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34
#133화
우진태(優進泰)는 황금빛 술잔을 치켜들었다. 온갖 진미와 명주로 가득 채워진 탁자에는 그를 포함하여 총 다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자, 산서오문(山西五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한 순배씩 술이 돌자 다섯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역시 홍화객잔이군요. 숙수가 누군지는 몰라도 음식 맛이 대단합니다.”
“그러게요. 혀에 닿자마자 살살 녹아요.”
우진태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허리띠 풀고 마음껏 드시오. 오늘도 내가 모두 살 테니.”
“이야, 역시 형님! 이러다가 성운표국 기둥뿌리 하나 뽑는 거 아닙니까?”
“어머, 감당되시겠어요?”
우진태는 피식 웃으며 눈앞의 이남이녀(二男二女)를 바라보았다.
스무 개의 중소 문파 연합. 그중에서도 대표 격인 산서오문의 자제들이지만 자신에게는 한 수 접어 줘야 한다.
“어허, 나 우진태요. 성운표국의 우진태! 이 객잔을 통째로 사도 문제없으니 걱정 말고 마음껏 드시오.”
약간의 허세가 섞이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삼문협(三門峽)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성운표국은 운수와 경비 등, 각종 사업으로 매해 엄청난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으니까.
우진태는 바로 그 성운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역시 돈이 최고지.’
산서오문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중소 문파의 자제들. 성운표국의 금력(金力)을 등에 업은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 덕분에 우리 성운표국이 한 계단 올라섰으니 그만한 대접을 해야 하지 않겠소?”
우진태의 말에 사람들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어휴, 그게 어떻게 저희 덕분입니까? 다 국주님과 형님께서 표국의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신 덕분이지요.”
“맞아요. 우 소협의 말씀은 저희가 감당하기 어려워요.”
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데 산 사람은 오죽할까.
‘불철주야 애썼다라.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뼈대 있는 무가(武家)도, 그렇다고 뚜렷한 무림 문파도 아닌 성운표국이 산서오문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재물을 풀었기 때문이다.
이십여 개 중소 문파의 문주들과 중진들, 자제들…… 그들 모두에게 밤낮 가리지 않고 술과 재물을 퍼먹였고, 결과는 확실했다.
‘산서오문.’
남부에 위치한 중소 문파 연합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자리다.
평범한 무림 문파였다면 허울만 좋은 명예직이었겠지만. 각종 사업을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성운표국으로서는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진태는 짐짓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성운표국이 있는 거요.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그 간악한 노괴(老怪)들 때문에 통 기를 못 펴고 살았는데…… 다시 한번 고맙소.”
“노괴들이라면, 그 배반자들 말입니까?”
“어이쿠, 그자들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꼼짝없이 이용만 당할 뻔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산서오문의 자제들이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다.
삼도문, 궁귀문을 비롯한 다섯 개 문파, 그들이 바로 전(前) 산서오문이다. 그러나 대장로의 수족임이 밝혀진 팔천협 전투에서 빠짐없이 멸문당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 작자들이 유난히 성운표국을 견제하긴 했습니다.”
“국주님과 우 소협의 혜안(慧眼)에 정체가 발각될까 봐 그런 것이 분명해요.”
우진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눌렀다. 전 산서오문의 문주들이 성운표국을 견제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우려해서지.’
당시의 산서오문은 지금보다 훨씬 강했고 유대도 끈끈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자리의 모두는 이미 성운표국의 돈맛을 봤다. 이걸 빌미로 야금야금 각종 이권을 뺏어 먹는 건 시간문제다.
“자, 이번에는 우리의 우정을 위해 건배합시다.”
“우정을 위하여!”
흥겨운 분위기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우진태는 틈틈이 선물이라는 이름의 뇌물을 건네기도 했다.
“이번에 사천에서 들여온 촉금(蜀錦)인데, 황 소저께 잘 어울릴 것 같아 따로 빼 두었지요.”
“어머, 제가 아는 그 촉금이요?”
“예. 그중에서도 최상급이라 그런지 빛깔이 아주 곱더군요. 하인에게 일러 마차에 미리 실어 두었으니 가져가십시오.”
“세상에, 우 소협. 너무 감사해요.”
“감사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그냥 소저를 생각하는 제 마음이다, 생각하시고 넣어 두십시오.”
“네, 네?”
“하하,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못 들은 셈 치십시오.”
우진태의 매력적인 미소에 소속된 무인만 일백이 넘어가는 문파의 무남독녀가 볼을 붉혔다.
마음의 빚을 지게 해 두면 언제고 써먹을 날이 있을 것이다.
“형님, 이거 서운합니다. 소저들만 챙기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는 어느새 호형호제하게 된 무가의 자제를 향해 이번엔 눈을 찡긋했다.
“내가 혁 아우를 잊었을 리가. 기대하고 있게. 아주 끝내주는 선물을 준비해 뒀으니.”
“크, 역시 형님.”
“하하, 우 소협, 날 잊은 건 아니겠지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사람마다 어울리는 선물이 있어서 따로 말씀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쉬운 일이다. 여인들에게는 값비싼 비단과 보석, 사내들에게는 절색의 여인과 재물을 안겨 주면 된다.
마침 근처에 산서성 제일의 기루라는 홍화루가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우진태는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기분도 적당히 풀렸겠다, 오늘 술자리는 이쯤에서 파할까 하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십니까?”
선물을 받기 전이라면 아쉬웠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인들은 마차에 실어 둔 비단과 보석을 확인하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고, 사내들은 기루로 자리를 옮길 거라는 확신에 가슴이 뛰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몇 잔씩들 하고 일어납시다. 내일 있을 오찬(午餐)도 잊지 마시고요.”
