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37
#136화
“끄응.”
“으으으.”
신음을 흘리던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엎드린 서로의 모습을 마주 보니 민망하면서도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커흠. 정 소협, 상처는 어떠시오?”
“크흠. 뭐 그럭저럭. 갈 소협은?”
“난 죽을 것 같, 헉!”
“사실 본인도 마찬가지, 윽!”
말하다 보니 또 고통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중얼거렸다.
“재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산서잠룡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살면서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이야.”
분위기는 침울했다.
기라성 같은 문파들이 즐비한 중원(中原)이라면 모를까, 변방에 속하는 산서성에서는 두 사람 모두 침 좀 뱉고 방귀깨나 뀌는 문파의 후계자들이었다.
살면서 아쉬운 소리 한번 해 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흠씬 두들겨 맞고 침상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항산검문이 건재할 때만 하더라도 산서오문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가 좋았지요.”
몇 달 전이라면 산서오문을 필두로 중소 문파 연합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찍소리도 못 한다. 산서 무림의 균형이 깨진 것이다.
항산검문이 몰락한 이상, 산서 무림의 무게 추는 태원진가로 기울 수밖에 없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절 죽이실 겁니다.”
“이하 동문이오. 그리 신신당부하셨는데 이런 일이 생긴 줄 아시면. 으으, 생각하기도 싫소.”
자그마치 백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개망신을 당했으니. 곧 다가올 원단쯤에는 산서 전역에 소문이 퍼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멀리 도망치고 싶소.”
“도망이고 나발이고, 내일 걸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성주의 부름을 거절할 수도 없고…….”
“다리가 부러져도 일단 가야지 어쩌겠소? 그냥 성주도 아니고 황족(皇族)인데.”
“그래야죠. 그나마 얼굴은 멀쩡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옮겨 갔다.
죽은 듯이 누운 우진태의 얼굴은 말벌 떼에게 쏘인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간혹 힘겹게 내쉬는 숨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어찌 저렇게 팰 수가 있답니까?”
“산서잠룡이 이 정도로 잔인한 놈일 줄은 몰랐소.”
“그나마 미리 머리를 박고 있어서 망정이지, 저희도 우 형님과 같은 꼴이 날 뻔했습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여인들도 가차 없이 두들겨 패는 놈 아니오?”
일행 중에는 여인이 둘이나 끼어 있었다. 사내라면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 앞에서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한데, 진태경이라는 놈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나이.’
‘네, 네?’
‘나이. 몇 살이냐고.’
‘여, 열일곱인데요.’
‘넌?’
‘저, 저는 열여덟이어요.’
열일곱, 열여덟. 꽃다운 나이다. 슬슬 혼사 이야기가 오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기도 했다.
모두 진태경이 혹 여인들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생각하던 그때였다.
‘엉덩이 더 높이 들어. 뼈 나간다.’
빡! 빡!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빡! 빡!
‘마실 거면 숨어서 곱게 마시든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고!’
빡! 빡!
‘인성이 덜 됐어! 너희 같은 것들 때문에 체벌이 필요한 거야! 알아, 몰라!’
빡! 빡!
‘교권 향상! 어느 정도의 체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빡! 빡! 빡!
방금의 일을 떠올린 두 사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명은 혼절했고, 다른 한 명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 콧물을 쏙 뺐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외간 남자에게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았으니 혼삿길 막히는 건 시간문제일 거다.
“도대체 교권 향상이 무슨 말이오? 맹자에 나오는 말인가?”
“저도 모릅니다. 심지어 한 대 더 때리지 않았습니까.”
“악랄한 놈…….”
“그래도 저는 다른 분들이 부럽습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천인공노할 소리요? 지금 엉덩이에 피멍 잔뜩 든 거 안 보이시오?”
“다른 분들은 최소한 산서잠룡한테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웬 거지 같은 놈한테…… 크흑!”
“아, 저런.”
“차라리 산서잠룡한테 맞았으면 변명이라도 하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르는 비루먹은 놈이 제 엉덩이를……. 무슨, 돈도 아니고 매질을 빌린답니까?”
치욕감에 턱이 파르르 떨렸다. 진태경에게 검갑을 양도받더니 신나게 후려치던 거지꼴의 사내가 생각나서다.
‘와, 이거 재밌네요! 엉덩이 탄력이 좋으신데요?’
빡! 빡! 빡!
‘아프세요? 얼마나 아프세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더 세게 때려도 될까요? 제가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힘 조절이 미숙해도 이해해 주세요!’
빡! 빡! 빡!
죽기 직전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지 못할 치욕의 순간을 경험했다. 마음 같아서는 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 삼켜도 성치 않았다.
“그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걱정 마시오. 내 힘닿는 데까지 정 소협을 돕겠소!”
그들이 누군가, 산서오문의 후계자들이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이라면 몰라도 젊은 거지 하나쯤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졌다.
“저기 그런데…….”
“예?”
“그놈, 확실히 거지 맞소?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산서잠룡 일도 그렇고, 만전을 기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데…….”
“……그럼 좀 더 알아볼까요?”
“그, 그럽시다.”
세상 물정 모르던 금수저들이 줄빠따를 맞고 경각심을 갖게 됐다.
