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38
#137화
“기침하셨습니까?”
별채의 문을 열고 불쑥 들어온 낯익은 얼굴.
막 운기조식을 끝마친 나는 가부좌를 풀며 입을 열었다.
“대답도 안 했는데 들어오냐?”
“에이, 조장님과 제가 그 정도로 먼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너랑 내가 어떤 사이인데?”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등을 맞댈 수 있는 전우? 애정과 신뢰로 똘똘 뭉친 군신(君臣) 관계?”
“애정? 음. 네가 아침부터 뒈지게 맞고 싶어서 작정을 했구나.”
“한 대 맞죠, 뭐.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갈수록 능청스러움만 일취월장이다. 그냥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고, 새벽부터 웬일이야?”
“그야 당연히…… 잠깐, 저 양반 뭡니까? 여기서 잤어요?”
혁무진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청풍을 바라봤다.
“아니, 별채에 방이 몇 갠데 왜 여기서 자.”
“내버려 둬. 그럴 수도 있지. 측간 다녀와 보니 잠들어 있더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풍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깔끔하게 실패했다.
그가 온천에서 나오자마자 노곤하게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깨우기도 뭣해서, 나도 그냥 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제 처음 만난 외간 남자를 방에 들이시면 어떡합니까.”
“……말이 좀 묘하다?”
“그런 말이 아니고요. 좀 더 조심하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조심은 무슨. 누가 들으면 저 친구가 암살자라도 되는 줄 알겠다.”
“아니라는 법 있습니까?”
“뭐?”
“조장님은 다 좋은데, 무림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무림이 얼마나 복잡한 은원으로 얽혀 있는 곳인데요. 방심하다간 정말 골로 갑니다.”
“재수 없는 소리 하네. 골로 보내 줘?”
“아, 진짜! 농담이 아니라니까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친 혁무진이 푹 잠들어 있는 청풍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공도 상당히 뛰어난 것 같은데 거지꼴로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그렇고. 그렇다고 개방의 제자도 아니잖아요.”
“원래 성격이 저렇게 돼먹은 거 아닐까.”
“저게 다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위장이라면요? 훈련된 살수(殺手)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닙니까?”
“살수라니? 날 노릴 사람이 어디 있다고.”
“왜 없습니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어디서 원한을 품을 만큼 막돼먹은 놈은 아니잖아.”
“……어제만 따져도 원한 품을 사람이 다섯 명은 생긴 것 같은데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하지만 청풍을 살수로 의심하는 건 너무 과민 반응이다.
나는 여전히 의구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흘끗대는 혁무진에게 말했다.
“이 친구는 아니야. 살수였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겠어?”
“뭐, 그건 맞죠.”
“그리고 살수는 무슨 놈의 살수. 산서오문인가 하는 놈들 빼면 나한테 원한 가질 일이 뭐가 있겠어?”
“대장로는 조장님께 무슨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지난 전쟁에서 죽은 본가의 무인들은요?”
“그건…… 그렇지.”
혁무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는 조심하라는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무림의 은원은 굉장히 은밀하고 끈질겨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으음.”
“먹음직스러운 음식에는 온갖 날벌레가 꼬이는 법. 산서잠룡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귀찮은 일들이 많아질 겁니다. 다짜고짜 생사결을 겨루자고 찾아오는 놈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세상은 넓고 미친놈들은 많구나.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놀라는 한편 혁무진에게 감탄했다.
이 녀석, 오랜만에 상당히 도움 되는 말을 해 주는데.
“너 제법 아는 게 많다? 아주 기특해.”
“어흠. 뭐 이런 걸 갖고 그러십니까. 그냥 이것저것 많이 본 거죠.”
역시 현지인. 무림에서 내 나이쯤 되다 보면 살수가 사람 죽이는 것도 보고, 뭐 그러는 모양이다.
“원래 무림에서는 그런 일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나? 저잣거리 나가면 무인들끼리 시비 붙어서 싸우고 있고. 뭐 그런 거야?”
“예?”
혁무진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태원이에요. 치안 엄청 좋아요.”
“아, 그럼 자주는 아니고 가끔?”
“가끔이라뇨? 제가 태원진가에 입문하기 전에 태원에서 이십 년 가까이 살았지만 무인들끼리 싸우는 건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응?”
“서쪽으로 반 시진 거리에 성주가 머무는 산서성부(山西城府)가 있고 동쪽으로 한 시진이면 태원진가가 나옵니다. 괜히 칼부림 나 봤자 인생 피곤해져요. 밑바닥 낭인들도 인의대협 행세하는 곳이 태원인데. 모르셨어요?”
