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32
#131화
“자, 갓 잡은 돼지가 한 근에 스무 푼! 싸다, 싸!”
“어머, 어쩜 좋아. 가락지가 너무 잘 어울린다. 원래 은자 한 냥인데 손가락이 예쁘니까 반 냥. 어때?”
“이 단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한 알만 먹어도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불끈 솟는…….”
거리는 끝없이 늘어선 가판과 시전 상인들의 쩌렁쩌렁한 외침으로 가득했다.
사람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태원(太原)의 거리를 본 나는 혀를 내둘렀다.
‘사람 진짜 많네.’
면면도 제법 다양하다. 저잣거리 상인들은 물론, 돌팔이 약장수와 매끄러운 비단옷을 걸친 자도 있고 궁기가 줄줄 흐르는 거지들도 있다.
허리춤에 검을 패용한 무림인들도 심심찮게 보였지만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제 할 일을 계속했다.
‘산서성의 성도(成都)라더니.’
산서성에는 수십여 개의 현읍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태원이 차지하는 위치는 각별하다.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진 덕분에 까마득한 과거엔 어느 왕조(王朝)가 도읍으로 삼았던 적도 있단다.
물론 그 왕조는 멸망한 지 오래지만, 그 후에도 태원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고 혁무진한테 들었다.
‘그게 태원진가가 삼백 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겠지.’
풍부한 물자와 인력. 그리고 경제력.
생각해 보면 웬 망나니 하나가 가문 공금을 털어 기루에 죄다 쏟아부었는데도 항산검문과 전쟁을 치를 여력은 남아 있었다.
태원진가가 아니라 항산진가였다면 이미 오래전에 쪽박 차고 거리로 나앉았을 거다.
‘태원진가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태원을 지나갈 수 없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떠올리는 내게 혁무진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땅 투기가 좋긴 좋구나. 뭐 그런 생각.”
“예?”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된다고요?”
“잘 아네.”
“그 말도 이제 지겹습니다.”
“그래, 나도 너 지겹다.”
“그럼 절 왜 데려오셨습니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큰형님이 붙여 준 거야.”
진위경은 내일 있을 산서 성주와의 오찬에 대비해 나를 먼저 보냈다. 아무래도 변덕이 심한 어린아이니 별다른 잡음 없이 최대한 맞춰 주려는 의도 같다.
아무튼, 그 때문에 혁무진이 나와 동행했다. 태원 토박이인 녀석은 여러모로 수행원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가 네 고향 아니냐?”
“고향이라, 그렇죠.”
혁무진이 복잡한 눈빛으로 거리를 응시했다.
“고작 오 년밖에 안 지났는데…… 참 많이 바뀌었네요.”
“중간중간 몇 번은 들렀을 것 아냐.”
“아뇨. 그동안 한 번도 안 들렀는데요.”
뜻밖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제가 무공을 좀 늦게 시작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면 별수 있겠습니까. 열 배, 스무 배로 노력하는 수밖에요.”
“으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 보는 진지한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혁무진 이 녀석은 매사에 실없이 굴어도 나름 한가락 하는 일류 고수였다. 워낙 주위에 괴물들이 득실거려서 그렇지, 결코 낮은 경지가 아니다.
그만큼 피나는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거기에 더해서…….
‘재능도 있는 편인 것 같고.’
[Lv.48 혁무진]빠른 속도로 쑥쑥 올라가는 레벨이 그 증거다.
이 녀석, 이러다가 갑자기 절정 고수라도 되는 거 아냐?
내 새삼스러운 시선에도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한 혁무진은 감상에 젖어 있기 바빴다.
“아, 저 아주머니 아직도 계시네.”
반가우면서도 아련한 목소리다.
혁무진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인이 작은 좌판 앞에서 각종 군것질거리를 팔고 있었다.
“혹시 빙당호로(冰糖葫芦) 좋아하세요?”
평소였으면 헛소리 그만하고 갈 길이나 가자고 했겠지만 어째 분위기가 심상찮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대꾸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어릴 때는 빙당호로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요. 좌판 앞에 쭈그려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아주머니께서 한두 개씩 쥐여 주셨죠.”