우진태의 말에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아무리 취해도 그걸 잊겠습니까.”
“우 소협도 참, 저희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에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한 겁니다. 하하하.”
산서 성주와의 오찬.
그것이 산서에서 방귀 좀 뀐다는 문파의 자제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였다. 우진태는 술잔을 비우며 생각했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성주.
사람 비위 맞추는 데에는 도가 튼 그다. 이미 성주를 구워삶을 만반의 준비를 끝내 두었다.
‘듣기로는 제법 잔망스러운 녀석이라던데…… 황족이라, 과연 어떨까?’
우진태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아래층에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정파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 차기 무림을 이끌어 갈 용과 봉황들! 십봉룡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야, 야. 목소리나 줄여. 사람들 쳐다보잖아.”
십봉룡? 그 단어에 다섯 쌍의 귀가 쫑긋 섰다.
십봉룡이 누구인가, 이미 전설의 첫 장을 쓰고 있는 천재들이자 정파 무림의 미래다.
십봉룡은 강호의 후기지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지? 무림인인가?”
난간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목을 빼고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 명입니다. 한 명은 도련님, 한 명은 그럭저럭 무인 같고…… 다른 하나는 거지로 보이는데요.”
“그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야?”
“쉿, 계속 들어나 봅시다.”
우진태의 말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다들 무가의 자제라고 할 만큼 무공을 익힌 몸이라 대화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말씀 계속하시죠.”
“별건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치기 어린 생각이 들었던 거죠.”
잠깐의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나와 저들 중에 누가 더 강할까? 저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산서오문의 후기지수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저 말, 다들 들으셨습니까?”
“네, 누가 한 말이에요?”
“아까 말했던 그 거집니다. 요즘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요.”
그때 우진태가 고개를 저었다.
“거지가 아니라 무인일 겁니다.”
“무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십봉룡을 입에 올릴 정도면 그게 맞겠죠. 어떻게 거지꼴이 됐는지는 뭐, 안 봐도 대충 알겠고요.”
우진태의 입가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뻔하지 않습니까. 어쩌다 익힌 삼류 무공 몇 수를 믿고 하염없이 강호를 떠돌다가 죽는 인생.”
“아하,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역시 우 소협이십니다.”
“곱씹을수록 웃기네. 어떻게 저 주제에 십봉룡을 입에 올렸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거리던 후기지수들의 웃음이 점점 진해졌다.
“그런 정신 나간 놈이랑 어울리는 것들 수준도 알 만하군. 아니, 미친놈이라고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이고 나가려나?”
“그, 같이 앉은 도련님이랑 무인은 뭐 하고 있대요?”
아래를 힐끗 내려다본 후기지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무인은 모르겠고, 도련님은 혼자서 고개 끄덕끄덕하고 있습니다.”
“허어.”
“정말요?”
“이야, 다들 저 표정을 봐야 되는데. 진심으로 저 거지 말을 믿는 것 같은데요?”
후기지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중에는 호기심을 참지 못한 우진태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보자.’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도련님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핫!”
동시에 다른 후기지수들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큭, 크크큭! 아, 웃음 참느라 혼났네.”
“크하하! 무공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놈들이, 뭐? 십봉룡이 어쩌고 저째?”
얼마나 웃었을까. 간신히 웃음을 그쳤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은, 물끄러미 자신들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시선이었다.
“다 웃었냐?”
‘도련님’의 한마디에 후기지수들은 멍해졌다.
다들 애지중지 자란 몸이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들어 보는 반말인가.
순간 싸하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우진태의 메마른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도련님’이 활짝 웃었다.
“당장 내려와, 이 호로 쌍노무 새끼들아. 목 아파.”
* * *
혁무진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한판 하시게요?”
“저놈들 하는 거 봐서.”
“호로 쌍노무 새끼 소리 나왔으면 싸우자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좋고. 내 얼굴에 저놈들 침 다 튄 거 보여?”
“흥건하네요.”
혁무진이 옷소매로 내 얼굴을 슥슥 문질러 주었다.
“사과 안 하면 어떡해요?”
“해야 될걸?”
“쟤들 표정 보세요. 절대 사과 안 해요.”
“그럼 뒤지게 맞아야지.”
“여인들도 있는데…….”
“나 남녀평등주의자야.”
“예?”
“공평하게 다 때린다고.”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던 청풍이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오, 잘은 모르지만 뭔가 멋있어 보여요.”
“별걸 다…… 일단 감사합니다.”
뭔가 더 얘기하고 싶어도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다섯 놈, 아니 다섯 연놈들이 2층에서 훌쩍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타닥.
일류 고수다운 사뿐하게 착지. 이쪽을 노려보는 그들 사이로 한 사람이 나섰다.
45레벨. 키 크고 훈훈하게 생긴 놈. 아까 처음으로 웃었던 그놈이다.
“나는…….”
“네가 대가리야?”
“대가리?”
“거기 다섯 명 중에 두목이냐고.”
놈이 피식 웃었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분들이 누군지 알면…….”
나는 마주 웃으며 연놈들의 레벨창을 쭉 읽었다.
“성룡이, 천우, 명화, 소혜, 마지막으로 넌 진태. 성까지 말해 줘?”
“……!”
“……!”
놀라움에 찬 다섯 쌍의 눈동자. 아니, 혁무진과 청풍까지 일곱 쌍의 눈동자가 내게 쏠렸다.
“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 제발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지 마라. 그 대사 이제 지겨워. 말하면 때릴 거야.”
“어떻게……!”
“귀에 무 박았냐?”
다음 순간, 내 손바닥이 놈의 뺨에 닿았다.
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