이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 이것저것 많이 봤다며?”
“뭘요? 아, 그거요?”
“그래, 그거.”
“그거야 당연히 책에서 읽은 거죠.”
“……책?”
“네. 집 앞에 나이 지긋하신 노인이 운영하는 서점이 있었거든요. 철전 한 냥에 반 시진씩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죠. 거기서 제 꿈을 키웠습니다.”
혁무진이 추억에 잠긴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점소이 검신 되다, 아파야 무인이다, 무림의 아들 걸어서 구주팔황 세 바퀴 반 등등…… 참 재밌었습니다.”
“아, 그 책들을 읽고 무인이 되기로 마음먹었구나.”
“그럼요. 몇 권은 서점 망할 때 직접 사서 소장도 했습니다. 빌려드릴까요?”
“아냐, 됐어. 그나저나 무진아.”
“예?”
“너 진짜 맞아 뒈지고 싶니?”
감탄했던 내가 병신이지.
이 무협 소설 덕후 새끼가 하다 하다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는구나. 나는 혁무진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소설이랑 현실이랑 같아? 응? 네가 본 소설에 혓바닥 잘못 놀려서 맞아 죽은 놈은 안 나오던?”
“자, 잠깐! 잠깐만요! 제가 직접 그런 걸 목격한 건 아니지만 무림은 충분히…….”
“네, 다음 씹덕.”
빡!
* * *
홍화객잔은 태원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산서의 노른자위 땅이라 불리는 태원에서도 목 좋기로 유명한 곳.
그런 홍화객잔 앞이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당연한 광경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심했다.
“어이구, 이게 다 무슨 일이래?”
“마차에 군병에……. 이보게 양 씨, 뭐 들은 거 없어? 전쟁이라도 일어나나?”
“나도 몰러.”
웅성거림 속에서 여섯 마리의 준마가 끄는 호화롭고 거대한 마차가 우뚝 멈췄다.
이어 족히 일백에 달하는 군병이 오와 열을 맞춰 홍화객잔의 입구에 시립하자 관복을 차려입은 관리가 힘차게 외쳤다.
“상산왕 전하의 왕명(王命)을 받들라!”
“왕명을 받들라!”
왕명이라는 짧은 단어가 주는 막대한 무게감. 거기에 더해 일백의 정예병들 입에서 터져 나온 천둥 같은 외침에 한껏 숨죽인 목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자네 방금 들었나?”
“내 귀는 무슨 장식인 줄 알아? 왕명이라고 한 거 다 들었네.”
“무슨 일인지 감 좀 잡히는 것 없나?”
“듣기로는 홍화객잔에 산서잠룡이 묵고 있다 하던데, 아마 그것 때문이 아니겠나? 어린 전하께서 무공을 좋아하시는 거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까.”
“그거야 나도 알고 있네만…… 지금껏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한 적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뭐, 요즘 산서잠룡이 워낙 유명해지긴 했지. 얼마 전에는 관군을 대신해서 적풍단인가 하는 놈들도 쓸어 버렸으니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혹시 벼슬이라도 내리실 생각…… 헛, 나온다. 나와!”
누군가의 외침에 수많은 시선이 객잔의 입구로 쏠렸다.
활짝 열린 문 앞, 내리쬐는 햇빛 아래 왕의 부름을 받은 당사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오오, 저분이 산서잠룡인가?”
“한둘이 아닌데?”
“검을 찬 걸 보니 다른 후기지수들인가 보지, 뭐.”
“그래서 산서잠룡이 누구야?”
“딱 보면 모르겠나? 중간에 가장 크고 잘생긴 놈. 아니, 저분이 바로 산서잠룡 진태경 소협일세.”
“아따, 다들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그려.”
사람들의 수군거림처럼 모습을 드러낸 다섯 사람은 각기 용봉(龍鳳)이라 할 만했다.
그중 진태경의 존재감은 단연 군계일학. 중앙에 우뚝 선 그를 향해 경탄 어린 시선이 쏟아지던 그 순간이었다.
“으헉.”
털썩!
“……?”
“……?”
난데없이 후기지수 중 한 사람이 풀썩 쓰러지는 게 아닌가.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립해 있던 군병들까지 이게 뭔가, 하는 눈빛으로 쓰러진 후기지수를 바라봤다.
“커흠, 커허험!”
관리의 헛기침에 쓰러진 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바닥에 엎어졌던 후기지수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일어나자 관리가 붉은색 비단을 펼쳤다.