혁무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하나같이 부모님 손을 꼭 잡고 와서 빙당호로며 당과를 사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던 그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해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정도 사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오 년 만에 왔다는 것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곳, 무림에는 유난히 고아가 많다. 당장 주변만 둘러봐도 저잣거리에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다니는 어린아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니까.
‘아마 녀석도 비슷한 처지였겠지.’
가족이 없으니 돌아올 이유도 없다. 와 봐야 빙당호로가 먹고 싶어 좌판 앞을 서성이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만 떠오를 뿐이다.
그래서 수련으로 그 아픔을 잊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녀석에게는 태원진가가 집이고 동료들이 가족이었던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그동안 너무 함부로 대했어.’
젠장,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이런 내 변화를 혁무진은 금방 알아차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오늘 미세먼지가 심해서 그런가, 코가 간질간질하네.”
“미세먼지요?”
“그건 넘어가고, 빙당호로나 하나씩 먹을까?”
“객잔부터 미리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해 떨어지기 전에 객실을 잡아 놓지 않으면 자리가 없어서.”
“야, 저거 하나 먹는 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경비도 넉넉하게 받았을 거 아냐?”
“그건 그렇죠.”
“이참에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실컷 놀다 가자. 너 어렸을 때 저 아주머니한테 얻어먹은 것도 갚을 겸 매상 잔뜩 올려 드려.”
“필요한 곳에 쓰라고 주신 경비를 이렇게 써도 될지…….”
“써, 다 써. 나중에 뭐라 하는 놈 있으면 나한테 데려와.”
“이공자님이 뭐라고 하시면요?”
“……그 인간은 빼고 데려와.”
혁무진이 피식 웃더니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빙당호로나 하나씩 먹을까요?”
“그래, 아까부터 보고 있으니까 침 고인다.”
다분하게 혁무진을 의식한 말이다. 내일모레면 서른인데 과일 사탕 따위에 침이 고이긴 무슨.
‘이렇게라도 기분이 좋아지면 된 거지.’
저 녀석도 그동안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다. 틈만 나면 구박받고, 얻어맞고, 퀘스트만 했다 하면 괴물 같은 놈들만 만나는 바람에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혁무진과의 첫 만남은 분명 악연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야, 무진아.”
막 좌판을 향해 걸어가려던 혁무진이 멈칫했다.
“예? 왜요?”
“그…….”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이 혀끝에서 맴돈다. 젠장, 시커먼 두 사내놈이 주고받기에는 너무 간질거리는 말이다.
고민 끝에 결국 엉뚱한 소리만 툭 튀어나왔다.
“각자 두 개씩 먹자. 큰 걸로.”
“아, 예.”
괜히 부끄러워서 먼 산을 바라보는 내 귓가로 혁무진과 중년 여인의 대화가 흘러들어 왔다.
“어머! 너 무진이 아니니? 혁무진. 맞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주머니.”
“세상에, 맞네. 맞아.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얘.”
“아주머니는 여전하신데요.”
“호호호, 말이라도 고맙네. 무진이 너는 잘 지내고? 듣기로는 무인이 됐다던데.”
“예. 태원진가 소속입니다. 곧 수문각주로 승진해요.”
“태, 태원진가? 수문각주? 세상에, 세상에…….”
수문각주로 승진할지 말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대화다.
‘무슨 라디오 사연 같네.’
늘 주위를 맴도는 고아 아이에게 빙당호로를 건네주곤 했던 맘씨 좋은 아주머니. 곤궁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피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훌쩍 장성한 모습으로 돌아와 재회한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본 이야기지만 감동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크흠, 이거 참, 눈에 뭐가 들어갔나…….”
이건 황사인가 미세먼지인가. 아직 공장은 안 세웠을 테니 황사겠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그 순간이었다.
“그래, 부모님은 찾아뵈었고?”
“아직요. 오늘이나 내일쯤에 한 번 들러볼 생각입니다.”
“빨리 가 봐라. 너희 집 이사 간 건 아니?”
“이사요? 어디로요?”
“저쪽 대로변에 큰 장원으로 갔다. 연못에 비단잉어도 풀어 놓고 키우더라.”
“아, 그래요?”
“……?”
