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39
#138화
호화로운 육두마차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척 봐도 정예로 보이는 군사들이 앞에서 길을 텄고, 개미처럼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은 양옆으로 쫙 갈라서서 바람처럼 달려가는 마차를 지켜봤다.
“모세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 중얼거림에 청풍이 반응했다.
“모세요? 그게 뭡니까?”
“있어요, 그런 사람이.”
“아, 네.”
혁무진이었다면 또 이상한 소릴 한다며 한참을 투덜거렸겠지만, 청풍은 달랐다.
그는 놀이동산에 온 어린애처럼 신난 얼굴로 마차 이곳저곳을 누르고 두드렸다.
“육두마차는 난생처음 타 봅니다!”
“……사두마차는요?”
“사두마차도 안 타 봤어요!”
“그냥 마차는…….”
“그냥 마차도 타 보고 싶습니다!”
“…….”
지하철이라도 태워 주면 기절하겠는데.
이쯤 되면 안 해 본 걸 세는 것보다 해 본 걸 세는 게 훨씬 빠르겠다.
나는 흥분 상태에 접어든 청풍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거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얘를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하긴, 평생을 산에서 살았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루기가 쉬워서 좋기도 하고.’
방금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황족이라는 한 단어에 쌍라이트가 번쩍하던 눈동자도.
‘혹시 황족 본 적 있어요?’
‘볼래요! 보겠습니다! 보게 해 주세요!’
그의 눈에 담겼던 건 일반적인 양민들이 가지는 황실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물원 코끼리를 보러 가는 설렘이랄까.
‘진짜 특이한 놈일세.’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보다.
중상인 우진태를 제외한 산서오문의 후기지수들도 해괴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청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상태가 좀…….”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거야?”
“괜히 전하 앞에서 말실수라도 하면 우리까지 피 볼 것 같은데.”
“말실수로 끝나면 다행이지. 황족 처음 봐서 신기하다고 귀라도 잡아당기면 그날로 끝이야, 끝.”
……제법 그럴듯한 추측인데?
후기지수들의 수군거림에 함께 마차에 타고 있던 관리도 불안한 얼굴로 귓속말을 건넸다.
“저기, 진 공자.”
“네?”
“저 사람…… 정말 괜찮은 것 맞소?”
“믿으십쇼. 제가 보증하는 고수라니까요.”
“아니, 고수고 나발이고 정신이 괜찮냐는 말이오.”
“아.”
“차라리 공자와 함께 있던 그 무사를 데려오는 게 더 낫지 않겠소?”
“누구, 아 혁무진이요?”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소. 내 듣자 하니 그 무사도 상당한 무공의 소유자라던데.”
혁무진이 들었다면 좋아서 펄쩍 뛰었을 얘기다.
문제는 아침에 나한테 맞은 덕분에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어 도저히 함께 갈 수 없다는 거지만.
‘그리고 혁무진 정도로는 안 돼.’
어린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하려면 보다 큰 선물을 가져가야 한다.
나는 걱정하는 관리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문제 안 생기도록 제가 책임지고 단속하겠습니다.”
내가 누군가, 명망 높은 태원진가의 직계이자 떠오르는 샛별, 산서 무림의 라이징 스타다.
내 호언장담에 관리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럼 본인은 진 공자만 믿겠…….”
우둑.
“……?”
“……?”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 우리의 시선에, 뭔가를 움켜쥐고 있는 청풍이 보였다.
“어, 이게 왜 떨어졌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황금 용을 들고 헤헤 웃는 녀석의 모습에 한참 침묵하던 관리가 나를 바라봤다.
“진 공자.”
“네.”
“정말 괜찮은 것 맞소?”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마도요.”
* * *
저택이 아니라 성(城)이라고 해도 될 만큼 드넓은 공간. 사내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강건한 눈빛을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공손히 예를 표했다.
“첨사 어른을 뵙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기둥들이 끝없이 늘어선 회랑(回廊)을 지나고 얼마나 걸었을까? 용이 음각된 거대한 철문이 나타나고서야 사내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뢰게.”
“충.”
그를 향해 군례를 취한 호위군 소속의 장수가 힘차게 외쳤다.
“산서성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 이풍(李灃) 영감 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하라.”
“……!”
어린아이처럼 앳되지도, 그렇다고 장성한 사내처럼 굵지도 않은 목소리.
뭔가를 짐작한 사내, 이풍의 눈썹이 솟구친 그때, 육중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그그긍.
그곳은 호화롭게 치장된 대전(大殿)이었다. 사방이 금은보화로 번쩍거렸고 수십 명이 앉아도 될 만큼 넓은 탁자는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입을 딱 벌렸을 만한 광경. 그러나 이풍의 시선은 한곳에 못 박혀 떠날 줄을 몰랐다.
‘저자가 어찌.’
이풍의 시선 끝, 탁자의 상석(上席)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빙긋 웃었다.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붉은 비단으로 몸을 휘감은 사내의 입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누구야, 우리 이 첨사 아니에요?”
우리 이 첨사?
이풍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군례를 취했다.
“……도지휘동지(都指揮同知)를 뵙습니다.”
도지휘동지는 종이품으로 각 성에 두 명밖에 없는 고위직.
군 총사령관인 도지휘사와 성주인 상산왕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직책이며, 부사령관인 만큼 실권 또한 막강했다.
실제로 알려진 것은 이러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가진 권한은 그 이상이었다.
‘쳐 죽일 놈 같으니.’
간사한 혓바닥과 잔재주로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제 배만 채우는 간신이자 탐관오리. 그것이 사내에 대한 이풍의 평가였다.