* * *
교육이 마무리된 뒤 우리는 객실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1층에 계속 머무르기엔 주위 손님들의 시선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주목에 어깨 으쓱하는 것도 한두 번 잠깐이지, 이런 상황에서 뭘 먹었다가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헷갈릴 거다.
“홍화객잔을 책임지고 있는 석 모라고 합니다. 편하게 석 총관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산서잠룡 이름값이 좋긴 좋다. 지금까지 털끝 하나 보이지 않던 총관이라는 자가 와서 고개를 숙일 정도면.
‘이 양반도 하오문 소속이겠지?’
홍화루는 하오문 산서 총지부장인 월화가 거점으로 삼은 곳이고, 홍화객잔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하부 조직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 사람은 내가 홍화객잔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닌데.’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생각하는 건 좀 과민 반응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불쾌하지는 않다.
그저 약간의 경계심이랄까. 지금까지는 확실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왔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따로 조용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오, 좋죠.”
알아서 서비스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총관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은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청풍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이대로 가시려고?”
“네. 밤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가 보려고요.”
가긴 어딜 가. 중간에 웬 잡것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대화도 제대로 못 했는데.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밤이 늦었으면 하룻밤 묵고 가셔야지. 여비도 없다면서요?”
“괜찮아요. 노숙은 익숙해서요.”
“익숙하면 안 되죠. 그렇지, 새로운 경험! 객잔에서 자 본 적 있어요?”
“여비를 잃어버리기 전에 객잔에서 몇 번 묵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두 분께 신세 진 것으로도 족합니다.”
옆에 있던 혁무진이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지. 내 빙당호로…….”
“넌 조용히 하고. 그래서 정말 가시게요?”
“예. 다행히 아직 산서성에 볼일이 남았으니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뵐 수 있을 거예요.”
이쯤 되니 할 말이 없다. 절정 고수가 제 발로 떠나겠다는데 밤길이 험하다고 붙잡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다만 갑자기 튀어나온 이 별종의 정체가 아직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갈 곳 없으면 태원진가로 오세요. 제 이름 대면 통과시켜 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태원진가의 공자셨죠. 산서잠룡 진태경…… 은인의 이름을 기억해 두겠습니다.”
아까부터 내 신분을 알고 있었음에도 별 동요가 없다. 아, 그렇구나. 딱 이 정도 반응이다.
혁무진이 은근슬쩍 눈치를 주며 끼어들었다.
“태원진가. 모르시오?”
“글쎄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귀에 익긴 한데 잘은 모르겠어요.”
잠시 갸웃거리던 청풍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뵙겠지요. 그럼 이만.”
나는 진한 아쉬움을 담아 인사했다.
“조심히 가세요. 태원진가 꼭 잊지 마시고.”
“하하, 당연하죠.”
그가 시원한 웃음과 함께 돌아서자, 대화가 마무리됐다고 생각한 총관이 입을 열었다.
“그럼 별채로 모시겠습니다.”
“아, 네. 무진아, 가자.”
“오오, 그 유명하다는 홍화객잔의 별채에서 잘 수 있는 겁니까?”
“봉황객잔에서도 별채에 묵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십니까. 봉황객잔이 후기지수라면 홍화객잔은 이미 명성이 알려진 절정 고수. 특히 온천(溫泉)은 고관대작들도 한 번씩 다녀갈 정도의 명소지요.”
“온천?”
“저도 풍문으로만 들었는데, 극락이 따로 없답니다.”
총관이 잔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희 아버님께서 올해 팔순이신데, 한 번 오셨다가 극락으로 떠나실 뻔했습니다.”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만큼 좋다는 거지요.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 예. 장수하셨으면 좋겠네요.”
온천이라…….
사우나는 자주 갔어도 온천은 한 번도 못 가 봤다. 뜨뜻한 물에 몸을 푹 담글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크흠. 그럼 가 볼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총관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단단한 손아귀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저어. 지금 온천이라고 하셨어요?”
“……아직 안 가셨어요?”
헤헤 웃는 청풍을 보며 확신했다.
이 자식이 온천은 처음이라는 것에 불알 두 쪽 건다.
* * *
이른 새벽,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저택의 연무장에는 한 사람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제 서른은 되었을까? 강건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쉬쉬쉭!
막힘없이 찌르고, 베고, 휘두른다. 초식과 초식이 바람에 꽃잎 휘날리는 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어느덧 팔 성에 이른 칠매검(七梅劍)이 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있을 때, 전령(傳令) 하나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수련 중에는 출입을 금하였거늘.”
“송구합니다. 허나 상산왕(上山王) 전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셔서…….”
“전하께서?”
“예. 금일 정오에 있을 오찬에 참석하라는 왕명이십니다.”
“오찬이라면……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온다는 그 자리냐?”
“옛.”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정삼품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로, 관작으로 치면 능히 산서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전하의 명이라 거절할 수도 없고. 이것 참.’
도지휘첨사는 결코 한가한 직위가 아니었다. 군사들의 훈련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자리.
그러나 성주이자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상산왕의 명령이다. 사내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명을 받들겠다고 전하여라.”
“충!”
전령이 떠나자 사내는 도로 검을 들었다.
다시 펼치기 시작한 칠매검에선 오래전 떠나온 화산(華山)의 매화가 피어오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