부모님? 이사? 커다란 장원에 비단잉어?
잠깐. 이거 뭔가 이상한데. 황당해진 나는 빙당호로를 들고 돌아오는 혁무진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예? 뭐가요?”
“너희 부모님 살아 계셔?”
혁무진이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보았다.
“멀쩡한 부모님을 왜 죽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아까 했던 말은 뭔데.”
“무슨 말이요?”
“빙당호로. 그거 못 먹어서 맨날 손가락 쪽쪽 빨았다며?”
“못 먹었죠. 부모님이 이빨 썩는다고 못 먹게 했어요. 여기 상인분들이야 저희 부모님 성격 극성인 거 다 아니까 일부러 저한테만 안 팔았는데, 저분만 몰래 하나씩 챙겨 주셨고.”
“……부모님 손 잡고 다니는 애들 부러웠다는 건?”
“저희 집 장사가 워낙 잘돼서 시간이 안 나시더라고요. 혼자 놀았죠, 뭐.”
“그, 그럼 태원에 가족이 있으면서 오 년 동안 한 번도 안 왔다고?”
“집 나왔어요. 가업 물려받기 싫어서 편지 한 통 남기고. 본가 수문각주님이 저희 아버지 불알친구라 제 근황은 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
“한 이 년 동안은 엄청 뭐라 하셨는데, 갑자기 막둥이가 태어나서 제가 가업을 이을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 후부터는 별말씀 안 하시던데요?”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던 혁무진이 손을 들어 뭔가를 가리켰다.
“아, 저기 있다. 보이시죠? 저 건물이 저희 부모님 건데…… 저 없는 동안 더 커졌네요.”
나는 혁무진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우뚝 솟은 거대한 5층짜리 전각과 커다란 글씨로 쓰인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혁가 포목점]혁무진은 뿌듯하게 웃었다.
“태원에서 가장 큰 포목점입니다. 하남과 하북에 지점도 있어요.”
이 새끼도 금수저구나…….
이렇게 살벌한 동네에서 체인점까지 낼 정도면 말 다 했다.
‘내가 뭘 한 거냐.’
빙당호로가 먹고 싶어서 손가락 쪽쪽 빨던 어린 소년?
실상은 성공한 사업가 부모님이 아들놈 치아 건강을 생각해서 못 먹게 한 거였다.
‘아니 시벌, 이게 무슨.’
입만 벌린 채 서 있는 내게 혁무진이 손에 든 빙당호로를 건넸다.
“자, 하나 드세요. 제가 특별히 가장 크고 영롱한 걸로 골랐습니다. 이 근방에서는 저분이 파시는 빙당호로가 최고예요.”
“이런 호로색…….”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욕을 꿀꺽 삼키고 빙당호로를 까드득 깨물었다.
“이제 빨리 객실이나 잡으러 가자.”
“벌써요? 이제 겨우 철전 몇 푼 썼는데…….”
“마! 그게 네 돈이야? 필요할 때 쓰라고 준 경비잖아, 경비!”
“아니, 방금은 실컷 쓰고 놀다 가자면서요?”
“이 정도면 놀 만큼 놀았어. 해 떨어지면 객실 찬다며. 오늘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내일 오찬에 늦으면 네가 책임질래?”
“…….”
* * *
홍화객잔.
현판에 적힌 객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하오문의 손이 뻗친 곳 중 하나였다.
‘밤에는 홍화루. 숙박은 홍화객잔이라.’
거, 누구 생각인지 취객들 등골까지 뽑아 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먼.
“들어가자.”
아까부터 주둥이가 댓 발 나온 혁무진을 데리고 객잔 입구를 향해 다가가려던 그때였다.
“저어, 죄송합니다만.”
그건 묘하게 신경을 잡아당기는 목소리였다. 꿈꾸는 듯 몽롱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목소리의 주인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이 느낌은…….’
돌아서서 그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그건 진무경과는 다른 종류의 기세였다.
[Lv.??? 청풍]또 다른 절정 고수의 등장. 긴장감 속에서 청년, 청풍의 입술이 열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빙당호로 하나만 먹어도 되겠습니까?”
“……?”
이건 또 뭐 하는 새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