그러나 이풍의 곱지 않은 눈길에도 그의 웃음은 여전했다.
“이 첨사, 오랜만에 보는데 분위기가 너무 험악한 거 아니에요? 혹시 내가 뭐 섭섭하게 한 거라도?”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그저 도지휘동지께서 이런 자리에 계신 것이 뜻밖이라 놀란 것뿐입니다.”
“이런 자리라니?”
“강호의 무부(武夫)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워낙 거친 자들이라 도지휘동지께서 불편하시지 않을까 염려되는군요.”
말은 위해 주는 것 같지만 속뜻은 다르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왜요? 나 이런 자리 좋아해. 그리고 아까부터 호칭이 너무 딱딱하다. 그냥 편하게 불러요. 우리 사이인데 뭐 어때.”
“우리 사이라…… 그게 무슨 사입니까?”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 전하를 충심으로 보필하는 참된 신하들이지요.”
콩 한 쪽도 나눠 먹어? 참된 신하?
사내의 말에 이풍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럼 편하게 홍 내관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사내, 홍 내관의 웃음이 순간 경직됐다.
이풍은 고작 한 단어로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건…… 너무 편한데?”
“저야 말씀을 따른 것뿐입니다.”
“이거 참, 이 첨사가 나를 그 정도로 편하게 생각하는지는 몰랐네.”
“이제라도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 첨사.”
“부르셨습니까, 홍 내관. 아니, 다시 도지휘동지라고 불러 드릴까요?”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홍 내관의 입이 다시금 열린 것은 한참 후였다.
“우리 이 첨사, 많이 늘었다?”
“그렇습니까?”
“응, 몇 년 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했는데?”
“덕분에 여러 가지 배웠습니다.”
“검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혀도 잘 쓰네. 다시 봤어요.”
“누구보다는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팽팽하게 조여진 공기 속에서 홍 내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뭐,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려나?”
만만치 않은 상대가 한발 물러났다. 여기서 더 물어뜯었다가는 되레 낭패만 볼 뿐이다. 이풍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하십시오.”
“이 첨사가 전에 화산파에 있었다고 했죠?”
이풍이 멈칫했다. 그에게 있어 화산파는 그리우면서도 아픈 기억이다.
화산을 떠난 지 이제 어언 십 년이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몸과 마음 깊숙이 남아 있었다.
“예. 속가제자였습니다.”
“화산파는 섬서에 있고?”
그와 홍 내관은 이른바 정적(政敵)이라 할 수 있는 관계였다. 그만큼 오히려 속속들이 잘 알았다.
홍 내관은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몰라서 물어볼 만큼 허술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속에 구렁이가 백 마리는 득실거리는 교활한 놈이다.
그렇기에 이풍은 더욱 의아함을 느꼈다.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내가 이번에 알게 된 지인이 몇 분 있는데, 혹시 이 첨사도 알까 싶어서.”
“무림인입니까?”
“맞아요. 그것도 섬서 출신.”
“설마 화산……?”
“에이, 그럼 내가 미리 말을 했겠지.”
이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스스로 떠나오긴 했지만 평생을 자랑스러워할 사문(師門)이다. 홍 내관 같은 간신배와 엮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섬서에 문파가 한둘도 아니고, 저도 본산에서 수련하는 중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들어도 잘 모릅니다.”
“그런가? 그럼 얼굴을 보면 알 수도 있겠네?”
“……?”
이풍의 표정을 본 홍 내관이 탁자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까 이 첨사가 물어봤었죠?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있냐고.”
아름답게 세공된 은 젓가락이 술잔을 두드렸다.
팅. 맑은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갔다. 어리둥절한 이풍에게 홍 내관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인을 몇 분 초대했거든. 전하께서 좋아하실 만큼 명성 높고 강한 무인들로.”
동시에 철문 밖에서 힘찬 외침이 들려왔다.
“섬서의 종남삼수(終南三手)가 뵙기를 청합니다!”
“종남삼수…… 종남파!”
이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화산파와 종남파는 장장 백 년간 섬서의 패권을 다퉈 온 앙숙 관계.
홍 내관의 의도는 지금 짓고 있는 웃음만큼이나 환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섬서 사람이라 자리를 마련해 봤어요. 괜찮죠?”
이풍이 주먹을 불끈 움켜쥔 그때,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대전 안으로 장대한 체구의 세 사람이 성큼 들어왔다.
그중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끼어 있었다.
“이게 누구야. 화산파의 이풍 아닌가?”
이풍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놈의 얼굴을 본 순간 십 년 전의 그 치욕스러운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가 여길 어떻게!”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어떻게 오긴. 산서성의 도지휘동지께서 불러 주시는데 천 리라도 한달음에 달려와야지. 안 그렇습니까?”
“별말씀을. 오히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으드득, 이를 가는 이풍을 향해 종남삼수의 셋째, 공일혁이 씩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출세했네. 자네 주제에 도지휘첨사라…… 화산에서 은자깨나 뿌렸겠어. 응?”
“네놈이 감히 화산파를 모욕해?”
“응? 화산파를 모욕한 건 자네지. 십 년 전, 그 대단한 화산 무공으로 백여 초 만에 무릎을 꿇은 게 누구였나?”
“이놈-!”
이풍의 입에서 벼락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가 화염이 줄기줄기 쏟아지는 눈동자로 공일혁을 노려보던 그 순간. 철문 밖에서 세 번째 외침이 들려왔다.
“산서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뵙기를 청합니다!”