“커흠. 무림의 후기지수들은 왕명을 받들라! 이는 거룩한 천자의 아우인 과인이…….”
“꺅!”
털썩!
이번에 쓰러진 이는 여인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순간 관리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러나 그는 왕명을 전달하는 몸. 고작 이런 일에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관리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 과인이…….”
“허억!”
털썩!
“그, 그대들에게 내리는…….”
“히익!”
털썩!
이번에는 관리도 화를 피할 수 없었다. 혀를 깨물었는지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침묵에 잠긴 좌중.
절망에 빠진 관리에게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온 한 사람이 속삭였다.
“저기, 굳이 밖에서 할 필요 있습니까? 그냥 안에서 하시죠?”
진태경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관리가 대답했다.
“그헙시하.”
“……그냥 고개만 끄덕이세요. 옷에 피 튀어요.”
* * *
관리가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다들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상황. 결국, 내가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좀 아픕니다.”
“아프다니, 그게 무슨?”
“파릇파릇한 무림의 동량들 아닙니까. 강해지려 너무 수련에 몰두한 나머지 몸이 안 좋아져서 픽픽 쓰러진 겁니다.”
“그게 정말이오?”
“…….”
“…….”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나는 슬쩍 돌아서며 물었다.
“정말이냐고 물으시는데, 혹시 못 들으셨습니까?”
산서오문의 후기지수 네 사람이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다.
“아, 아니오. 들었소. 잠시 대답을 생각하느라…….”
“마, 맞아요. 전 그냥 누가 대답할 줄 알고…….”
“생각할 게 뭐가 있나요.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데. 안 그렇습니까? 허허허.”
물론 사실대로 말하면 나와의 일대일 면담 시간을 갖게 될 거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
앞으로 산서 무림에서 멀쩡히 살아가려면 태원진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네 사람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뭐, 일이 이렇게 된 겁니다.”
관리는 미심쩍다는 듯한 눈빛으로 재차 질문했다.
“한데 왜 한 사람은 안 보이는 거요? 내가 알기로 진 소협을 포함해서 여섯 사람이 되어야 맞는데.”
“아, 성운표국의 소국주 말씀이시군요.”
“그럴 거요. 이름이 아마…….”
“진태요. 우진태.”
“맞소. 그는 왜 자리에 나오지 않았소?”
그야 그 한 사람은 도저히 사람 꼴이 아니기 때문이지.
산서오문의 후기지수들이 이번 오찬에 나와 함께 초대된 놈들이란 걸 진작 알았다면 그 정도로 때리진 않았을 거다.
‘뭐,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어.’
최대한 수습하는 수밖에.
나는 최대한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사소한 시비가 붙어 부상을 당했는데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비? 주먹다짐이라도 했단 말이오?”
“비슷합니다. 어쨌든 얼굴 상태도 그렇고, 도저히 사람들 앞에 보이기 힘들 지경입니다.”
“허어어, 전하께서 초대한 객을 그 꼴로 만들다니. 어떤 천인공노할 놈이.”
“…….”
이거 기분 되게 묘하네. 범인을 코앞에 두고 역모죄라며 중얼거리던 관리가 한탄했다.
“큰일이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이 사실을 아시면 전하께서 얼마나 진노하실지.”
“그, 제가 잘 말씀드려 보면 안 될까요?”
“공자가 몰라서 그렇지, 전하께서 한번 마음이 상하시면 아무도 말릴 수 없소. 당분간 인근이 쑥대밭이 될 거요.”
“쑥대밭이 되다뇨?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겠소? 우선 성운표국의 소국주를 상하게 한 놈을 잡아들여 엄중히 문책할 것이고, 치안이 엉망인 이유를 들어 수십 명이 관직에서 물러날 거요. 그중에는 나도 있겠지.”
“…….”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해.
한창나이에 정리 해고를 당하게 생긴 관리는 처연한 표정으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열이 넘는데……. 휴우, 하늘이 원망스럽군.”
심지어 대가족이라니.
좌불안석이 된 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때였다.
“흐아아암.”
분위기에 안 맞는 태평한 하품. 기지개를 쭉 켜고 내려오는 한 사람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인다.
“저기,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응? 뭘 말이오?”
“더 대단한 후기지수를 데려가면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그럴 거요. 더 뛰어난 인물을 찾았다는데 뭐라 하시진 않을 테니.”
됐다. 나는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 청풍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려 절정 고수씩이나 되는 후기지수다.
“혹시 황족 본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