 아까부터 사방에서 우수수 꽂혀 드는 시선에 얼굴이 따가울 지경이다.
“커흠. 커흐흠!”
헛기침하며 슬쩍 주위를 둘러봤는데 이게 웬걸. 시커먼 사내놈들 눈동자가 밤하늘 샛별보다 반짝거리는 중이다.
“진정한 주신, 주신이다.”
“태원 홍등가에서는 유명하시지. 야왕이라고 못 들어 봤나?”
“야왕? 별호만 들어도 알겠다. 원래 술 잘 드시는 걸로 정평이 나 있으셨구먼.”
“그게 아니라…… 그거. 그거.”
“허억. 정말인가?”
“나야 모르지. 본 적이 없으니까.”
“알고 보니 진정한 사내셨구먼.”
띠링.
–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당신의 주량과 위용에 감탄합니다!
– 명성이 20 상승합니다!
– 명성이 22 상승합니다!
– 명성이 25 상승합니다!
– 특정 소문이 퍼질 시, 관련된 칭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아니 시발, 명성 쭉쭉 오르는 거 뭔데.
그리고 관련된 칭호라니. 괜찮아, 넣어 둬. 제발 산서잠룡으로 만족하게 해 줘.
‘그만해. 이 미친놈들아…….’
이유 모를 수치심과 함께 고개를 돌린 나는, 내 특정 부위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혁무진과 마주할 수 있었다.
“……뭐 하냐, 지금?”
“아, 잠깐 눈대중으로 재 보고 있었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대답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혁무진이 해맑게 웃으며 팔뚝을 내밀었다.
“이야, 역시 대단하십니다. 헤헤.”
나는 팔뚝에 대한 답례로 주먹을 내밀었다.
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